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우상… 이라고요?”
잘못 들은 줄 알았으나 비앙카스타는 수줍어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친구가 없어서 집에서 주로 책을 읽어요. 남작 부인의 저서, 전부 다 소장하고 있어요. 마리체 영지에서 생산된 드레스나 머리 장식도 나오는 대로 사들이고 있고요.”
물론 엘레노어는 평소 수많은 10대 소녀의 동경을 받고 있긴 했다.
하지만 설마 원작의 악녀가 팬이었을 줄이야.
“팬레터도 몇 번 보냈어요. 경매장에서 사들인 사인 본은 제 보물이에요. 남작 부인의 신작이 없으면 제 인생의 재미는 반 이하로 줄어들 거예요.”
비앙카스타는 말할수록 용기가 솟는 듯 점점 말이 많아졌다.
“올해 초에 내신 신작도 잘 봤어요. 남자 주인공이 너무 멋져서 한동안 거기에만 빠져 있느라 심심한 줄도 몰랐거든요. 싸움 전국 서열 1위에 최고 재벌가의 아들인 데다가 잘생긴 기사 다섯 명이 모여 k5를 결성했다는 설정은 정말 참신했어요. 그리고…….”
앞으로 몸을 내밀어가며 드물게 적극적인 태도로 줄줄이 말을 늘어놓던 비앙카스타는 어안이 벙벙한 엘레노어를 보고 정신이 든 모양이었다.
“앗,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흥분해서….”
“아뇨. 팬을 만나서 기쁜데요.”
빨개진 비앙카스타를 안심시키며 엘레노어가 삼천포로 빠진 이이야기를 원점으로 돌렸다.
“그러면 비앙카스타는 내게 호감이 있었단 건데 왜 황녀의 명령을 들은 거죠? 비앙카스타가 걸린 주술에는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기능도 있나요?”
만약 그랬다면 ….
예상대로 비앙카스타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서약 때문에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이쪽에서 맞는 답을 이끌어낼 때까지 질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 혹시 황녀가 당신을 협박했나요?”
다행히 한 번에 맞춘 모양이었다.
비앙카스타가 기괴한 소리를 냈다.
“무얼 가지고 협박했죠? 가족? 아니면 당신을 죽이겠다고 했나요? 아니면 당신의 주변 사람을?”
하나하나의 추측에 반응을 보이지 않던 비앙카스타가 마지막 말에 기괴한 소리를 냈다.
“주변 사람 누구죠? 친구? 아니면 애인?”
비앙카스타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지만, 얼굴이 발그레해진 걸 볼 때 후자인 듯했다.
“그렇다면 큰일이네요. 지금 황녀가 이미 그 사람을 죽였을지도 모르는데.”
엘레노어의 목소리는 다급했으나 비앙카스타는 뜻밖에도 별로 걱정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뭔가 이유가 있지 싶어 캐묻자 이 부분은 딱히 주술로 막아 두지 않은 듯 비앙카스타는 곧 답을 내어 주었다.
“내가 먼저 죽지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황녀가 그렇게 말했어요?”
비앙카스타가 기괴한 소리를 내는 걸 볼 때 그런 모양이었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엘레노어는 무척 회의적이었다.
‘그런 말 따위는 상황이 바뀌면 언제든지 깨 버릴 수 있는 거잖아.’
황녀는 비앙카스타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하면 그녀를 제어하기 위해 그 사람을 인질로 쓸 게 뻔했다.
“상대가 누군지 말해 줄 수 있겠어요?”
비앙카스타는 입을 열려 했지만, 대답을 내어놓진 못했다.
그녀는 잠시 몸을 뒤틀다가 간신히 이 말 한마디를 뱉었다.
“황녀의 탄생제에서 나는 남자를 처음 만났어요.”
그 말을 해 놓고 비앙카스타는 장미처럼 새빨개졌다.
거기까지 알면 주변을 수소문해 상대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찾아서 보호해야겠군.”
문제는 지금 공작 부인 때문에 바깥에 나갈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되면 도움을 줄 사람을 찾는 수밖에 없었다.
“왜 그러세요?”
엘레노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자 비앙카스타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아뇨. 좀 생각할 게 있어서.”
잠시 생각한 끝에 엘레노어는 비앙카스타에게 이런 부분은 함구하기로 했다.
성격을 볼 때 딱히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굳이 얘기해서 마음을 어지럽히고 싶지 않았다.
뭔가 확실해지면 말해 주기로 하고 그녀는 슬며시 말을 돌렸다.
“음식은 좀 입에 맞나요?”
가져온 오트밀은 수수한 것이었다.
지금 처지상 메이드를 마음대로 부릴 수도 없어서 엘레노어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네. 괜찮아요.”
맛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녀는 요리를 딱히 해 본적도 없었고 비앙카스타는 고위 귀족 영애니까 좋은 것만 먹고 자라 입맛이 까다로울 것이다.
“입에 맞지 않아도 몸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먹어요.”
비앙카스타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오트밀을 조금 먹다가 엘레노어를 한 번 쳐다보고, 다시 또 한 입 넣고 쳐다보기를 반복했다.
어째 머뭇거리는 모양새가 뭔가 할말이 있는 기색이었다.
“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나요?”
엘레노어가 먼저 말문을 터 주었다.
“저기….”
“네?”
비앙카스타는 좀처럼 말을 꺼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물었다.
“저도 엘레노어라고 불러도 될까요?”
엘레노어는 다른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고 일부러 남작 부인’이라는 호칭을 고수해 왔다.
자리 잡기 전까지 상처받은 게 너무 많아서 성공을 위해 마음을 닫았다.
남자들의 접근도 막고 여자들과도 지나치게 친해지는 걸 경계한 것이다.
하지만 어린 소녀가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열려는 손짓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네. 좋아요.”
엘레노어의 답이 떨어지자 비앙카스타는 팔짝 뛰어오를 정도로 기뻐했다.
심경이 뿌듯한 한편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이름을 부르게 된 친구가 제국 최고의 악녀일 줄이야.’
이 세계에 처음 왔을 때만 해도 여주에게 목숨을 위협당하고 악녀를 구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로써 요부 이미지가 날아오르는데 기름을 부은 셈이다.
‘뭐 이걸로 조금이라도 치유가 된다면.’
조금이나마 밝아진 비앙카스타를 보니 다른 건 아무래도 좋아졌다.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그녀가 입은 헐렁헐렁한 옷에 시선이 닿았다.
“바로 나오느라 짐도 못 챙겼죠.
이따 블레인이 물건을 구해다 준다고 했으니 필요한 걸 말해 줘요.”
“저는 음식을 제공해 주시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네? 하지만 옷가지가 필요하지 않나요?”
“아무거나 입어도 상관없어요.”
비앙카스타는 전혀 사춘기 소녀답지 않은 말투로 말했다.
“저는 남작 부인처럼 예쁘지 않으니까요.”
사실 너무 마르고 켕해서 예쁘다는 느낌은 없다.
하지만 커다란 눈과 오뚝한 콧날을 볼 때 조금만 살이 붙고 꾸미면 상당한 미인이 될 것 같았다.
“비앙카스타는 아주 예뻐요.”
“네? 말도 안 돼요.”
“정말이에요. 못 믿겠으면 내가 꾸며 줄 테니 맡겨 봐요.”
그러자 비앙카스타의 얼굴이 환해졌다.
“제, 제가… 남작 부인의 그 유명한 스타일링을 받는 건가요?”
사교계의 패션 리더인 엘레노어가 꾸며 준다는 말이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었다.
“응. 그럼 내가 물건 적당히 구해 올 테니 대신 밥 잘 먹고, 가능한 한, 마음 편하게 먹어요. 알았죠?”
“네!”
씩씩한 비앙카스타의 대답을 듣고 엘레노어는 뿌듯하게 방을 나왔다.
전생에는 외동이었고 현생의 가족은 그녀를 마리체 남작에 팔아먹고 행방을 감추었다.
그러니 제대로 된 혈육 하나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예전부터 여동생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밖에 못 나가도 아주 심심하지는 않겠네.”
어떤 상황에라도 소소한 즐거움은 필요한 법이다.
엘레노어는 이 호텔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미소를 지으며 손수레를 끌고 복도를 지났다.
*
저녁 무렵.
방 안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엘레노어는 노크를 받았다.
문을 열자 블레인이 바깥에 서 있었다.
그는 어제 봤을 때보다 표정이 훨씬 안 좋았다.
“저를 찾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뭐 필요한 거라도?”
“좀 묻고 싶은 것들이 있어요. 자작님의 도움이 필요한 일도 있고요.”
블레인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방안에 들어섰다.
“묻고 싶다는 게 뭡니까?”
“칼라브리아 백작님은 이 저택에 안 오시는 건가요?”
별거 없는 질문에 블레인의 표정이 팍 구겨졌다.
“글쎄요. 나도 그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그 녀석은 항상 중요한 결정은 마음대로 혼자 내려 버려요!”
블레인은 흥분한 것처럼 방을 서성거리면서 마구 말을 내뱉었다.
“제멋대로 사지로 가는 결정이나 내리고! 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신경도 안 쓰면서 ‘뒷일은 잘 부탁해!’ 같은 말이나 뻔뻔하게 해 대다니. 정말 그 녀석 때문에 신경이 열 개라도 하루에 반씩 끊어질 것 같단 말입니다!”
아무래도 리안이 자신을 배제하고 뭔가를 결정한 것에 대해 대단히 분통이 터진 듯했다.
잘은 모르지만, 블레인의 지금 기분은 대충 알 것 같았다.
“많이 걱정되시나 보군요.”
“걱정은 무슨! 내가 그런 자기만 아는 고집불통 멍청이를 왜 걱정합니까?”
“백작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엘레노어가 빙긋 웃자 블레인은 입을 비죽거리다가 이내 다물어 버렸다.
속내를 들킨 게 민망한지 머쓱한 표정을 지은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엘레노어의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흠흠, 부탁할 일이란 게 뭡니까?”
“저는, 스카이 페이드라 공작님을 만나야만 해요.”
조금 풀렸던 블레인의 표정이 다시 구겨졌다.
“내가 직접 가고 싶지만, 공작 부인이 나를 나가지 못하게 해요. 그러니까 그분을 여기로 부르는 수밖에 없어요.”
“으윽. 미안하지만, 나는 또 공작에게 편지를 전하고 오진 않을 겁니다.”
“그러지 말고 부탁해요. 지금 나는 자작님 외에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어요.”
엘레노어가 간절히 쳐다보자 블레인의 얼굴에 쑥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는 부탁을 들어주고 싶은 마음과으면 죽진 않잖아요. 왜 자꾸 일을 벌이려는 겁니까?”
“이유를 말하면 가뜩이나 많은 걱정이 더 깊어지실 텐데요.”
블레인은 말해 보라는 듯 턱을 치켜들었다.
그는 동정심이 많고, 근본이 선한 사람처럼 보였다.
도움이 필요하고 말해도 별 탈 없을 거 같아 엘레노어는 사정을 대강털어놓았다.
“황녀가 주술…? 바이스 영애를 조종해 당신을 죽이려 했다고요?”
예상대로 블레인은 믿기 어려운 기색을 보였다.
“미안하지만, 그 영애는 망상증으로 소문이 안 좋습니다. 그런 말에 넘어가는 건 당신 치고 어설픈데요.
이러기보다는 호법청으로……….”
“내가 내 눈으로 확인한 사실이에요.”
엘레노어는 손에 끼고 있는 스트링스톤을 보여 주며 그 효능과 본 것들을 다시 설명했다.
블레인은 한참이 지나고서야 신뢰를 보였다.
“그래서 페이드라 공작을 찾는 거군요.”
블레인은 납득한 것처럼 말했지만, 여전히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사정은 알겠지만, 그렇다면 더욱 더 숨어서 얌전히 리안의 보호를 받는 게 낫지 않습니까?”
“이불 속에 숨어서 성자의 축제라도 떠올리고 있다면 마음은 편하겠죠. 하지만 남에게 맡겨 놓고 발을 뺀다고 나를 둘러싼 현실이 알아서 좋아지진 않을 거예요.”
엘레노어는 딱 잘라 말한 뒤 블레인에게로 좀 더 다가갔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거예요. 그게 지금은 캔터베리 자작님을 달달 볶는 거고요.”
“하지만 난……….”
“해 줄 거예요.”
“나는 리안이 여전히 당신 말고 다른….”
“그래도 나를 도와줄 거예요.”
블레인은 도망치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지난 5년간 나를 배척하며 끼워 주지 않는 사람들이랑 나만 보면 말싸움을 걸고 싶어 하는 시가가 내 말을 들을 때까지 끈질기게 매달렸어요. 이런 간청이나 실랑이라면 종일이라도 할 수 있어요.”
엘레노어는 그런 그에게 자신 있게 말한 뒤 매력적으로 미소 지었다.
“해 줄 거죠?”
블레인은 한숨을 푹 쉬고는 인상을 박박 구긴 채 엘레노어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들었다.
“이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할 겁니다!”
“내가 나가게 되면 사교계에서 제일 예쁜 아가씨들을 될 때까지 잔뜩 소개해 줄게요.”
그제야 블레인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졌다.
그를 보내고 엘레노어는 다음 계획에 착수하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블레인이 뭔가 두고 간 줄 알고 대답한 엘레노어는 상대를 보고 멈칫했다.
“오랜만입니다, 엘레노어.”
리안이 수려한 얼굴에 미소를 띤채 문밖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