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이곳에 진을 치겠다.”
늦은 저녁.
리안은 산기슭 정면에 드넓은 초원에서 멈춰선 채 말했다.
“야영하기에 지나치게 탁 트인 게 아닌가 싶습니다만.”
을 내렸다.
“숲에서 도시 방향으로 최대한 넓게 공간 제약 주술을 걸고 유지하게.”
“주술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실패해도 하크메르시아가 민간에 피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해야 해.”
잘 훈련된 전투 주술사는 더 토를 달지 않고 곧장 작업에 들어갔다.
막사로 돌아온 리안은 곧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리안은 새벽 별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야영용 천막을 나섰다.
“어디 가십니까, 단장님?”
불침번을 서고 있던 기사가 질문을 던졌다.
리안은 대답하지 않고 말에 올라탄 뒤 그대로 야영지를 벗어났다.
탁 트인 초원을 순식간에 주파한 그는 곧 울창한 산림으로 접어들었다.
숲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그는 거대한 고목들에 둘러싸였다.
모든 나무가 하늘 끝까지 닿을 것처럼 드높게 뻗어 있었다.
사람의 발길이 조금도 닿지 않았다.
는 뜻이었다.
‘좋지 않군.’
하크메르시아는 나무를 자유자재로 오르내리는 기동력을 지녔다.
도약해서 맞서 싸우는 건 문제 없었지만, 하크메르시아가 도주하면 잡기 어려울 것이다.
하크메르시아와 조우하기 전 고목의 숲이 끝나기를 바라며 리안은 계속 말을 달렸다.
숲이 깊어졌을 무렵.
오솔길을 조금 벗어난 곳에서 야생짐승의 기척이 느껴졌다.
리안은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활을 안장에서 끌어 올려 곧장 시위를 걸었다.
픽 -
날렵한 소리와 함께 화살이 망설임없이 날아갔다.
그것이 풀숲을 뚫는 것과 거의 동시에 짐승의 단말마가 새벽의 숲을 울렸다.
풀숲을 헤치고 확인해 보니 제법 큼직한 사슴이었다.
리안은 사슴을 말 등에 단단히 묶어 고정한 뒤 다시 숲 안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마침내 숲이 끝나고 거대한 분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보자마자 뭔가를 느낀 리안은 말의 속력을 급속히 줄였다.
‘이곳이군.’
마수가 사는 곳은 흔히 그렇듯 주변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풍겼다.
새도 날아들지 않고 벌레조차 숨을 죽인 듯한 고요함.
분지는 자연적으로 생성된 것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 만들어진 듯했다.
나무들이 주변에 쓰러져 있었으나 인위적인 벌목의 흔적은 없었다.
무언가 거대한 생명체가 자주 드나 들어 무너지고 부서진 것이다.
스르릉.
검을 뽑아 들고 주위를 살폈으나 아무 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리안은 분지 중앙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흙이 부드러운 곳을 골라 가벼운 방어진을 그린 뒤 사슴을 내려놓았다.
그 곁에 앉아 리안은 감각을 예민하게 하는 명상을 시작했다.
‘곧 나타날 거야.’
‘왔다.’
찌르는 듯한 감각에 리안은 눈을 떴다.
그의 보랏빛 눈동자에 시커먼 물체가 무서운 속도로 접근하는 것이 보였다.
캉!
날카로운 금속의 파열음이 새벽의 숲으로 퍼져 나갔다.
리안은 검을 들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른 첫 일격을 막아냈다.
“예의가 없는 녀석이군.”
지성이 있는 존재라 들었는데 조금의 여지도 없이 공격부터 하다니.
낮게 중얼거린 뒤 리안은 이어질 공격을 대비했다.
곧 숨을 돌릴 새도 없이 하크메르시아의 손톱이 날아들었다.
캉! 캉! 캉!
검과 날카로운 손톱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공기 중에 흩뿌려졌다.
적은 리안이 여태껏 상대한 그 어떤 적보다도 빨랐다.
그만큼 유연해서 예상치 못한 각도에서 공격이 쏟아져 마치 수많은 적에 둘러싸인 것만 같았다.
왼쪽. 오른쪽. 등 뒤, 아래, 위.
한동안 리안은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 내기에만 급급했다.
등에 늘어뜨린 망토는 이미 너덜너덜해졌고, 어떤 훈련에도 흐트러진 적 없던 옷자락이 찢겨 나갔다.
검풍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피부에 생채기가 생겼다.
금방이라도 하크메르시아의 거대한 발톱에 몸이 두 동강 날 것처럼 위태로웠다.
그러나 위기감은 리안의 안중에 조금도 없었다.
‘이렇게 마음껏 싸워 보는 건 처음이다.
주변에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움직이는 것도, 하나씩 족쇄가 벗겨지는 듯했다.
무겁던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온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스무 살.
노련함은 없어도 육체의 움직임은 정점에 달한 시기.
아래, 위.
완전히 집중한 리안의 움직임에 조금씩 리듬이 붙기 시작했다.
옆으로 돌아서 순식간에 위로 올려치자 처음으로 하크메르시아가 뒤로 물러났다.
직접 개발한 검술이었으나 누구에게도 쓸 필요가 없었다.
리안은 틈을 주지 않고 그대로 몰아쳤다.
점점 전장이 하크메르시아 방향으로 옮겨 가기 시작했다.
하크메르시아가 자세를 다잡으려는 듯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나 리안은 지지 않고 도약해 그가 앉은 가지를 베어 나갔다.
도망치며 방어하고 그 주변을 파괴하는 검술의 공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재미있네.’
리안은 수도를 떠난 후 처음으로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한계에 도달한 움직임이 그를 더욱 고조시켰다.
검을 감싼 기운이 온몸을 덮어 공기의 압력에서조차 벗어난 듯하다.
챙챙챙.
리안의 검과 하크메르시아의 발톱이 대기를 찢을 듯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팔을 휘두를 때마다 풍압으로 인해 곁의 나무들이 휘었다.
리안은 마음껏 써 보지 못한 검술을 펼치며 하크메르시아를 몰아붙였다.
카앙!
굉음과 함께 발톱을 쳐 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처음으로 리안은 발톱이 아닌 다른 것을 찌른 감각을 느꼈다.
‘맞았다.’
유효타가 들어간 듯했다.
하크메르시아가 괴성을 지르더니 크게 도약해 저 먼 나무로 물러나 버렸다.
리안은 바로 뒤쫓는 대신 검을 물린 채 하크메르시아를 바라보았다.
괴수는 나무에 거꾸로 매달린 채 노란 빛이 나는 눈을 선뜻하게 빛내고 있었다.
[인간. 왜 싸우려는 것이냐.]
먼저 실컷 공격해 놓고 이제 와이유를 묻는 건가.
리안이 눈을 찌푸리는 사이 또다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간 그대들이 제공한 제물을 받고 얌전히 지냈다. 이제 와 공존을 거부하는 이유가 뭐지?]
“영원히 약탈당하란 법은 없지. 빼앗긴 자가 토벌에 나서는 게 이상한가?”
[내가 받은 것은 약탈이 아닌 불가침의 대가이다.]
하크메르시아도 감정이 있는 듯 울림이 다소 격앙된 것처럼 느껴졌다.
리안은 무뚝뚝하게 답했다.
“죽고 싶지 않으면 제물을 내놓으라 어르는 건 합의가 아니라 협박이고 약탈이지. 필요한 것이 있다면 빼앗지 말고 스스로 구해.”
[먼저 제안한 건 인간이었다.]
“힘이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많은 걸 포기해야 하지만……….”
리안은 검을 똑바로 들어 세워 하크메르시아를 겨냥하며 말을 맺었다.
“힘이 있다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우는 거야.”
나직했지만, 하크메르시아에게 전해지기 충분했을 것이다.
“모든 걸 포기하고 사라지거나 아니면 여기서 목숨을 걸어.”
리안의 통첩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심장이 쿵쿵 뛰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마지막 격돌에 대한 기대와 흥분 때문이었다.
짧은 시간 사이 날카로운 검신에 푸른빛이 돌 정도로 무시무시한 기운이 서렸다.
[전력으로 와라.]
바라던 바지.
리안은 하크메르시아가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뛰어올랐다.
에너지의 소용돌이.
모든 것이 한 점을 향해 모이고 있었다.
리안은 가장 강한 힘이 모인 곳을 향해 검을 찔렀다.
강력한 폭발음이 세상을 뒤흔들었다.
*
바젤 성의 중앙 성벽.
갤러리에 모은 이들은 넋을 잃은 채 하늘을 붉게 물들인 섬광을 보고 있었다.
오타주르 유니스는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겨우… 스무 살의 기사라고 들었는데.’
무사로서 빠지지 않는다고 자부했으나 방금 본 광경은 완전히 격이 달랐다.
그뿐만 아니라 누구도 그와 같을 수 없을 것이다.
한참 동안 하늘을 물들이던 붉은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공기가 주변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주둔지의 망루 쪽에서 전령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국 기사단에서 하크메르시아 토벌 성공을 공식적으로 알려 왔습니다.”
전령의 외침에 곧 성곽에서 기쁨의 환성이 터졌다.
경비 대원들이 서로를 얼싸안고 탄성을 질렀다. 굉음을 듣고 몰려든 제국민들에게도 금방 소식이 전해져 일대는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
그 장면을 보며 오타주르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허망하군.”
하크메르시아가 토벌된 것은 분명 기뻤다.
그러나 오타주르의 목표는 평생 하크메르시아로부터 모든 것을 지키고 공존하는 것이었다.
그가 계획한 인생은 전부 무너져 내렸다.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압도적인 무력에 의해서.
‘이제 겨우 시작했을 뿐인데. 이제 얼마 머물지 못하겠어.’
남작 작위조차 받지 못한 별 볼일 없는 방계인 그는 바젤 같은 도시를 맡기에 신분이 낮았다.
그가 비록 변방이나 비옥한 영지와 적당한 교역로를 갖춘 바젤의 시장이 된 건 말할 것도 없이 하크메르시아에 묶인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곧 이권을 두고 그보다 높은 귀족들이 다툴 거고 그를 대신할 시장이 임명될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지.’
오타주르는 쓴웃음을 지었다.
꿈이 좌절된 건 안타까웠으나 그 사실이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위대한 장면을 보고 나면 감화되는 법이니까.
“기사단이 귀환했다!”
주변에서 함성이 울렸다.
오타주르는 성벽 난간으로 다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한 무리의 기사단을 보았다.
이미 거리가 제법 가까워져 시력이 좋은 그는 얼굴도 식별할 수 있었다.
400여년 전 제국을 건국한 초대 황제조차도 그 정도로 미화하진 않을 거다.
그렇게 소녀나 믿을 법한 동화라며 코웃음을 치곤 했다.
그런데 저 별빛 같은 플레티넘 블론드와 흰 얼굴이라니.
그 고고한 기품은 거무튀튀한 피를 뒤집어쓰고도 그 빛이 조금도 바래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평생 찬사를 받기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저 남자의 대단함은 겨우 그것이 아니었다.
오타주르는 대열의 맨 뒤 수십 마리의 말에 묶여 질질 끌려오는 하크메르시아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평생을 곁에서 살았지만, 제대로 형태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상념에 잠긴 사이 기사단은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성문을 열어라!”
우렁찬 목소리에 다시 한번 도시에 환호성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