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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43화 (43/120)

제43화

‘분명 봤었어.’

금방 사라졌지만, 그때 느꼈던 위화감은 또렷하게 기억에 새겨져 있었다.

‘설마.….’

냉정하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엘레노어는 그런 기색을 스카이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설령 그런 서약을 했다고 해도…

역 주술을 걸어 해제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아주 강력한 힘이라면 해제할 수 있겠지만, 서약이 강력할수록 필요한 힘은 극복할 수 없이 커져. 종속의 서약은 사람의 역주술로는 절대 해제할 수 없어.”

스카이가 딱 잘라 말했다.

“직접 조사해 봐도 좋아. 나는 금방 알아낼 수 있는 거짓말은 하지 않아.”

자신의 말을 증명하려는 듯 스카이는 술술 정보를 털어놓았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각인이 새겨진 신체 부위를 제거하면 해제되기도 한다고 해. 그래서 종속의 각인은 제거하기 몹시 어려운 부위에 새기지.”

스카이의 시선이 엘레노어의 얼굴을 떠나 아래로 향했다.

이윽고 그의 긴 손가락 끝이 엘레노어의 목덜미를 훑으며 내려갔다.

“사지가 아닌 몸통 가까운 곳이지.

목이나 심장 부근, 혹은 복부.”

설명하는 중인데 손가락의 움직임이 묘했다.

“아니면 더 은밀한 곳일 수도 있지.”

마지막 말을 하는 스카이의 표정은 장난치는 소년 같으면서도 무척 관능적이었다.

엘레노어는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손을 밀어내고 말했다.

“각인이 사라지기만 하면 된다면, 피부를 벗겨 내어 없앨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해제할 수 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어. 설혹 그렇게 했어도 자유로워질 수도 없고.”

스카이는 잠시 말을 멈추고 목을 가다듬은 후 의미심장한 목소리를 냈다.

“모든 주술의 시전자는 주술이 해제되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알 수 있어. 그리고 복종의 서약은 주술이 풀리면 24시간 이내에 서약자에게 마지막 명령을 내릴 수 있지.”

“마지막 명령….?”

“그래. 선택할 수 있는 명령은 죽음, 딱 하나뿐이야.”

듣기 좋은 음성이 섬뜩하게 울렸다.

“그럼, 그럼 서약을 해제한 뒤 24시간 동안 자살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면 되잖아요.”

엘레노어가 짜낸 말에 스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소용없어. 이건 서약자의 생명에 명령하는 거니까. 심장이 멈스카이의 말이 몇 번이고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뭔가 주술을

걸었더라

“만약….”

엘레노어는 혼이 나간 것처럼 힘없이 중얼거렸다.

“꼭 그런 서약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그럴 거라 믿기보다는 그러기를 바라는 마음에 가까웠다.

그녀의 말에 스카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 끼자 줄어든 것처럼 꼭 맞았다.

“마킹 스톤이란 게 뭐죠?”

“스트링 스톤과 비슷하지만, 효능이 약간 달라. 이걸 끼고 서약자와 살이 맞닿으면 그에게 새겨진 각인 이 보이게 되지.”

마치 이야기가 이렇게 흐를 것을 알고 준비해 온 것 같았다.

아니, 이 남자라면 반드시 그렇게 만들 생각으로 왔을 것이다.

“리안이 돌아오면 확인해 봐. 어딘제45화영민한 궁정백이 아무 생각도 없이 반대만 늘어놓을 리는 없었다.

“공작 부인께서도 칼라브리아 백작이 서약한 것을 아십니까?”

“글쎄. 그건 나와 칼라브리아 공작간의 거래였네.”

공작이 서약 후에 플로이도 공작부인에게 말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체펠린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폐하께서 공작 부인에게 서약에 대해 알리십시오.”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종속의 서약이 활성화되면 아들이 꼭두각시가 된다는 걸 알게 되면 공작 부인도 생각이 바뀔 겁니다. 아들의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실 테니까요.”

황제가 눈썹을 올리며 입을 모았다.

“모성애를 이용해 공작 부인이 내 뜻을 따르도록 하자는 건가?”

“네. 그 여인을 넘기고 칼라브리아백작이 황녀와 결혼하도록 설득하면 평생 서약을 활성화하지 않겠다고 약조하면 협조할 것입니다.”

얼핏 이치에는 맞는다.

그러나 여태까지 계속 사람들이 이치에 맞는 행동으로 그의 예상을 벗어났기에 황제는 또다시 돌아가는 길이 탐탁지 않았다.

“이것이 마지막 협상이야.”

황제는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통하지 않는다면 무력을 통해 제압하겠다. 저항하면 서약을 활성화시키겠어.”

더는 신하에게 휘둘릴 인내심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래도 거부한다면 어차피 타협의 여지는 없었다.

“황실 근위대를 수도로 집결시키게.”

최후의 통첩을 들은 체펠린은 고개를 깊이 숙였다.

엘레노어는 가슴께까지 오는 대리석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지간한 저택 하나를 통째로 터놓은 듯한 거대한 홀.

천장도 끝도 없이 높고 수백 명이 한 번에 춤을 출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이 광활한 장소는 제국 최고의 연회장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장소가 커다랗다는 말은 채워야 할 공간도 엄청나게 많다는 뜻이었다.

여길 재단장하고 연회까지 준비하는 데 겨우 2주라니.’

일반적으로는 아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아주 강력한 무기가 있었다.

‘비용은 아무 상관이 없을 테니까.’

쓸 수 있는 자원과 해야만 하는 일들이 순식간에 그녀의 머릿속을 지나갔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던 엘레노어는 아래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직도 그렇게 서 있는 겁니까?”

입구로 들어서는 것은 블레인이었다.

아까 그가 나갈 때도 여기 있었으니 반나절은 꼬박 이대로 있었던 셈이다.

엘레노어는 머쓱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일찍 들어오셨네요.”

“도무지 일에 집중이 되어야지요.”

블레인은 널찍한 홀을 지나 엘레노어를 향해 걸어오며 투덜댔다.

“난 근래 당신에게 오늘 아무 일도 없었냐고 묻는 게 제일 두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잠깐 눈을 뗄 때마다 일을 벌이는 겁니까?”

“방 안에 갇혀 있는 거보다 뭐라도 하는 게 낫지 않나요?”

“뭐라도 하려면 수를 놓던가 독서를 하십시오! 연회 준비는 대체 뭡니까?”

“하면 좀 어때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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