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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41화 (41/120)

제41화

“네…..아마도 백작님은…무사히….”

황녀는 거의 공황에 빠져 있었다.

처음에 살려 달라고 매달렸던 것도 잊고 이제 리안이 무사히 돌아올 거란 말을 하고 있었다.

공작 부인은 끈질기게 물었다.

“그게 전하의 선택입니까?”

결국, 버티다 못한 황녀는 고개를 굳힌 채 보일 듯 말 듯 끄덕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녀를 안쓰럽게 바라보던 공작 부인의 눈빛이 사라졌다.

“당신의 사랑은 그런 것이군요.”

공작 부인은 황녀를 부축하고 있던 손을 놓았다.

“공작 부인. 그러지 마세요. 저를 귀여워해 주셨잖아요, 저를 도와서, 백작님의 마음을 돌려 주세요.”

“저는 분명히 황녀 전하를 귀애했습니다.”

그녀는 분위기가 바뀐 것에 당황해 매달리는 황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러나 제게는 제 아들이 더 소중 합니다.”

공작 부인의 보랏빛 눈동자는 그야말로 싸늘해서 북방의 설원이 팰리 시티로 옮겨 온 듯했다.

“이제 놔주십시오. 저는 제 아들의 출정식에 가야 합니다.”

황녀는 차마 공작 부인을 더 붙잡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두 사람은 황녀가 바닥으로 무너지는 모습을 보았다.

“시험에 실패했군.”

클로드가 낮게 중얼거리는 말에 미나즈는 속으로 동조했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그대로 돌아서 꼿꼿한 걸음걸이로 출정식을 향해 갔다.

어찌나 위압감이 느껴지는 지 두 사람이 숨어 있는 곳 앞을 지날 때 움찔할 정도였다.

“역시 저 부인은 절대 적으로 돌리기 싫어.”

미나즈가 팔에 돋은 소름을 긁으며 중얼거렸다.

“남작 부인이 어딨는지 몰라도 꽁꽁 잘 숨어 있는 거면 좋겠다.”

“글쎄요…….”

클로드가 공작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낮게 말을 받았다.

“어쩌면 이미 죽여서 묻어 버린 건지도 모릅니다.”

맞춘 듯 바람이 스산하게 불어와 공작 부인의 붉은 스커트 자락을 날렸다.

얼마 뒤 출정식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 소리가 울렸다.

두 사람은 기둥 뒤에서 나와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

같은 시각.

엘레노어는 두 공작의 우려와 달리 꼿꼿하게 살아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앞에는 당대 최고의 기사단을 지휘하는 남자가 호위로서 서 있기까지 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엘레노어 마리체라고 합니다.”

붙임성 있게 인사를 건네 보았지만, 반응은 희미한 고개 끄덕임이 전부였다.

“제가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왼쪽에 서 있던 붉은 머리의 험상궂은 남자는 대답조차 하지 않았다.

오른쪽의 겨자색 머리를 한 다소 젊은 남자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했다.

“일라이라고 부르시오.”

어지간히 내가 탐탁치 않은 모양이 네.

엘레노어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지만, 사실 이미 이러한 반응을 예상했다.

문장을 지니고는 있지만, 엘레노어의 신분은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보다 높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 잘은 몰라도 그들은 엘레노어가 주인을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간 원인이라 생각할 게 뻔했다.

‘그래도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 눈치나 보고 있을 순 없지.’

엘레노어는 마음을 굳게 다지고 미리 생각해 둔 말을 꺼냈다.

“이미 백작님께서 필요한 사항을 전부 말씀하셨을 테지만, 꼭 하나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모셨어요.”

처음 두 기사는 ‘감히 심부름을 시킬 셈인가’라는 반응을 보였으나 엘레노어의 말을 듣고 나자 표정이 바뀌었다.

험상궂은 얼굴 가득 이해할 수 없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나 다행히 그 명령은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반드시 완수하겠소.”

왼쪽 남자가 더 지위가 높은 듯했지만, 일라이가 대신 답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게 끝이에요. 그럼 이제 가셔도 좋아요.”

남자들은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마치 연기처럼 사라졌다.

신기하게 생각하던 엘레노어는 이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덧붙였다.

“목욕할 땐 바깥에서 호위해 주세요.”

“…알았소.”

어쩐지 아쉬운 기운이 서린 대답이 돌아왔다.

엘레노어는 어깨를 으쓱하고 천천히 일어서 창가로 향했다.

아침부터 계속 저 멀리 황궁에서 붉은 깃발을 내건 기사들이 열을 지어 나오고 있었다.

뭔지 모르지만, 분명 리안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부디 위험한 일이 아니어야 할 텐데.’

엘레노어는 치솟는 불길한 예감을 가라앉혔다.

‘걱정해도 소용없다면 마음을 졸이 기보단 할 수 있는 것을 하자.’

그렇게 마음을 굳혀도 기사들의 행렬이 사라질 때까지 엘레노어는 창가를 떠나지 못했다.

*

출정식이 끝나고 일주일이 흐지부지 흘러갔다.

엘레노어는 호텔에 갇힌 채 평정심을 유지하려 최선을 다했으나 점점 마음이 초조해졌다.

뭔가를 하고자 해도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블레인은 리안이 자리를 비운 사이 기사단의 일을 보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여러 가지로 심술을 부릴 줄 알았던 공작 부인은 방 안에 칩거한 채 두문불출해서 얼굴을 마주치기조차 힘들었다.

엘레노어는 비앙카스타를 돌보고 빈약한 호텔의 장서를 뒤적이며 소식을 기다렸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편지를 보내는 것까지 막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다행히 정체를 알아냈으나 문제는 그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점이었다.

현재 묵고 있던 호텔에서 이미 떠났고, 탄생제 이후로 목격되지 않아 수도에서는 행적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탄생제가 끝났으니 그냥 돌아간 것일 수도 있지만……’

유니스 가문에 편지를 보냈으나 드넓은 대륙 최남단에서 소식이 오려면 한참이 걸릴 것이다.

그동안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어 용병이나 길드에도 의뢰해 보았으나 별다른 소식이 없이 야금야금 돈만 잡아먹고 있을 뿐이었다.

답답해서 대놓고 현상금을 걸어 찾을까 싶었지만, 그의 안전을 위해 관두기로 했다.

만약 유니스가 그냥 귀향길에 오른 거라면 소란스럽게 찾다가는 적에게 공연한 빌미만 주게 될 테니까.

‘섣불리 움직이다가 상대를 자극하면 안 돼. 신중해야 해.’

엘레노어는 자꾸 성급해지려는 마음을 누르며 소식을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방문자가 호텔에 도착했다.

“페이드라 공작님이 오셨습니다.”

블레인이 엘레노어를 위해 불러온 캔터베리 가의 집사가 말했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엘레노어는 손에 쥐고 있던 먼지떨이를 내려놓고 황급히 응접실로 향했다.

*

샨카른 호텔, 아니 이제는 칼라브리아 백작 저가 된 건물의 3층에는 커다란 홀이 있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거대한 창을 통해 멋진 정원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고 바닥에는 외국의 장인이 한 땀 한 땀 무늬를 새겨 넣은 멋진 융단이 빈틈없이 깔려 있었다.

어지간한 이라면 들어서는 것만으로 주눅이 들 법한 멋진 방이었으나 오늘의 방문객은 마치 집주인이라도 되는 양 자연스러웠다.

스카이가 벨벳 안락의자에 앉아 긴 다리를 나른하게 꼰 채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네.”

여유만만한 태도가 놀랍게도 반갑게 느껴지는 걸 보면 그간 정말 사람이 고프긴 했던 모양이다.

“공작 부인의 시집살이가 꽤나 고된가 보지?”

스카이의 말에 엘레노어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먼지떨이는 내려놓고 왔지만, 스커카이가 말했다.

사실 거대한 테이블이 있고 묵직한 가구들 사이가 너무 넓어 단둘이 얘기하기엔 지나치게 거리감이 멀었다.

엘레노어는 어깨를 으쓱한 뒤 그가 앉아 있는 기다란 안락의자의 끝으로 가 앉았다.

스카이는 몸을 돌려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얼굴을 기댄 채 말을 걸었다.

“웬일로 나를 찾은 거지? 이제라도 내 절륜함을 체험할 기분이 들었나?”

엘레노어가 그의 농담에 웃자 스카이는 오히려 한쪽 눈썹을 올렸다.

“웃어 줄 줄은 몰랐는데.”

“당신에게 부탁이 있어서요.”

스카이가 미소를 지었다.

“여전히 계산적이군.”

“당신은 여전히 가벼우시고요.”

“음? 그런 말을 듣기엔 억울한데.

지금 신관이 울고 갈 정도로 얌전하게 지내는 중이라고.”

스카이의 농담 섞인 항변에 엘레노어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바쁘실 테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 가죠. 제가 당신을 찾은 이유는….”

“비앙카스타 바이스가 주술에 걸렸나?”

귀신같은 스카이의 말에 엘레노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고… 계셨어요?”

“당신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주술에 관련된 책을 찾고 있었고, 스트링 스톤을 샀고, 비앙카스타를 납치한 후에 나를 부른 걸 보면 뭐 어렵지 않은 추론이지.”

간단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게 쉽게 나오는 해답은 아니었을 것이다.

엘레노어는 그의 빈틈없는 영민함에 새삼 감탄하며 질문을 던졌다.

“주술을 해제할 방법이 있나요?”

“주술에 따라 모두 다른데.”

“제 생각엔 아마도 침묵의 서약인 것 같아요.”

스카이는 비앙카스타의 증상에 대해 몇 가지 묻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의 서약이 맞는 것 같군.”

“해제 방법을 아시나요?”

“그건 역 주술을 걸면 돼. 시전한 사람보다 더욱 강력한 주술사가 각인을 봉인하면 주술은 위력을 잃고 사라지게 되지.”

“더욱 강력한 주술사?”

“그래. 황녀의 주술은 황궁의 전속주술사가 걸었을 테니 더 강력한 주술사는 어지간하면 찾기 힘들 거야.”

딴청 부리듯 말하는 스카이에게 엘레노어가 콕 짚어 물었다.

“당신이 그걸 해제할 수 있나요?”

“그야 당연하지.”

누가 걸었는지도 모르는데 확신에 찬 걸 보면 자신의 주술력에 어지간히 자신만만한 모양이었다.

스카이는 싱글싱글 웃으며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떠오른 심술을 볼 때 먼저 주술을 풀어 주겠다는 관대한 제안을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부탁이니 바이스 후작 영애에게 걸린 주술을 해제해 줘요.”

“나도 당신 못지않게 계산적이란걸 알 텐데?”

스카이의 말에 엘레노어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예상대로 나오는군.

“내가 그렇게 해 주면 당신은 내게 뭘 해줄 거지?”

“당신도 이쪽이 궁금하니까 온 거잖아요? 서로 협력하며 정보를 교환하는 셈으로 치면 안 되나요?”

“질문이야 나도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게 있으니 받아 줄 수 있어. 하지만 나를 직접 움직이게 하는 건 비싸다고.”

그는 달변에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아는 남자였다.

말로 구워삶아 넘어가는 건 힘들 터였다. 엘레노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부탁이에요. 침실 상대가 필요하다면 나보다 훨씬 예쁘고 당신을 좋아할 여자들을 얼마든지 소개해 줄테니….”

“내가 여자가 궁해 보이나?”

되묻는 스카이의 미려한 외모에 말문이 막혔다.

물론 저런 외모를 가진 남자가 여자가 궁할 리가 없겠지.

“해 달라는 대로 해 줘도 임시방편일 뿐이야. 당신은 또 위기에 휘말리게 되겠지.”

“내 현실에 서술을 달아 달라고 부른 게 아닌데요.”

“이렇게 원치 않는 상황에 자꾸 휘말리는 게 지긋지긋하지 않나?”

“그걸 알면 좀 도와주지 그러세요?”

엘레노어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자 스카이가 쿡쿡 웃으며 조금 곁으로 다가왔다.

“당신이 말만 하면 모든 고민을 해결해 주지.”

매력적으로 그을린 피부의 아름다운 얼굴이 지척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은근하게 속삭였다.

“모든 고민을요? 어떻게?”

엘레노어는 시선을 조금 피하며 물었다. 그의 몸에서 나는 남자의 향기가 가깝게 느껴졌다.

“답은 해결 방법이면서 동시에 내가 받을 대가이기도 해.”

스카이가 엘레노어의 턱을 들어 올려 자신을 향하게 했다.

그리고 붉은 입꼬리를 올리며 유혹하듯 말했다.

“나와 함께 페이드라로 가자, 엘레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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