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어딜 봐도 지평선뿐인 초원 한복판.
말을 탄 기사들이 행렬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팰리시티에서 출정한 지 2주째.
최소한의 휴식만을 취하며 달린 끝에 마침내 산자락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제국 중앙과 남부를 가르는 경계 선, 몰카나 산맥이었다.
대열의 선두를 달리고 있던 리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중앙의 푹 꺼진 것처럼 야트막한 산을 바라보았다.
그곳이 바로 하크메르시아가 살고 있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단장님.”
생각에 잠겨 있던 리안은 부하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이델체 백작님께서 면담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리안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이델체 백작은 연락책이자 감시 역으로 붙여 보낸 궁정 귀족이었다.
혼자 마차를 타고 있었으나 문관답게 체력도 약하고 원거리 이동에 익숙하지 않아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역을 하소연하며 일행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뭐라고 전하시겠습니까?”
대부분 무시로 일관했으나 이번에는 리안이 달리는 말의 속도를 좀 줄였다.
그가 탄 백마가 천천히 행렬을 이탈해서 한참 뒤에 있는 마차 부근으로 근접했다.
충분히 가까워지자 리안은 능숙하게 채찍을 휘둘러 가볍게 창문을 두들겼다.
곧 커텐이 열리고 창백한 안색의 남자가 얼굴을 드러냈다.
“이제 남부에 도착했다는 게 정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힘없는 백작의 물음에 리안이 간결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이델체 백작은 창문에 매달리다시피 찰싹 붙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슬슬 쉬엄쉬엄 달리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대로라면 하크메르시아를 만나기도 전에 기사단이 쓰러져 버릴 겁니다.”
“이 정도의 행군에 지칠 정도로 제국 기사단은 약하지 않습니다.”
리안의 가차 없는 대답에 이델체 백작은 하크메르시아와 키스하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변했다.
“그럼 조금이라도 쉬어 갈 수는 없습니까?”
“아직 해가 중천이니 굳이 휴식이 필요치는 않겠지요.”
흐늘흐늘 무너지려는 이델체 백작에게 리안이 천금과도 같은 말을 덧붙였다.
“대신 날이 저물기 전에 도시에 도착할 겁니다.”
이 대답했다.
“저곳의 책임자는 누구지?”
“현재 오타주르 유니스라는 사작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이 부근은 모두 유니스 백작령이었으므로 그 가문의 방계가 통치하고 있었다.
“진로를 도시로 잡을까요?”
일반적인 원정 토벌은 도시에 들어가 체력을 회복한 뒤 전략을 짜고 다시 이동하는 게 보통이었다.
“자네는 이델체 백작과 도시로 들어가 오타주르 유니스 사작에게 이 편지를 전하게.”
리안은 품에서 편지를 꺼내 건네며 말했다.
“그 안의 지시를 따르라고 해. 제국 기사단장 리안 플로이드 칼라브리아의 명이라고.”
“네. 알겠습니다.”
대답한 뒤 미쉘 부관이 곧 물었다.
“단장님께서는 같이 안 가십니까?”
“중앙 기사단과 제2기사단은 나와 함께 이동해서 산 아래를 포위하듯 진을 치며 야영한다.”
도시 코앞에서 바로 산맥으로 직행이라니.
상당한 강행군인 셈이었다.
“토벌 전에 보급은 없습니까?”
“필요하지 않을 거야.”
리안은 딱 잘라 말했다.
“산에 들어가는 건 나 혼자일 테니까.”
미쉘은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언제나 발랄한 웃음소리가 정원을 메우던 황녀궁 로사그란데는 화창한 날씨에도 황량했다.
궁전의 주인이 계속 우울한 채로 두문불출하는 탓이었다.
드나드는 방문객이나 고용인들은 그녀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함께 우울함에 물들었다.
로사그란데의 시녀장의 발걸음은 특히나 무거웠다.
그녀는 역시 표정에 그늘을 드리운 채 우아한 조각이 새겨진 마호가니 목재의 문을 무겁게 노크했다.
“공작 부인이 제게 초대장을 보냈다고요?”
최근 잘 먹지 못해 초췌한 와중에도 황녀가 눈을 빛냈다.
그 모습에 시녀장은 더욱 몸 둘바를 모르며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네. 그렇긴 하오나..….”
그녀는 차마 한 번에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간신히 말을 내어놓았다.
“아무래도 떠도는 소문이 사실인 듯합니다.”
황녀의 얼굴에 오랜만에 떠오른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팰리시티의 복판에서 하루가 다르게 진화 중인 샨카른 호텔은 팰리시티의 새로운 화젯거리였다.
고전적인 건물의 미를 유지하는 대신 최신 감각으로 보수된 지붕과 테라스.
그리고 구획을 나눠 정리 중인 우아한 정원과 울타리까지 광대한 저택이 하나하나 세련된 감각으로 마법처럼 변해 가고 있었다.
탁 트인 울타리 너머 보이는 광경에 모든 사람이 감탄했다.
자연히 관심은 저택의 공개와 함께 이루어질 연회로도 옮겨갔다.
“그럼 그 여자가 정말로…….”
“상점가의 주인을 찾아가 물어보니 사실이라 확인해 주었습니다.”
현재 팜블리코 에비뉴를 싹쓸이 중인 공작 부인의 연회.
그것을 주관하는 이가 행방을 감춘엘레노어 마리체라는 소문이 정말이란 뜻이었다.
황녀는 충격을 받아 멍해진 표정을 지었다.
혼이 나간 듯한 얼굴과 달리 책상 아래의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도록 꼭 쥐여져 있었다.
“괜찮으세요, 황녀 전하?”
황녀가 한참 말이 없자 시녀장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네. 그냥… 무슨 선물을 가져가는 게 좋을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황녀의 입에서 갈라지고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시녀장이 마음 아픈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만류했다.
“선물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전하의 천사 같은 마음은 알지만, 아무리 공작 부인이라도 이런 무례한 초대를 하실 수는 없어요.”
“아뇨. 공작 부인께 연회를 권한 건 저니까요. 반드시 참석해야 해요.”
황녀는 힘없이 웃으며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계속 수도를 떠나 계셨으니 누굴초대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우실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도와드려야겠어요.”
곧 그녀는 내리뜨고 있던 시선을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전 생각할 게 있으니 혼자 있게 해 주세요.”
“이럴 때 혼자 계시면 좋지 않아요. 제가 곁에 있어 드릴게요, 황녀전하.”
“아뇨. 괜찮아요.”
황녀의 사양에도 시녀장은 계속 간곡히 권하며 나가지 않았다.
말이 길어지자 황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나왔다.
“됐으니까 시간이 있으면 나가서 비앙카스타나 찾아내요.”
신경질적인 황녀의 말에 시녀장은 충격을 받은 듯 딱딱하게 굳었다.
황녀가 긴 숨을 내쉰 뒤 작게 덧붙였다.
“미안해요. 마음이 너무 불안해서 그만.”
“그러시는 게 당연하죠. 진정하시도록 티를 준비할까요?”
시녀장의 말에 황녀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보다는 나를 좀 도와줘요.”
“네. 말씀만 하세요.”
“생각난 선물이 있어요. 직접 준비해서 포장하고 싶으니 이 정도 크기의 금속 상자를 준비해 줘요.”
황녀가 손바닥을 벌려 크기를 표현하자 시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황녀 전하.”
시녀장이 방을 떠났다.
혼자 남게 되자 축 처져 있던 황녀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진드기 같으니. 나가라는데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가뜩이나 짜증이 나는데 더 부추기는 꼴이었다.
황녀는 거칠게 의자에서 일어나 쿵쿵 소리를 내며 벽 쪽으로 걸었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책들이 꽂힌 거대한 책장이 있었으나 그녀의 목적은 독서가 아니었다.
“다비투스.”
낮게 시동어를 내자 전형적인 소설처럼 묵직한 책장이 흔들리더니 곧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책장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겼고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가에 위기가 닥쳤을 때를 대비해 모든 황족의 방은 지하 통로로 이어지게 되어 있었다.
이것은 황녀의 방에 있는 여러 개의 입구 중 하나였다.
황녀는 안으로 들어가 바로 계단을 내려가는 대신 오른쪽의 벽장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목에 건 독특한 장식의 펜던트를 장의 구멍에 맞췄다.
끼이익—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벽장이 열렸다.
안에는 몇 가지 잡다한 물건들이 들어 있었다.
황녀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후드와 작은 가죽 가방을 꺼낸 뒤 벽장을 닫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걸친 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꺼지지 않는 연금술사의 불빛을 따라 빙글빙글 내려가니 곧 기다란 회랑이 나타났다.
황녀는 구불구불한 통로를 익숙하게 나아갔다.
“황녀 전하.”
중간 중간 막혀 있는 철창을 지날때마다 지키고 있는 경비병들이 인사를 건넸다.
드넓은 황궁 구석구석까지 이어진 지하 통로는 관리에도 인력이 많이 필요해서 안에서 근무하는 이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그래서 존재 자체는 제법 알려져 있었지만, 각 구획이 철저하게 통제되는 덕에 모든 곳의 구조를 아는 이는 무척 드물었다.
한참 걸어온 끝에 황녀는 시커먼철문 앞에 도달했다.
병사가 지키고 있던 철창들과 달리 그 문 앞에는 제대로 된 갑옷을 입은 두 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을 열어요.”
황녀가 명령하자 기사는 고개를 조아린 뒤 문을 열고 물러섰다.
안에는 복도보다 다소 밝은 회랑이 있었다.
이 안은 통제 구역.
황족 이외에는 출입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또 왔군.”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음산한 목소리가 울렸다.
황녀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
“요 근래 자주 보는데.”
어두운 구석에서 회색 눈동자가 이 있었다.
황녀는 그녀를 발견한 뒤 봉인된 감옥에서 끌어내 이 통제 구역 안으로 데려왔다.
“이렇게 자주 드나들 때는 분명 고약한 속셈이 있을 테지.”
베아트릭스는 쭈글쭈글한 입술을 움직여 웃었다.
주술의 부작용으로 흉하게 일그러진 몰골이 섬뜩하기 짝이 없었으나 황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입 다물어.”
“잘 지냈어요?”
말을 걸자 우리 안의 남자가 움찔했다.
부쩍 초췌해진 얼굴과 겁에 질린 녹색 눈.
그는 바로 행방불명된 에이드리언유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