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40화 (40/120)

제40화

묶게 해 달라고?

엘레노어가 당황해서 눈을 깜빡이자 리안이 쿡쿡 웃었다.

“이번엔 내가 당신을 묶어 둘 겁니다.”

그렇게 말하고 리안은 품속을 뒤적였다.

밧줄이라도 꺼내려는 건가 해서 보고 있었지만, 잠시 뒤 그의 손에 들린 것은 자그마한 상자였다.

까만 비로드로 장식된 고급스러운 금장 상자.

그것을 열자 강렬한 빛이 반사되어 엘레노어는 순간 눈을 움찔했다.

붉은 비단 위에 놓인 것은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목걸이였다.

“그건….”

리안은 엘레노어의 어깨를 감싸 거울 앞으로 이끌어 갔다.

그리고 머리 하나 작은 엘레노어를 앞에 세운 뒤 함께 거울을 바라보았다.

리안은 흰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꺼내 엘레노어의 목 앞으로 들어 올렸다.

“이런… 건 대체 언제 준비하셨어요?”

“저택을 사러 경매장에 간 첫날에 발견하고 구매했습니다.”

찬연하게 빛나는 순금과 가운데 박힌 커다란 푸른 다이아몬드.

그리고 그 주변을 장식한 수많은다이아몬드는 엘레노어의 높은 안목으로 볼 때 엄청난 보물임이 분명했다.

도저히 어딘가에 간 김에 보고 살만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을 리안은 천천히 엘레노어의 새하얀 목에 걸어 주었다.

황홀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엘레노어는 리안의 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은 순간 흠칫했다.

“어?”

엘레노어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순간 리안의 등 뒤로 뭔가 붉은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뭐 문제 있습니까?”

돌아서서 리안을 살펴보았지만, 그런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뭐 때문인지 금방 생각나질 않았다.

“아뇨. 잠깐 뭘 잘못 봐서요.”

이 예쁜 장면을 깨고 싶지 않아 엘레노어는 금방 얼버무리고 다시 돌아섰다.

다행히 이미 목걸이의 체인을 채운 뒤였기 때문에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이제 내가 묶어 둔 거니까 절대 풀면 안 됩니다.”

리안은 거울을 통해 엘레노어를 바라보며 흐뭇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레노어도 다시 뿌듯하게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목걸이 자체가 두꺼운 데다가 황금, 푸른 다이아몬드, 형형색색의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합쳐져 찬란하게 내는 빛이 여러 가지 의미로 존재감이 넘쳤다.

“이건… 역사적인 물건인가요?”

“콜론타 왕국의 네 번째 왕이 오랫동안 사랑하던 여인을 왕비로 맞아 기쁜 마음에 온 국가의 장인을 동원해 만들었다는 목걸이입니다.”

대단한 가치가 있겠지만, 그만큼 오래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런 걸 받고 대체 뭐라고 감사해야만 좋을까.

그간 수많은 선물을 받았어도 이렇게 기쁜 건 처음이었다.

엘레노어는 감격한 마음으로 생각하다가 문득 리안을 놀려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속으로 좀 웃은 뒤 일부러 표정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요즘 유행에는 맞지 않네요.”

사교계의 유행을 주도하는 패션 리더 엘레노어의 말에 웃고 있던 리안의 표정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아, 그, 그렇습니까? 나는 그런걸 잘 몰라서……….”

“이렇게 커다란 목걸이는 내가 가진 어떤 드레스와도 어울리지 않을 거예요.”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하고자 한다면 이 목걸이에 딱 맞는 드레스를 맞추지 못할 것도 없었다.

“아, 나는… 당신이 좋아할 거라 생각하고.….”

쩔쩔매는 리안의 모습은 평소답지 않게 귀여웠다.

누가 이 놀리는 맛이 있는 남자를 무표정의 얼음 같은 스텔라리아라고 생각할까.

엘레노어는 웃으며 장난이라고 하고 싶은 걸 참고 딱딱하게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묶인 거니까 할 수 없지요. 계속 이대로 차고 있어야겠네요.”

엘레노어는 새침하게 말하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목걸이를 손가락 끝으로 잡아당기며 난처함이 가득한 리안을 올려 보았다.

“돌아오면 백작님 손으로 직접 풀러 와 주세요.”

애교 섞인 말에 리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 후로 한동안 그는 미동도 없이 그 모습 그대로 굳어 있었다.

반응이 없어 엘레노어는 슬슬 불안해졌다.

‘정말 마음에 안 들어서 투정 부린 거라고 생각하면 어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제멋대로로 굴 생각도 없었다.

엘레노어가 뭔가 변명을 해야 하나 싶어졌을 때쯤 리안이 작게 입을 열었다.

“어쩐지….”

거기서 말을 끌며 리안은 헛기침을 한 번 했다.

그리고는 엘레노어의 귓가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나직하게 속삭였다.

“흥분해 버렸습니다.”

목걸이를 풀어 달라는 말에 대체 왜 흥분하는 거야.

불안이 풀림과 동시에 부끄러워졌다.

엘레노어는 새빨개진 채 리안의 팔을 때리고 뒤로 물러섰다.

“이상한 말 하지 마시고 빨리 가셔서 수도를 떠날 준비나 철저히 하세요!”

리안은 무척 아쉬운 듯했으나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보러 올 짬도 간신히 냈을 게 분명했다.

“내가 돌아오면 그때는 대답을 준다고 약속해요.”

나가기 전 리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무척 좋으면서도 견디기 어려운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엘레노어는 시선을 피하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간신히 답했다.

“…알았으니 꼭 살아서 돌아오기나 하세요.”

“당신을 두고 죽진 않을 겁니다.”

시야에 걸린 리안의 붉은 입술이 웃고 있었다.

그는 말을 맺고도 선뜻 나가지 못하고 몇 번이고 머뭇거리다가 엘레노어를 끌어당겼다.

“이러면 안 되는 건 알지만.”

리안은 몸을 숙여 엘레노어의 이마에 길게 입을 맞췄다.

따뜻한 감촉에 그간 잊고 있던 몸속의 불길이 되살아났다.

한참을 입 맞추고도 리안은 부족한 듯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키스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만지작거리다가 아쉬운 듯 손을 떼어 내며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합니다.”

목소리가 남긴 열기는 그가 떠나고도 한참이나 엘레노어의 귓가에 남아 있었다.

거대한 황궁 안 연병장에 기사들이사열해 있었다.

검은 제복과 황금빛 휘장. 은빛 검을 몸 앞으로 치켜든 채 엄숙한 표정으로 늘어선 기사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으나 분위기는 무거웠다.

출정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빈실에서 나와 걷던 미나즈와 클로드는 잠시 멈춰선 채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곧 미나즈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고 감상을 내어놓았다.

“하아. 사지로 가는 날에도 리안은 잘생겼구나.”

곁에서 비장한 표정을 짓고 있던 클로드가 미간을 찌푸리며 타박했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칼라브리아백작을 보고 헤벌레하는 겁니까?”

“그럼 너처럼 수상하게 긴 샤워를 할 때만 떠올리란 말이야?”

미나즈의 은근한 농담에 클로드가 얼굴을 붉히며 기겁했다.

“부탁이니 제국의 공작다운 언행을 좀 해 주십시오!”

“나는 건강하고 솔직할 뿐이야. 너야말로 제국의 공작답게 칼라브리아백작 바라기는 그만두고 여자에게도 좀 시선을 돌리지 그래?”

“누가 여자에게 관심이 없다고 했습니까?”

“그럼 있어?”

미나즈의 말에 클로드는 뭔가 말하려다 인상을 팍 구겼다.

“됐습니다. 내가 말을 말죠.”

그러고 먼저 걷기 시작한 클로드를 보고 미나즈는 입술을 비죽였다.

“야, 토라지지 말고 같이……….”

따라가다 클로드가 갑자기 멈춰 서는 바람에 그의 등에 얼굴을 부딪쳤다.

그와 동시에 강한 힘에 의해 그녀는 기둥 뒤로 끌려갔다.

“뭐 하는 거……….”

“쉿.”

클로드는 검지를 세워 미나즈를 조용히 시킨 뒤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귀빈실에서 나오는 플로이드 공작부인과 그녀에게 다가가는 황녀의 모습을 보고 미나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공작 부인!”

공작 부인이 천천히 황녀를 돌아보았다.

황녀는 그녀의 치맛자락을 잡고 매달리며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제발 멈춰 주세요! 백작님을 사지로 보내서는 안 돼요!”

리안의 출정 때문에 황녀는 밤새울었는지 새하얀 얼굴이 엉망이었다.

늘 단정하던 옷차림도 흐트러지고 머리카락 역시 잔뜩 헝클어져 보기만 해도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공작 부인은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황녀를 부축해 일으키며 말했다.

“황제 폐하의 결정을 제가 무슨 수로 막겠습니다.”

“지금이라도 백작님께서 마음을 돌리면 전부 취소할 수 있어요. 제가 폐하께 간청드릴게요. 부디 공작 부인께서 백작님을 설득해 주세요.”

리안이 무슨 선택을 해서 출정을 가게 된 건지 황녀는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상황이 되어도 리안을 놓지 못하는 걸까.

한결같은 마음이 가상하면서도 어딘가 섬뜩한 구석이 있었다.

공작 부인은 자신에게 매달린 황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황녀 전하께서 더 간단히 폐하를 말릴 수 있을 텐데요.”

“제가 몇 번이나 사정해 보았지만, 폐하께서는 이러는 수밖에 없다고 하셨어요.”

“아뇨. 이 말 한마디면 폐하께서도 사정을 보아주실 겁니다.”

황녀가 눈을 깜빡이며 공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공작 부인은 그녀의 뺨을 적신 눈물을 손가락을 닦아 주며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 가서 리안과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세요.”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주변을 뒤흔드는 울림이 있었다.

클로드와 미나즈는 동시에 입을 틀어막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놀란 소리가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황녀도 충격을 받은 듯 멍해졌다가 이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 그게 무슨, 무슨 말씀이세요.”

“말 그대로입니다. 황녀께서 더는 리안과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하면 황제 폐하께서는 이 이해하기 어려운 칙명을 거두실 겁니다.”

공작 부인의 요구는 지나치게 파격적이어서 두 사람은 귀를 의심했다.

“리안의 부정은 사실입니다. 배신 당하셨으니 새로운 약혼자를 찾아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아니, 백작님이 제 짝이에요. 그런 부정 따위 세월이 지나면 그냥 화려한 방황이 될 거예요.”

황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마치 세뇌를 당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제가 백작님과 맺어지지 않으면 제국과 황권에 커다란 위협이…….”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리안은 황녀 전하께 충실한 신하가 될 테니까.”

리안이 정의롭지 않은 이유로 반란을 일으키는 건 상상할 수 없긴 했다.

지금 리안의 반항도 황제가 제국의 기본 원칙인 귀족의 자유를 침해했기 때문에 명분이 있었다.

공작 부인의 충격적인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폐하께서 못 미덥다 하시면 리안은 가진 공작위를 하나 기꺼이 반환할 겁니다.”

클로드와 미나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공작은 누구나 그 무엇보다도 작위와 긍지를 소중히 여겼다.

작위를 반납한다는 건 인생과 가문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그런 건 유서 깊은 공작가의 가주께서 절대 용납하실 수 없는 일이잖아요.”

“작위가 리안에게 이어지면 이미 내 손을 떠난 겁니다. 그 애의 선택이지요.”

공작 부인은 교묘하게 점점 황녀를 정신적 궁지로 몰아갔다.

“황녀께서 지금 말리지 않으면 리안은 죽을지도 몰라요. 그 애를 포기하고 살게 해 주세요.”

“마, 말도 안 돼요. 그런 건… 그런 건….”

능변인 황녀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저는 절대 백작님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 없어요. 공작 부인께서도 아시잖아요.”

“그럼 계속 입장을 고수할 건가요?

리안이 사지로 가게 돼도?”

질문하는 공작 부인의 눈동자는 매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