제49화
도시를 뒤흔들 듯 커다랗던 함성은 막상 성문이 열리자 조용해졌다.
모두 입을 다물고 중앙을 걷는 남자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리안 칼라브리아가 말에 탄 채 천천히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만인의 시선을 모으는 중인데도 그는 신경 쓰는 기미조차 없었다.
‘어지간히 주목에 익숙한가 보군..
하긴 태어나서부터 주목 속에 살아왔을 테니 당연할 것이다.
리안은 자신을 맞으러 나온 인파를 보고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지나쳐 걸었다.
‘주둔지로 가는 건가.’
방향을 볼 때 맞는 듯했다.
오타주르는 망설임 없이 곧장 성곽에서 뛰어 내려가 말에 올라탔다.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니 한번 그를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
리안을 그대로 지나 보내기 아쉬운건 그뿐만이 아닌 듯했다.
군중들도 여전히 고요했으나 하나둘씩 기사단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리안은 굳이 군중을 쫓아내지 않았으나 그렇다고 기다려 주는 기색도 없었다.
기사단의 행렬이 조용히 성내를 지나 바젤의 시민들이 둘러싼 가운데 주둔지에 도착했다.
리안이 성에 들어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친 말들을 돌보고 주둔지로 가서 피로를 풀어. 빨리 회복하고 곧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만으로도 사람들이 술렁였으나 내용 자체는 무척 수수했다.
놀라운 전과를 올리면 누구나 자기 과시를 조금이라도 하게 마련일 텐데.
리안은 마치 일상적인 훈련이라도 마치고 온 듯한 말투였다.
담담하게 말한 뒤 그는 곧장 주둔 지의 입구에 있는 서기관에게 다가갔다.
“전투를 기록해 수도에 전달하십시졸지에 주목을 받게 된 바젤의 서 기관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서식에 맞게 양피지에 기입했다.
리안의 부관이 전투 결과를 대신 보고했으나 사실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정말로 굉장하십니다. 칼라브리아백작님.”
큰 소리로 외치며 앞으로 나서자 리안이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바젤의 시장 오타주르 유니스입니다.”
정중한 소개에도 리안은 그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지만, 무례하다거나 무시당한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원래부터 모두에게 저런 태도 일 것이다.
오타주르는 일부러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주변에도 들리도록 커다랗게 말했다.
“토벌에 성공하셨으니 하크메르시아에게 바치려고 모은 제물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해 주십시오.”
예상대로 리안은 고개를 갸웃거리고 이델체 백작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올해는 공납을 모집한 적이 없을 것입니다만.”
“하지만 곁에 서 계신 백작님의 대리인께서 공납을 요구하셨습니다.”
시치미를 떼고 대답하자 주변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리안이 이델체 백작을 돌아보았다.
“그게 사실입니까?”
“그것은….”
이델체가 말을 흐리자 리안은 들을 필요 없다는 듯 오타주르를 향했다.
그토록 약삭빠른 남자가 곧장 대답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뻔하다고 여긴 모양이었다.
“겨우 하룻밤을 모았을 뿐이라 요구하신 액수의 절반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앞으로 가혹한 공납의 늪을 벗어나게 해 주셨으니 감사의 표시로 제국 기사단에 바칠까 합니다.”
적다해도 어지간한 작은 마을을 1년쯤 먹여 살릴 수 있는 제물이었다.
오타주르는 이델체 백작이 눈꼴사나웠을 뿐 리안과 척을 질 생각은 없었으므로 빠르게 덧붙였다.
“정황을 보아하니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리안은 무표정하게 즉답했다.
“제국 기사단은 충분한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잘못 걷었다면 돌려주어도 되고 혹은 두었다가 시민을 위해 요긴한 곳에 쓰십시오.”
조용한 말.
그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서 오히려 묘하게 마음 한 곳에서부터 파문이 일어났다.
“저는 임시 시장일 뿐이므로 안정되면 곧 저를 대신할 이가 임명될 것입니다.”
말하자마자 구차하단 생각에 후회했다.
보통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이었다.
평소답지 않게 쩔쩔매고 있는데 리안이 입을 열었다.
“이곳 주둔지는 잘 정리되어 있고 괴수 서식지가 바로 근처인데도 시민의 낯빛이 밝습니다. 통치자가 그릇된 행동을 보인다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리안의 보라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주변을 훑은 뒤 오타주르에게 돌아왔다.
“당신 이상으로 잘 정비할 자는 없을 겁니다. 계속 자리를 유지할 수 있도록 말해 보겠습니다.”
말이 떨어지자마자 큰 소리를 내지 못하던 시민들로부터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주변의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오타주르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리안 칼라브리아가 변방의 시장을 유지하겠다는데 누구도 그 결정에 토를 달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직을 유지하게 됐다는 사실보다 시민들이, 그리고 그가 자신을 인정했다는 것이 더욱 커다랗게 다가왔다.
속에서 번져 가던 파문이 더욱 크게 온몸을 휘감았다.
어차피 구차해진 거 체면 때문에 이 순간을 그냥 그렇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칼라브리아 기사단장님!”
잔뜩 흥분해서 갈라진 오타주르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저는 당신을 평생 따르겠습니다!
언제까지나 제국을 수호해 주십시오.”
“우와아아아아!”
그의 외침에 시민들의 환호가 더욱 커졌다.
아마 아까부터 계속 그러고 싶었던 것을 눈치 때문에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시민들이 반응하자 기사들도 동조 하듯 리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우레와 같은 반응에 리안은 기쁘다 기보다는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마음만은 고맙게 받겠습니다.”
짧게 말한 뒤 리안은 어색한 듯 주둔지의 지휘실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시민들은 소리를 더욱 높였다.
그가 사라지기 전에 더 마음을 전하고 싶은 듯했다.
모두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오타주르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것을 본 누군가가 그의 동작을 따라했다.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가.
움직임은 금방 번져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무릎을 대고 바닥으로 자세를 낮추었다.
순식간에 자세를 통일한 사람들은 리안의 뒤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변경에 사는 오타주르는 평생 단 한 번도 이 자세를 취해 본 적이 없었다.
일개 기사단장에게 취하는 예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국의 국민이자 봉신이 취할 수 있는 예의 극치.
바로 자신들의 주군, 황제에게 바치는 예였다.
자신의 뒤에 일어난 불길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안은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팰리시티의 밤은 그 어느 날보다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미나즈는 연금술사의 등으로 찬찬하게 빛나는 거대한 아치를 통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 장관이네.”
수많은 기대를 모은 행사는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지만 오늘 밤은 달랐다.
근 며칠간 팰리시티를 휩쓸던 플로 이드 공작 부인의 연회.
그것은 사람들의 예상을 비웃듯 훌쩍 뛰어넘어 버린 채 고고하게 벌어졌다.
“이런 게 실제로 가능하다니.”
클로드도 멍하니 위를 바라보며 혀를 내둘렀다.
바로 얼마 전에 보았던 샨카른 호텔은 사라지고 오래전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새로운 백작 저가 펼쳐졌다.
정원 구석구석이 희귀하고 이국적인 식물들로 촘촘히 채워졌고 빛을 내뿜는 분수가 곳곳에 자리했다.
하늘에서는 황금 폭죽이 터지고 홀로 타오르는 불꽃들이 둥둥 떠다니며 장관을 이루었다.
그것을 구경하기 위해 드넓은 울터리 너머 광장에까지 사람들이 모여있었을 정도였다.
“이거 미르타 샴페인이잖아. 이걸 모든 손님에게 대접하다니!”
미나즈가 웨이터로부터 보석 같은 샴페인 잔을 받아 들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병 가격이 분명 어지간한 제국민의 한 달 수입을 상회할 것이다.
그걸 이 드넓은 부지에 북적이는 손님들에게 전부 나눠 준다니.
재력이라면 제국의 공작인 두 사람 역시 전 세계에서 꼽아도 호명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을 터였다.
그런데도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돈이 있다 해도 이 귀한 걸 이만큼 구하는 것이 더 무섭군요.”
클로드의 말대로 재력도 재력이지만, 제국의 유통망을 꽉 잡은 공작부인의 힘이 느껴지는 부분이었다.
“하늘에 돈을 쏘아 올려 불태워도 이거보다는 검소할 것 같네.”
“동감합니다.”
드물게 동조하는 클로드를 보며 미나즈는 씩 웃었다.
“자, 그럼 이제 연회를 즐겨 보자.
우선 저 쟁반을 통째로 비울까?”
미르카 샴페인이 가득 든 쟁반을 가리키며 말하자 클로드가 가로막으며 빠르게 말했다.
“취하기 전에 속내를 먼저 말해 주시죠.”
“술 마시자는데 무슨 속내가 있어?”
“그간 공작 부인이랑 몰래 연락을 주고받았지 않습니까!”
클로드의 말에 미나즈가 입을 비죽내밀었다.
“그랬는데. 그게 뭐?”
“무슨 말을 했는지 연회에 가면 알게 될 거라면서요.”
“그래. 그러니까 알게 될 때까지 기다려.”
얼렁뚱땅 얼버무리고 샴페인 잔을 집었으나 클로드가 곧장 빼앗아 들었다.
“됐으니 빨리 말해요!”
“왜 이렇게 보채는 거야. 알게 될 거라니까?”
“아무것도 모르다가 당신의 꿍꿍이에 넘어가는 건 이제 사양입니다!”
“에이, 무슨 꿍꿍이씩이나. 너는 그저 너의 주관을 따를 뿐이잖아?”
미나즈가 천연덕스럽게 말하자 클로드가 말문이 막힌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지 말고 얼굴 풀어. 넌 그냥 놀다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 돼.”
“매번 그런 식으로……”
클로드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려 했으나 상황이 도와주지 않았다.
입구로부터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거대한 외침이 울렸다.
“황제 폐하께서 드십니다.”
제국의 귀족으로서 황제의 입장에 대한 예를 취해야 했다.
클로드는 예법에 따라 한쪽 무릎을 꿇으며 긴장한 눈으로 입구를 살폈다.
연회에 걸맞게 성장한 황제와 나비처럼 화사한 드레스를 입은 황녀가 들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금 수척해 보였으나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방관할 겁니다.”
황제가 긴 정원을 지나는 것을 보며 클로드가 잇새로 말했다.
“그래. 내키지 않으면 마음대로 구경이나 하라니까.”
미나즈는 생글생글 웃었다.
클로드가 힘들게 인내심을 긁어모으기 위해 먼발치를 보며 기사도 헌장을 외우고 있을 때였다.
“오. 저 여자!”
미나즈가 낮게 중얼거리더니 클로 드의 소매를 당겼다.
무시하고 싶었으나 원수 같은 호기심에 자동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미나즈의 손끝이 황제와 황녀를 수행하는 기나긴 행렬의 한 여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치켜 올라간 눈매에 깡마른 얼굴.
그리고 요란한 드레스가 인상적인 예쁘장한 중년 부인이었다.
아무리 봐도 기억은커녕 낯익은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누군데 그럽니까?”
“그간 내가 엘레노어 남작 부인의 뒤를 열심히 캔 거 알지?”
고개를 끄덕이자 미나즈가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점수를 좀 따겠는걸.”
미나즈의 눈동자가 심술궂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