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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39화 (39/120)

제39화

오랜만에 본 그는 여전히 눈부시게 수려했다.

다소 긴 듯한 플래티넘 블론드를 귀 뒤로 넘기고 빈틈없이 제복을 차려입은 그는 피로해 보였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이었다.

기억이란 게 늘 그렇듯 조금쯤 미화된 줄 알았는데 오히려 실제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생생하게 살아 있는 리안은 기억따위보다 아름다웠다.

“조금 얘기라도 나누고 싶어 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온 리안이 부드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쩐지 긴장이 돼서 똑바로 쳐다보기 어려웠다.

엘레노어는 책상에서 일어서 그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많이….”

계속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리안의 시선이 뺨에 아플 정도로 느껴졌다.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가감 없는 담백한 말에 마음이 요동을 쳤다.

‘감상에 빠질 시기가 아닌데.’

엘레노어는 감정을 다잡으려 애썼다.

이미 관계는 끝났고 그녀에게는 지금 당장 리안에게 의논해야만 할 일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간 벌인 일들이나 스카이에 관련된 일까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게다가 자신의 위기를 호소하기 전에 그의 상황도 알아 두고 싶었다.

위험한 일을 하러 간다고 들은 게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아, 그렇지.”

엘레노어가 할 말을 정리하는 사이 리안이 뭔가 화제를 떠올려 낸 모양이었다.

“마리체 남작은 매독으로 사망했습니다.”

뭐?

그의 입에서 나온 화제가 너무나도 난데없어 엘레노어는 잠시 멍해졌다.

귀를 의심하며 당황스러워하고 있는데 리안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죄수를 담당하는 의사가 직접 내린 진단입니다. 그에 따르면 매독은 전염성이 강하고 무척 위험한 질병이라더군요. 수년간 문란한 생활을

“네 남편 매독 걸려 죽었데.”라는 말은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서도 호감을 사는 대사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가차 없는 평가에 리안은 잠시 쩔쩔매더니 이내 질문했다.

“당신이 그의 죽음 때문에 나를 원망하지 않나 해서 해명해 본 겁니다.”

“네? 어째서 백작님을?”

“내가 마리체 영지를 감사해서 그를 잡아들였으니까요.”

엘레노어의 표정이 환해졌다.

“원망이라니요. 정말 감사해요. 하마터면 그런 남자의 손아귀에서 매독으로 인생을 마감할 뻔했네요.”

솔직하게 감사하자 리안은 굉장히 기쁜 얼굴이 되었다.

그러다 엘레노어는 문득 다른 궁금증이 치솟았다.

“나는 그 남자의 부인인데요. 병명을 알았다면 나 역시 매독에 전염됐을지도 모르는데 왜 함께 밤을 보낸 거죠?”

설명했다.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을 꺼냈던 것이 미안해서 환경을 만들고 있는 겁니다. 이미 부모님께도 말씀드렸고, 폐하께도 황녀 전하와 약혼할 수 없다고 전했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 이어질수록 엘레노어의 입이 벌어졌다.

너무나 큰 충격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냥 체념하고 연락을 끊은 줄 알았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이제야 왜 하룻밤 상대일 뿐인 자신에게 공작 부인이 그런 반응을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독립하기 위해 이 저택도구입했는데 마음에 듭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규모의 대저택을 겨우 교제 신청하려고 샀단 말이야?

엘레노어는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와 팔을 내저으며 황망하게 말했다.

리안은 천천히 그가 엘레노어를 처음 봤던 밤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그날 밤인가….….’

그날 밤은 엘레노어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천신만고 끝에 이제 막 집필을 시작하고 불러 주는 곳이 없어 아무 저열한 초대라도 닥치는 대로 받아 들여야만 했던 시절.

매일 손가락질과 천대를 받아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지만, 그날따라 더욱 서러웠던 것은 그날 밤의 주인공이었던 후작의 딸이 자신과 동갑이었기 때문이다.

금지옥엽으로 어려움을 모르고 행복하게 생일을 축하받는 영애.

그리고 빙의하고 혈혈단신으로 살아가느라 생일이 언제인지조차 모르는 자신.

젊고 아름다운 그녀는 영애와 함께 파티의 중심이었지만, 영애에게 쏟아지는 찬사와 축하의 말들만큼 비아냥과 욕설, 저열한 권고들을 들어야만 했다.

그래서 비참함을 견디지 못하고 뛰쳐나갔던 최악의 밤이었다.

‘그때 백작님이 보고 있었다니.’

뭐라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었다.

리안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그 후로 나는 줄곧 망설여 왔습니다. 나의 접근이 당신을 힘들게 하지 않을까. 혹은 당신에게 경멸받는 게 아닐까. 다가가 봐야 어차피 내 마음에 당신이 응해 주지 않을 거라는 그런 불안함에 시달렸죠.”

평생 여자 때문에 고민해 본 적없을 것 같던 리안이 그런 생각을 했다니.

전혀 몰랐다.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렇게 가능성을 가늠하며 망설이다가 당신을 알아 갈 수 있었던 긴 시간을 놓쳐 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나를 찾아오고 함께 밤을 보내고 나서야 후회가 됐습니다.”

무엇을 후회했다는 걸까.

살짝 든 불안함은 이어진 말로 금세 풀렸다.

“왜 더 빨리 다가가지 않았을까.

지난 5년간 당신을 알았다면 더 행복했을 텐데.”

중얼거림 같은 말에 긴 어긋남에 대한 회한이 서려 있었다.

엘레노어는 그와 밤을 보낸 후로 자신의 실수로 인해 얼마나 많은 것이 변해 버렸는가에 대해 한탄한 적이 많았다.

하지만 운명은 이미 그녀가 움직이기 한참 전부터 자리를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걸 바로잡을 방법은 없어 보였다.

“이제라도 마음을 전했으니 최선을 다할 겁니다. 모든 걸 걸고 당신을 사랑하겠다고 말한 이상 그 말을 지킬 겁니다.”

당신은 나보다도 잃을 게 훨씬 더 많을 텐데, 어쩌면 이렇게 한 점 거리낌도 없는 눈빛으로 말할 수 있는 걸까.

“정말 원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해서 사랑할 겁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온 리안이 이젠 바로 앞에서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달콤한 고백이 그녀의 심장을 뒤흔들고 요동치게 만들었다.

어차피 되돌아갈 수 없다면.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건가.

엘레노어는 멍하니 눈앞의 리안을 올려 보았다.

그의 잘생긴 입술이 다시 움직여 소리를 만들어 냈다.

“엘레노어. 나는 한동안 수도를 떠나야만 합니다.”

고백에 노곤해졌던 신경이 다시 팽팽해졌다.

이게 바로 블레인이 말한 위험한일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라도 취소할 수는 없나요?”

“꼭 해결해야만 합니다.”

리안은 불안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엘레노어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그리고 옷깃에서 뭔가를 떼어 내 엘레노어에게 건넸다.

“이건 뭐지요?”

“이것은 나의 인장이 담긴 브로치입니다.”

정식 작위를 받은 모든 귀족에게는 인장이 존재했다.

그것은 각자 만드는 게 아니라 작위와 함께 황가로부터 하사받는 것이다.

공식적인 문서를 발행하거나 공적인 자리에 나설 때는 항상 인장을 소유해야만 했다.

그야말로 귀족의 권위를 나타내는 강력한 상징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있으면 내 개인 기사단인 비하인드 나이츠가 당신의 명을 들을 것입니다.”

엘레노어도 비하인드 나이츠의 명성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이 작은 인장 하나에 세계 최강의 기사단이 내 명령을 듣는다니.

얼떨떨하게 받아들자 리안이 안심시키듯 덧붙였다.

“그들이 모두 수도에 남아 나를 대신해 당신을 지킬 테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전부 남는다고?

“하시려는 일에 기사단이 필요 없나요?”

“그건 제국 기사단으로도 충분합니다.”

“부하에게 내가 없을 때를 대비해 몇 가지 명령을 해 두었습니다. 현명하고 노련한 남자이니 위급한 상황이 발생하면 그와 상담하고 조언을 따르는 것도 좋을 겁니다.”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지만, 오히려 엘레노어는 안타까운 기분이 들었다.

“제 걱정보다 백작님 걱정을 먼저해 주세요.”

“난 괜찮을 겁니다.”

“그렇게 말하지만, 저 말고 다른 사람들도 모두 당신을 우려하고 있다고요.”

엘레노어의 말에 리안은 미소를 지었다.

“얼핏 무모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자신 있습니다. 나 역시 모든 걸 잃어버릴 생각 따위는 없습니다. 당신을 지키려면 힘이 필요하니까요.”

리안의 결심은 굳어서 돌이킬 수 없어 보였다.

엘레노어는 걱정으로 침울해져 버렸다.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리안이 난색을 보이더니 이내 물었다.

“대신 뭐 하나 해 줄 수 있습니까?”

지금 마음 같아서는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말만 해 보라는 시선으로 리안을 바라보자 그의 눈동자에 조금 심술궂은 빛이 떠올랐다.

“이번엔 내가 당신을 묶게 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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