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리안.”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천천히 자신의 아들에게 다가섰다.
곁에 서 있던 두 공작은 분위기를 읽은 듯 가볍게 인사하며 물러섰다.
공작 부인은 감격한 눈으로 어느덧 머리 하나가 넘게 훌쩍 커 버린 아들을 자랑스레 바라보았다.
“먼 길에 잘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불편한 건 없으십니까?”
“대부분은 괜찮지만.”
공작 부인은 유일하게 아들을 닮은 보라색 눈을 가늘게 떴다.
“목숨을 건 결정을 하기 전에 한마디라도 해 주면 더 좋았을 것 같구나.”
리안은 사과하는 대신 머쓱하게 웃었다.
공작 부인은 표정을 더욱 찡그렸다.
“위험한 마수라던데. 꼭 가야만 하는 거니?”
“그게 좋을 것 같습니다.”
“어째서?”
“다녀오고 나면 모든 게 확실해져 있을 테니까요.”
드물게 무표정을 깨고 걱정스러운 기색을 드러낸 어머니의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다 잘될 겁니다. 다만 이번에는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결코, 누구에게도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는 아들이기에 그의 요청을 받는 게 역설적으로 특별한 기분이 들게 했다.
심지어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결정을 할 때마저도.
“물론이다. 토벌에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주마.”
“토벌은 괜찮을 겁니다.”
공작 부인의 흔쾌한 말에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대신 그녀를 지켜 주십시오.”
줄곧 애틋한 얼굴을 하고 있던 공작 부인이 표정을 굳혔다.
“나는 너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 네 어머니니까.”
리안이 한 번 결정한 것을 절대 바꾸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스스로 정말 중요시하는 일이 아니면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에 여태 그의 결정을 반대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네가 사지로 떠나는데 내가 어떻게 그 여자를 좋게 볼 수 있단 말이냐.”
말릴 수 없으니 방관할 뿐 그의 계획의 일부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녀의 딱딱한 말에 리안이 다시 말했다.
“저는 사지로 떠나는 것도 아니고, 어머니께서 그녀를 굳이 좋게 보려고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싫은 채로 그녀를 보호하라는 거냐?”
“그저 제가 없는 동안 엘레노어를 곁에 두십시오. 그러면 그녀를 좋아하게 될 겁니다.”
공작 부인은 오뚝한 콧대를 찡그렸다.
“대체 왜 그렇게 자신 있는 거니?”
리안은 웃었지만, 그녀는 나약하고, 의존적인 주제에 제멋대로인 데다가 남자관계까지 복잡한 며느리를 인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위험한 토벌을 떠나는 아들에게 그런 말을 꺼내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았다.
“네가 돌아올 때까지 난 네 저택이나 단장할 거다. 너는 그런 방면으로는 영 소질이 없으니까. 그 여자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그 정도로도 리안은 만족한 듯 더 채근하지 않았다.
“언제 떠나지?”
“길게 끌어 좋을 게 없으니 내일 바로 떠나려 합니다.”
만나자마자 이별이라.
공작 부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담백하게 말했다.
“꼭 무사히 돌아와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떠나지도 않을 겁니다.”
그녀는 자랑스러운 아들이 패배하는 그림은 그려 본 적조차 없었다.
“전 이만 출정 준비를 하러 가 보겠습니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리안은 그렇게 말을 맺은 뒤 황실 보급청을 향해 떠나 버렸다.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공작 부인은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떠날 셈인가?’
찾아오라고 심부름을 보냈었다.
“리안이 기사단에는 없었습니다.”
“이미 만났다.”
“그러면…?”
블레인이 희망을 담은 눈으로 공작부인을 보았으나 그녀는 고개를 절 레절레 저었다.
토벌을 말리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블레인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아들을 보내는 부인 앞에서 그것을 티 내진 않았다.
“…저택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래.”
떠나기 전에 얼굴이라도 봤으니 헛걸음은 아니었다.
공작 부인은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 안에서 블레인을 상대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정말 믿을 수 없구나. 리안이 그런 여자를 좋아하다니.”
“저도 처음 알았을 때는 확실히 리안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만…….”
블레인은 동조하면서도 묘하게 말끝을 흘렸다.
“얼굴이 반반하긴 하지만, 여자는 그게 전부가 아니다. 누구의 손에서나 피어나는 사교계의 꽃은 꺾는 게 아니야.”
이런저런 이유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공작 부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그녀가 너무나 가벼워 보인다는 점이었다.
이미 한 번 결혼한 것도 문제지만, 매일 밤 파티를 전전하며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는 여자다.
리안에게 일편단심인 여자가 머리카락의 숫자만큼 많은데 굳이 그런 여자에게 넘어가 골치를 썩이다니.
그런데 이번에는 블레인이 슬며시 반박의 말을 꺼냈다.
“나름대로 알아봤는데 뭐 아무 손에서나 피어나는 꽃은 아닌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남편이 옥중 결혼하고 사망했고, 그 후로도 여태까지 남자와 별다른 염문 한번 없었던데요.”
사실 그녀가 뒷조사한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믿을 수 없었다. 아직 충분히 조사하지 않아서 그럴 뿐이다.
“그게 말이 되느냐. 드러나지 않게 잘 숨기는 거겠지.”
“그녀는 사교계의 주목도가 높습니다. 그토록 오랜 기간 완벽히 숨길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미 명백한 건이 있지 않으냐?”
공작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페이드라 공작과의 관계는 부정할 수 없을 텐데.”
그저 리안이나 스카이처럼 잘생긴 미남에 고위 귀족만 전문적으로 만나고 다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곧 생각지도 못한 반박에 부딪혔다.
“같이 있던 건 맞지만, 둘 사이엔 아무 일도 없었다 했습니다.”
하. 이런 순진한 녀석을 어찌할꼬.
공작 부인은 측은한 눈으로 블레인을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너는 그런 여자의 말을 믿는 거냐?”
“제가 들은 건 엘레노어 남작 부인에게서가 아닙니다.”
“그럼 누가 또 그런 헛소리를
“스카이 페이드라 공작님이 직접 말해 준 겁니다.”
흥미 없는 눈을 하고 있던 공작부인이 눈썹을 조금 들어올렸다.
“페이드라 공작이? 그게 정말이냐?”
“정말입니다.”
공작 부인은 반신반의하다가 이내 불신으로 기운 표정을 지었다.
“페이드라 공작은 여인을 사양하지 않는 남자다. 그런데 그가 여인을 데려가서 고이 돌려보냈다고?”
싫은 감정이 들어도 엘레노어가 무척 아름답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사내가 그런 여자를 곁에 두고 인내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럴 수 없었다고 합니다.”
“왜 못 해? 누가 묶어 놓기라도 했다는 거냐?”
코웃음 치며 한 말에 블레인은 이상할 정도로 흠칫했다.
“제 생각에는 거기까지 아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블레인은 머뭇거리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아마 제 얘기는 진실일 겁니다.”
더 캐어물으려 해도 블레인이 무척 비장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그는 마치 황궁에 내려오는 기밀이라도 간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에게 묻는 대신 공작 부인은 지난밤 보았던 엘레노어를 떠올려 보았다.
‘남자관계가 복잡하지 않다라..….’
엘레노어는 아첨하지 않는 눈빛으로 공작 부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신분상 그런 눈빛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게 살아온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다.
‘사교술이 좋아서겠지.’
공작 부인은 신뢰가 생기는 걸 거부하듯 고개를 내저었다.
부정이 있으면 철저히 파헤쳐 리안이 돌아오는 날 얼굴 앞에 들이밀어 주리라.
그때가 그녀 인생의 마지막 날이다.
마음을 굳히며 공작 부인은 멀리 보이는 거대한 건물을 바라보았다.
구 샨카른 호텔, 이제는 칼라브리 아 백작 저가 된 건물 창은 아름다운 색색의 구름 띠를 반사하며 반짝였다.
*
엘레노어는 끌고 온 손수레를 세우고 문을 부드럽게 노크했다.
곧 모기처럼 가는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잘 잤어요?”
인사를 건네자 비앙카스타는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응답했다.
그녀는 햇살이 들어오는 방 안이 익숙하지 않은 듯 무척 초조하고 어색한 기색이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걱정스레 묻자 비앙카스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꿈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그렇지는 않은 모양이네요.”
가까이 다가가자 비앙카스타의 멍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무릎 위에 둔 주먹을 굳게 쥐더니 금방 허리를 굽혔다.
“고, 고맙습니다.”
“네?”
“제 말을 믿어 주셨잖아요. 저는 남작 부인의 잔에 독을 탔는데… 황녀 전하는….”
비앙카스타가 말을 잇지 못하고 얼굴을 실룩댔다.
뭔가가 주술에 막힌 모양이었다.
“전하는… 정말 좋은 분이니까요.”
비앙카스타는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을 맺어 버렸다.
그녀가 더 고통받지 않도록 엘레노어는 그녀가 하고 싶을 말을 대신해서 꺼냈다.
“자신이 바라는 대로 전부 이루어지면 누구라도 다 좋은 사람이 아닐 이유가 없어요.”
엘레노어는 그간 겪은 일들 덕에 황녀보다 훨씬 순박하고 훨씬 힘없는 사람들도 뒤에서 어떤 일을 꾸밀수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행동으로 평가받아야 해요. 그녀가 당신에게 한 짓을 보면 명백한 ‘악인’ 이에요.”
비앙카스타는 무척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 그보다 우선 당신은 좀 먹어야 해요.”
엘레노어는 손수레를 침대 곁에 세운 뒤 은빛 덮개를 열었다.
그리고 국자로 오트밀을 손수 그릇에 담아 주며 비앙카스타에게 말을 걸었다.
“이곳에 숨어 있으면 한동안 안전할 거예요. 언제까지나 있을 순 없지만요. 이곳을 떠나기 전에 내가 은신처와 함께 당신에게 걸린 주술을 푸는 방법을 찾아볼게요.”
주술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비앙카스타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가능할까요?”
“나는 잘 모르지만, 일단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알고 있어요.”
너무나 감격한 나머지 비앙카스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입술을 한참이나 달싹이다가 그녀는 간신히 더듬더듬 감사의 말을 내어놓았다.
“그런, 그런 대단한 은혜를 받아도 괜찮을지……”
“영애께서도 제게 큰 도움이 됐으니까요.”
비앙카스타 외에도 황녀라면 이용 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그때 말리지 않았다면 전부 마셨을 거고 아마 의심조차 해보지 못한 채 죽었을지도 모른다.
설령 위험을 피해 갔어도 황녀의 실체를 아는 데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게 분명하다.
“영애라니 당치도 않아요. 비앙카스타라고 불러 주세요.”
후작의 딸인 비앙카스타는 평민 출신 남작 부인인 엘레노어보다 훨씬 지위가 높았다.
그러나 비앙카스타가 모처럼 꺼낸 말이므로 엘레노어는 수락하기로 했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시원스레 대답하자 비앙카스타는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꿈만 같아요.”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난 게 정말 기쁜 모양이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비앙카스타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우상이던 남작 부인이랑 둘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