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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47화 (47/120)

제47화

“이런 가엾게도.”

황녀는 우리 안의 에이드리언을 보며 혀를 찼다.

분명 데려올 때는 그냥 우리에 넣어 두었을 뿐인데 어느새 양팔이 결박되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다.

베아트릭스에게 정신을 지배당한 상태였다.

입에 물린 재갈이 풀리고 양팔이 자유로워지자 에이드리언이 잔뜩 싣목소리로 더듬더듬 물었다.

“나, 나를 대체 왜 이곳에 가둔 겁니까?”

“저 빌어먹을 질문에 빨리 대답해!

지긋지긋해서 입을 인두로 지져 버리기 전에!”

베아트릭스가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베아트릭스는 황실의 피에 거역할 수 없는 봉인이 걸려 있었다.

그녀를 손에 넣고 나니 많은 것이 쉬워졌다.

그녀는 대륙을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마녀.

어둡고 습한 곳을 싫어하는 황제는 지하로 전혀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소중한 딸이 끔찍한 마녀를 이용해 무슨 일들을 벌여왔는지 전혀 모를 것이다.

아무도 올 수 없고 베아트릭스가 지키고 있는 이 통제 구역은 오로지 아일린만을 위한 가장 안전한 창고인 셈이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황녀가 걱정스레 묻자 에이드리언은 조금 희망의 편린을 엿본 모양이었다.

그는 더듬으면서도 필사적으로 말을 늘어놓았다.

“괜찮지만, 견디기 힘이 듭니다. 황녀 전하. 저를 내보내 주세요.”

“그럴 수 없어요. 나가면 에이드리언은 죽게 될 테니까요.”

“제가 지은 죄가 있다면 재판을 받고 차라리 사형을 당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러면 당신을 지금까지 숨겨 놓고 살려 둔 제게도 화가 돌아올 거라고요.”

에이드리언의 창백한 얼굴에는 깊은 절망이 어려 있었다.

“저는, 저는 황녀 전하께 어떤 해도 끼칠 의도가 없습니다. 뭔가 잘못됐다면 그건 분명히 오해입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기품을 유지했던 에이드리언도 이젠 정신력이 바닥난 듯했다.

장기간 햇빛을 보지 못하고 갇혀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초탈해 버린 건지, 그도 아니면 원래 미쳐 있었기 때문에 이상이 없는 건지 변함없는 베아트릭스를 제외하면 지하에 갇혀 온 사람은 모두 얼마 버티지 못했다.

“부탁입니다. 내보내 주면 뭐든지하겠습니다.”

결국 에이드리언의 입에서 황녀가 기다리던 말이 나왔다.

그러나 황녀는 곧장 반가운 기색을 보이는 대신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사람이란 쉽게 배신하는 동물이거든요. 그 때문에 당신이 여기에 있는 것이고요.”

황녀의 말에 에이드리언은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결코 그러지 않겠습니다. 황녀 전하의 말을 거역하지 않을 겁니다.”

황녀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한 뒤 에이드리언에게로 다가갔다.

“원래대로라면 절대 풀려날 수 없지만, 그렇게까지 말하니 믿어 볼까요. 마침 내게는 에이드리언이 필요 하거든요.”

정확히는 당신의 일부가 필요한 거지만, 상냥하게 미소 짓는 황녀의 푸른 눈이 섬짓하게 빛났다.

*

바젤의 시장인 오타주르 유니스는 붉은 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흰 얼굴, 그리고 순박한 얼굴과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건장한 체격을 한 사내였다.

그는 현재 집무실에서 낯선 손님을 맞이하는 중이었다.

“이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오타주르는 자신보다 머리 하나가 작은 남자에게 방금 넘겨받은 양피지를 내보이며 물었다.

“당신은 수도에서 내려온 토벌대가 아닙니까? 이번에는 토벌을 위해 제국 최고의 기사가 동행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렇소.”

“그런데 하크메르시아에게 줄 제물을 마련하라니요. 그것도 이 영지에서 단독으로!”

오타주르의 언성이 커졌다.

“이곳은 변방의 작은 도시로 하크메르시아를 자극할까 봐 제대로 된 무역도 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이런 거금을 마련할 여력 따위는 없습니다.”

“의지가 있다면 길이 있는 법이오.”

자신을 이델체 백작이라 소개한 남자는 오타주르의 호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제길. 여기저기서 많이 뜯어 먹은 솜씨로군.’

아무래도 그는 이런 상황에 무척 익숙해 보였다.

“정말 이게 상부에서 내려온 명령입니까?”

“그렇소.”

오타주르는 눈앞의 약삭빠른 사내보다 토벌대의 책임자이자 세계 최고의 기사라는 사내에게 분노하기 시작했다.

장차 미래 대공이라는 동화 속의 왕자님께서는 체면을 차리기 위해 토벌을 떠났지만, 막상 도착하니 무서워진 모양이다.

그러니 지역 영주를 쥐어짜서 제물을 바치고 위기를 모면하려는 것이다.

“물론 수도에 고명하신 학자들이 많을 테지만, 최소한 하크메르시아에 대해서는 우리 도시 출신만큼 아는 사람이 없을 겁니다. 나도 겨우 일곱 살 때부터 집채만 한 나무 사이를 평지처럼 이동하며 숲을 누비는 하크메르시아의 그림자를 봤으니까요.”

오타주르는 우선 그들의 체면을 살리려 했다.

“그러니 토벌이 무리하다는 건 잘 압니다. 토벌에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도요. 무산되더라도 실망하지 않도록 주민들에게도 이미 말해 두었습니다.”

그의 말에 거짓은 없었다.

하크메르시아는 그에게 있어 막을 수 없는 천재지변에 가까웠다. 수도에서 나섰다는 말을 들었어도 실제로 잡을 수 있으리라 별로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우린 늘 바치는 제물도 서식지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훨씬 많이 바치고 있습니다. 바쳐서 이득을 보는 게 우리라는 이유죠. 그러나 이곳은 정말 과도한 공납으로 인해 재정의 여유 따윈 조금도 없습니다.”

“변방의 도시치고는 성벽도 높고 거리도 무척 깨끗합니다만.”

“그건 보르미아 공작가에서 지원해 준 덕입니다.”

계속 설득해도 이델체 백작은 입장을 물리지 않았다.

원래 무사 출신으로 인내심이 깊지 않은 오타주르는 결국 화가 치밀고 말았다.

“아니, 토벌 실패를 왜 우리가 뒤집어써야 합니까? 세계 최고 재벌가의 장래 후계자께서 어려운 우리 도시를 쥐어짜서야 되겠습니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르릉 소리와 함께 이델체 백작이 검을 뽑아들었다.

백작은 그것을 오타주르에게 겨누고 으르렁거리 호통을 쳤다.

“그대는 지금 칼라브리아 백작을 능멸하고 명을 따르지 않겠다는 건가?”

제법 명검인 듯 예기가 서려 있었지만, 검술에 조예가 깊지 않은 듯 칼끝에 힘이 없었다.

이런저런 전투로 잔뼈가 굵은 오타주르는 검 없이도 그를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도 출신 중앙 귀족과 사이가 틀어져서는 안 됐다.

심지어 그에게 명령을 내린 게 미래의 대공 칼라브리아 백작이라면….

“토벌 소식만 믿고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마련하려면 아무리 애를 써도 시간이 걸립니다.”

“내일 새벽까지 무조건 마련해. 타협의 여지는 없네.”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 이델체 백작은 시장의 집무실을 나갔다.

“빌어먹을 비겁자 자식!”

리안 플로이드 칼라브리아.

이런 식으로 세상의 명성을 쌓아올린 건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오타주르는 책상을 거칠게 내려쳤다.

*

이른 새벽.

기사단 정비와 순찰을 마친 미쉘은 지휘실로 돌아왔다.

바젤은 도시의 규모가 작았지만, 그간 몇 차례 토벌대가 온 적이 있어서인지 낡긴 했어도 제법 그럴듯한 주둔지를 갖추고 있었다.

그가 등불을 밝히고 리안에게 넘길 보고서를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노크도 없이 그가 일하는 집무실이 열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칼라브리아 백작의 전언을 시장에게 잘 전했다고 알리려 왔네.”

“그거 잘됐군요.”

미쉘의 말투는 다소 퉁명스러웠다.

리안이 그에게 내린 명령이었으므로 직접 전달하고 싶었으나 이델체 백작이 고집을 부리는 통에 편지를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자, 그러니 이제 그대는 칼라브리 아 백작에게 가서 돌아오셔도 된다고 말을 전하고 오게.”

“네?”

“그분의 체면이 손상되지 않도록 잘 손을 썼으니까.”

이델체 백작은 그 말이 설명이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미쉘은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단장님께서는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라 명령하셨습니다만.”

“잡지도 못하고 굳이 잡을 필요도 없는 괴수 때문에 위험을 무릅쓸 필요 없어. 내가 이미 시장과 타협해서 하크메르시아에게 바칠 제물을 준비했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미쉘은 멍해졌다.

“산 아래에서 야영도 하고 잡는 척은 충분히 했네. 이미 제물을 준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전하고 마지못한 척 돌아오면 돼.”

“기사단장님께서는 잡는 척이 아니라 실제로 토벌하실 겁니다.”

“기사단 전력을 대부분 이런 시골도시에 처박아 두고 말인가?”

이델체 백작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앉아 있는 미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자네는 귀족 간의 정치에 대해 잘 모르는군. 기사단 대부분을 몰고 가란 명령에서 속내를 읽고 잘 처리하는 게 부관의 임무야.”

“단장님의 속내가 제국 기사단 전력으로 같은 제국민을 위협해서 제물을 갈취한 뒤 대충 일을 마무리짓는 거란 뜻입니까?”

“이제야 좀 말이 통하는군.”

미쉘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머리 하나쯤 아래에 있는 이델체 백작을 내려 보며 위압적으로 말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말을 전하러 가지도 않을 겁니다.”

“지금 내 말에 불복하는 건가?”

“제 상관이신 제국 기사단장님의 명을 따르는 겁니다.”

이델체 백작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뭘 잘 모르나 본데……”

“제가 하는 말 정도는 잘 알고 있습니다.”

“내가 비록 수도에서 급파한 백작이긴 하지만, 나는 자네들의 반대편이 아니네.”

논지를 이탈한 말에 미쉘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

“나는 흐름을 잘 읽는 사람이네.

칼라브리아 백작은 조금만 힘을 실어 주면 세계의 정점에 설 거야.”

“단장님께는 굳이 더 힘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그분께는 나처럼 속내를 눈치 빠르게 읽어 줄 사람이 필요해.”

“제 생각에는 그건 단장님께서 직접 결정하실 문제 같습니다.”

계속 반박 당하자 이델체 백작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호통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일촉즉발의 상황은 곧 깨졌다.

“부관님!”

부하가 열린 문을 통해 미셀을 불렀다.

“도시 성벽에서 전령이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뭐지?”

“현재 하크메르시아의 숲 방향에서 교전이 일어난 것 같다고 합니다.”

미쉘은 곧장 지휘실을 떠나 망루를 향해 달렸다.

이델체 백작이 뒤에서 투덜거렸으나 궁금한 건 마찬가지인 듯 곧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느 방향인가!”

“저쪽입니다!”

거리가 제법 먼데도 작게 굉음과 강력한 검의 기운이 느껴졌다.

미쉘은 즉시 지참하고 다니는 연금술사의 특수경을 꺼냈다.

멀리서 벌어지는 일을 확인할 수 있는 렌즈가 장착되어 있어 대단히 비싼 물건이었으나 플로이드 공작가의 후원을 받은 제국 기사단에서는 드물지 않았다.

곧 교전 지점 부근이 바로 앞인 것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러나 움직임이 너무나 빨라 눈으로 포착하기조차 쉽지 않았다.

“세상에.”

간신히 초점을 맞추고 난 후.

미쉘의 입에서 황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게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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