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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42화 (42/120)

제42화

스카이의 눈빛은 놀랍게도 진지했다.

잠시 아무 말 못 하던 엘레노어는 턱을 올린 손가락을 밀어내며 뒤로 물러섰다.

“내게 한 제안을 백작님이 알면 좋아하지 않을 텐데요.”

“싫어해도 무슨 수가 있지? 그는 이미 도성에서 한참 떨어져 있을 텐데.”

“지금 당신이 어디 있는지 자각하고 있는 건가요? 여긴 백작님의 저택이에요.”

“당신이 이 저택에서 나가지 못하는 건 플로이드 공작 부인 때문일텐데. 리안의 기사들은 자발적으로 나가는 당신을 막지 않을 거야.”

리안의 성품을 볼 때 호위를 통해 그녀의 운신을 제약할 리가 없었다.

그래도 이건 아직 나도 확인해 본적 없는데.

이 남자는 대체 어디까지 꿰뚫어보고 있는 걸까.

선뜩한 기분을 느끼며 엘레노어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잠자리를 덥히려고 국경 너머까지 여자를 데려가는 건가요?”

“나는 당신을 일회성 상대로 삼겠다고 한 적 없는데.”

“저는 후궁이 될 생각도 없어요.”

아무리 호의호식하더라도 궁궐에 갇혀 남편의 발걸음 소리만 기다리며 사는 것보다 사교계를 누비는 생활이 훨씬 좋았다.

엘레노어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스카이가 선뜻 제안을 수정했다.

“그렇다면 정비로 만들어 주지.”

충격적인 말에 순간 흠칫했으나 이 내 엘레노어는 딱 잘라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세상 어디에도 평민 출신의 남작부인이 대공비가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 건 그저 동화에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다.

리안의 다정함에도 여전히 회의적인 이유는 그 때문이었다.

스카이 역시 너무 막 던진 말이라 인정한 듯 방향성을 슬쩍 틀었다.

“좋아. 그럼 그대를 맞아들이고 다른 비를 절대 맞지 않는 것으로 어떤가?”

“대공 전하께서 그런 걸 용납하실 리가 없잖아요.”

“난 누구와 다르게 내가 행동하는데 다른 사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스카이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하긴 한량인 로베르 대공은 여태까지 수십 명의 후비를 두었으나 현재 정비 자리는 공석이었다.

전에 만났을 때도 적당히 후사만 이으면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였다.

페이드라 공작가는 페이드라 공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고, 또 느슨하고 다소 문란한 공국의 분위기 상 후비 소생 후계자라 해도 정통성논란이 일어날 염려는 없을 것이다.

“약속하지. 모든 건 내가 책임지겠어.”

스카이는 대답을 재촉하듯 기대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느슨한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양이 마치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바다색 눈동자를 가까운 곳에서 계속 바라보니 귓가에서부터 뭔가 뜨거운 감각이 얼굴로 퍼져 나갔다.

‘이거 설마 진심인가?’

엘레노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 이런 남자가 속내를 내비칠리 없지.

“전 남자의 그런 약속은 믿지 않아요.”

특히 당신이 하는 말이라면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려고 했을 때 스카이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그럼 내가 서약하면 믿겠나?”

서약?

눈을 피하고 있던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스카이를 휙 돌아보았다.

“정언의 서약’ 이란 게 있어.”

그녀가 관심을 보이자 스카이는 천천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합의한 사항을 결코 어기지 못하게 되는 주술이지. 내가 당신 외에 아무도 비로 맞지 않겠다고 서 약한다면 나는 평생 그 말을 지켜야만 해.”

“그런… 말도 안 되는..….”

놀라움에 입술이 벌어져 말이 잘나오지 않았다.

스카이가 커다란 손으로 어름거리는 엘레노어의 손목을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나른하고 귀족적인 겉모습과 다르게 곳곳에 못이 박힌 단단한 손바닥이 피부를 통해 느껴졌다.

“내가 당신의 손을 쥐고 양피지에 주술 문양을 그릴 거야. 당신은 내가 했던 말을 반복하고 그저 동의하기만 하면 돼. 그럼 내 피부에는 각인이 새겨질 거고 당신은 곧장 그걸 확인할 수 있지.”

스카이의 목소리는 이미 주술의 말을 읊는 것처럼 몽환적이었다.

“난 주술의 문외한인데요. 그게 무슨 수상한 서약인 줄 알고 동의하겠어요?”

“당신은 걱정할 게 없어. 서약은 상호적인 게 없으니까.”

엘레노어가 찾아낸 문제점을 스카이는 물 흐르듯 반박했다.

“시전자는 언제나 일방적인 혜택을 받고 서약자는 지켜야만 하거든. 서로 함께 맺고 싶으면 동시에 주체와 객체가 다른 두 개의 서약을 한 번에 맺는 수밖에 없어.”

그의 설명은 그녀가 도서관에서 알아본 짧은 지식에도 부합했다.

그의 말이 점점 진실임이 드러나자 엘레노어는 더욱 당황스러워졌다.

“대체 왜 그렇게까지 하려는 거예요?”

“당신이 마음에 든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심장을 뽑아 들고 나타날 정도로 순진한 분은 아니잖아요?

우린 그저 몇 번 봤을 뿐이라고요.”

비앙카스타를 보며 주술이 얼마나 무서운 것임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기에 더욱 스카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스카이의 말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냥 몇 번 만난 사이일 뿐인 건 칼라브리아 백작도 마찬가지일 텐데.”

“그건….”

스카이의 지적은 사실이었다.

그의 말대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역시 당신에게 심장을 약속하지 않았나? 그는 진심이고, 나는 아닐 이유라도?”

스카이는 입을 꾹 다문 엘레노어를 어르듯 말을 이어 나갔다.

“당신은 아름답고 총명하고 사랑스러워. 그래서 다소 무리한 서약을 해서라도 당신을 데려가고 싶을 뿐이야.”

“당신이 나를 원하는 건 칼라브리 아 백작님이 나를 원하기 때문일 거예요.”

“시작은 그랬지만, 나를 사로잡아 놓은 건 당신의 매력이야.”

스카이는 상당히 열심히 그녀를 설득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처음 만났을 때 탐색하던 시선 대신 묘한 열기가 떠올라 있었다.

정말로 저게 애정인 걸까.

최근 너무 많은 일을 겪은 엘레노어는 경계심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공작님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당신에겐 나를 앞으로 실망하게 할 만한 단점이 없다는 거 정도는 알지.”

고집스레 고개를 저었으나 무슨 말을 해도 스카이는 마치 준비한 것처럼 거침없이 받아쳤다.

“나는 그 꽉 막힌 왕자님과 다르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오랫동안 반려를 찾아 왔어. 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내 눈과 직감을 믿는 거야.”

말할수록 스카이에게 잡힌 손목이 뜨겁게 느껴졌다.

빼내려고 했으나 그는 엘레노어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피하지 말고 한번 대답해 봐.”

엘레노어는 마지못해 고개를 들었다.

스카이가 긴 속눈썹을 드리운 수려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진중하게 물었다.

“내가 그렇게 싫은가? 아니면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일말의 껄끄러움을 제외하면 스카이는 분명 매력적이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가졌고, 탄탄한 몸에 깊은 저음의 목소리.

나른하게 뜬 야릇한 눈매와 명석하기 짝이 없는 통찰력, 높은 지위와 화술까지 흠을 잡기가 더욱 힘들었다.

아무리 멋진 남자라도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지만, 그렇지조차 않았다.

보통 허락도 없이 닿아 오는 남자의 손길을 극도로 혐오했지만, 지금 이렇게 함께하는 데도 별로 불쾌하지 않은 것이 그 증거였다.

“나는 그럴 수 없어요…….”

엘레노어는 확신 없는 목소리로 거부했다.

그가 완전히 싫지 않은 자신이 어쩐지 나쁜 것 같이 느껴졌다.

“이런.”

그가 잘생긴 눈매를 찌푸리며 낮게 혀를 찼다.

“그간 태도가 변한 걸 보니 그새 칼라브리아 백작이 뭔가 달콤한 유혹을 던진 모양이군.”

감시가 있으니 리안이 저택에 온걸 알았겠지만, 어떻게 저렇게 지켜보고 있던 것처럼 하나하나 추측이 맞아 떨어지는지 모르겠다.

“그 남자 외모는 너무 반칙이니까 나도 조금 비겁한 방법을 써 볼까.”

비겁한 방법?

엘레노어는 움찔하며 경계심을 곤두세웠다.

“걱정할 거 없어. 그저 조금 험담을 하려는 것뿐이니까.”

스카이가 쿡쿡 웃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백작님 험담… 제대로 하려면 상당한 창의력이 필요하겠네요.”

“아니, 지어내려는 건 아닌데.”

짙은 눈썹을 살짝 올리며 스카이가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조금 뜸을 들였다.

이내 풍부한 억양의 목소리가 넓은 응접실에 울렸다.

“엘레노어. 리안은 황제를 절대 벗어날 수 없어.”

기껏 생각해 낸 게 그거라면 창의력 점수가 빵점인데.

“당신은 똑똑하니까 이해할 수 있을 거야. 지배자는 강대한 권력을 결코 아무 견제 없이 넘기진 않는다는 거.”

미련한 지배자가 아닌 이상 당연한 일이었다.

엘레노어에게 스카이가 질문을 던졌다.

“종속의 서약에 대해 알고 있나?”

처음 듣는 말이었으나 ‘서약’ 이란 단어에 긴장이 되었다.

“그건 서약자를 시전자에게 복속시키는 가장 강력한 서약이야.”

스카이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종속의 서약을 활성화하면 서약자는 절대 시전자를 거부할 수 없어.

죽으라면 죽고, 사람을 죽이라면 죽이게 돼. 말 그대로 서약자에게 종속되는 서약이지.”

엘레노어는 화려한 무늬의 융단을 내려 보고 있었지만, 그의 설명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고 전부 귀담아 듣고 있었다.

“제 생각에는…….”

엘레노어가 찬찬히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이미 백작님은 황제 폐하를 거스르고 있는 것 같은데요.”

리안은 자기 뜻을 관철하기 위해 토벌을 떠났다.

아니라는 명백한 증거로 충분해 보였으나 스카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투였다.

“이 서약이 유효하려면 종속을 활성화시켜야만 해. 황제 폐하께서는 아직 그렇게 하지 않고 있는 거야.”

“이번 일로 체면이 많이 깎였을 텐데 종속시키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서약자는 자신이 조종당하는 걸 알게 되고 시간이 지날수록 인형처럼 변해 가지. 차기 황제가 될 리안

“리안이 주술에 걸렸다는 게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나?”

그렇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하나의 장면이 엘레노어의 뇌리에 스쳤다.

‘붉은 선.’

목걸이를 걸어 주던 날.

그녀는 스트링 스톤을 낀 채 리안과 맨살이 닿았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붉은 선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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