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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36화 (36/120)

제36화

별궁에 채 도착하기도 전부터 스카이는 엘레노어의 부재를 보고 받았다.

그는 그녀와 함께 머물렀던 방 안에서 답답한 제국 예복의 단추를 풀며 제니트에게 질문했다.

“그러니까, 그 여자가 내가 없는 짧은 틈을 타서 곧장 나가 버렸다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그다음 바로 바이스 후작 저택으로 향했고?”

“네.”

목에 맨 크라바트를 풀어 버리고 불편한 예복에서 해방된 스카이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넓게 펼쳐진 정원 너머 멀리 보이는 황궁의 바깥은 밤인데도 온통 오가는 불빛들로 가득했다.

“그럼 저 난리도 그 여자가 일으킨 거란 말이지?”

“네. 바이스 후작 영애를 찾는 수색대입니다.”

엘레노어에게 붙여 두었던 감시 덕에 스카이는 그녀의 행적에 대해 낱낱이 고해받을 수 있었다.

“호법청에 제소하기를 거부했을 때부터 뭔가 꿍꿍이가 있을 줄은 알았지만, 설마 직접 찾아가서 납치해 버릴 줄이야.”

스카이는 혀를 내둘렀다.

자신에게 쏠린 제국의 시선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바로 얼마 전 생명의 위협을 겪은 여자가 하기엔 지나치게 대담한 행동이었다.

“그녀는 샨카른 호텔로 향했습니다. 그 안에는 플로이드 공작 부인 이 머물고 있었으니 어쩌면 지금쯤 살해당했을지도 모릅니다.”

“음.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야.”

회합장에서 만난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도무지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여자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스카이는 그녀가 엘레노어를 죽이지 않았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이제 그녀는 어쩌실 생각입니까?”

제니트의 질문을 받은 스카이는 광장 너머 비죽 솟아 있는 샨카른 호텔로 시선을 주었다.

저 거대한 호텔이 매각된 사실은 이미 팰리시티의 금융가들을 한바탕뒤집어 놓았다.

특히 그 엄청난 매물을 사기 위해 재력을 모으고 있던 거부들은 그것을 사간 남자가 ‘일라이 매트슨’이라는 무명의 청년이라는 사실에 거의 졸도할 듯했다.

당연히 경매장 로즈우드 파크의 담당자 그리즈먼 남작에게 수많은 질문이 쏟아졌다.

그는 ‘일라이 매트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수수한 망토를 걸친 키가 크고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후드를 뒤집어 썼지만, 살짝 보이는 외모가 섬세하고 탁월했습니다.”

리안이 엘레노어에게 건넨 열쇠, 그리고 회합이 종료되자 곧 그곳으로 향한 플로이드 공작 부인을 볼 때 ‘일라이 매트슨’의 정체는 명확했다.

“리안에게 돌아갔으니 우선 두고 봐야겠지.”

스카이의 말에 제니트가 미간을 좁히며 질문했다.

“그녀를 곁에 두려 하셨다면 왜 열쇠를 곧이곧대로 건네신 겁니까?”

“편지가 엘레노어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칼라브리아 백작이 직접 전하러 오겠다고 적혀 있었어.”

“전하께서 그런 협박에 연연하셨다.

고 믿기 어렵습니다만.”

막후의 심복으로만 살아와 사교와는 거리가 먼 제니트의 화법은 돌리는 것 없이 직설적이었다.

“마음에 든 여인을 그리 쉽게 연적에게 보내시는 건 전하답지 않습니다.”

“연적이라. 그렇게 생각하나?”

스카이는 입꼬리를 올리며 제니트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그는 그녀를 갖지 못해.”

허세가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만만 했다.

황제가 놓아주지 않는 한 리안은 황녀와 결혼하는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차라리 돌려보내고 그녀가 리안을 흔들어 놓도록 두는 게 나아.”

정도만을 걷던 리안이 그녀를 만나고 나서 자신의 입지를 뒤흔드는 행보를 계속하고 있었다.

스카이는 엘레노어가 그것을 부추겨 주길 바랐다.

“그럼 가만히 내버려 두실 생각입니까?”

“지켜보다가 그녀가 나를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거지.”

엘레노어는 줄곧 부정했지만, 스카이는 그녀에게 리안을 향한 마음이 남아 있다 여겼다.

예상대로 그녀는 위기에 처하자 곧장 리안에게로 향했다. 그런 그녀를 무작정 곁에 묶어 둔다고 해도 상황이 달라질 여지는 많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 여인이 공작 전하를 찾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나를 찾을 거야. 멀지 않은 시일에.”

이미 페이드라와 엘레노어 남작 부인의 관계를 대중의 뇌리에 심어 두었고, 그녀와의 연결 고리도 생겼다.

스카이는 확신에 차 있었지만, 제 니트는 별로 동조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스카이는 미소를 지은 채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

황궁 동쪽 구역에는 황제가 여흥을 즐길 수 있는 각종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중 외부인에게도 출입이 허락된 곳 중에 단연 인기는 동궁의 탑 ‘하르벨’ 이었다.

황제궁 뿐만 아니라 제국 전체에서도 손꼽힐 만큼 높은 탑이어서 아름다운 궁궐의 전망을 바라보기 적합했기 때문이다.

미나즈는 클로드와 함께 하르벨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들떠 있었지만, 아름다운 궁궐의 정경에 감탄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점점 늘어나는데? 다들 정보가 참 빠르네.”

두 사람의 시선은 하르벨 맞은편에 있는 제국 상서청으로 쏠려 있었다.

원래 출입이 드문 곳은 아니긴 하지만, 오늘은 길게 마차가 늘어설정도로 붐비는 중이었다.

그 대부분은 리안 칼라브리아 백작의 출정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온 제국의 시선이 쏠려 있는데 대놓고 출정을 준비하니 퍼져 나가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겠지요.”

“그렇긴 해도 이틀 만에 이렇게 몰리다니. 우리 기사단장 나리는 인덕도 좋지.”

미래의 제국 최초 대공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에 대한 반대가 꼬리를 물고 몰려들었다.

“무뚝뚝하고 다른 가문과의 교류도 거의 안 하는데. 그 정도로 권력을 독점했으면 귀족들이 정치적 견제라도 할 텐데 없다는 게 불가사의하다니까.”

“그건 칼라브리아 백작이니까 그런 겁니다.”

로우앤의 말에 미나즈가 입을 비죽내밀었다.

“그렇게 시도 때도 없이 사랑을 표현하지 않고는 못 참겠어?”

중증의 리안바라기인 클로드는 다소 뜨끔한 표정을 했지만, 이내 당당하게 항변했다.

“그렇게 말하지만, 당신도 공감하지 않습니까? 칼라브리아 백작은 그런 권력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는거.”

이번에는 미나즈가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뭐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남자 같긴 하지.”

작게 인정한 뒤 미나즈는 곧 다시 난간 쪽으로 몸을 뻗었다.

“앗, 저기 봐. 리안이 나왔어.”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기사단청에서 리안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그리로 쏠렸지만, 누구도 감히 접근하진 못했다.

“가서 이야기해 보자.”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넌 신경 안 쓰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리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 정확히 알아야겠어. 본인 입으로 듣는 게 제일 좋겠지.”

클로드는 조금 투덜댔지만, 슬며시 일어서서 미나즈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은 사람들 틈을 제치고 빠르게 걸었다.

다행히 리안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었다.

“칼라브리아 백작!”

미나즈가 큰 소리로 부르자 리안이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그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사람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당신을 보고 있으면 내가 왜 공작이 고결한 작위라 여겼는지 의문스다. 그것은 태클을 걸어야 할 클로 드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아, 그게.…..”

“당신은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 정말로 좋은 건가요?”

클로드가 적당한 말을 찾는 사이 미나즈가 확 질러 버렸다.

그녀를 책망하려 했지만, 그가 뭐라 하기도 전에 질문만큼 거침없는 리안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살짝 벌어졌다.

이번에는 클로드가 묻는 게 더 빨랐다.

“그녀가 매력적인 여인이란 소문은 충분히 들었지만, 대체 어떤 점에 그렇게 빠진 겁니까?”

아마 제국의 모두가 궁금해 하는 질문일 것이다.

그걸 직접 물어본 용자가 제법 많았는지 리안이 미간을 좀 찌푸렸다.

“많은 게 있지만, 가장 큰 건 그녀를 보면 안고 싶어서 참을 수 없다는 것일까요.”

리안은 마치 날씨 얘기라도 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와 입 맞추고 안고 살을 맞대고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침실에 종일 가둬 두고, 밤새 나만 바라보며 매달리게 하고 싶어요.”

담담하게 말한 뒤 리안이 잘생긴 턱 끝을 살짝 올리며 맺었다.

“난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하는 상대와 결혼하고 싶습니다.”

그는 빨간 얼굴로 어물대더니 뭐라도 좀 해 보라는 듯 미나즈를 바라보았다.

“개인적으로……….”

미나즈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엄지를 세웠다.

“잘생긴 호색한은 최고라고 생각해.”

기대한 게 잘못이지.

클로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가 합리적인 척하는 이유를 갖다 붙이면 설득이라도 하려 했는데 이렇게 말하니 할 말이 궁색해졌다.

아마 그걸 노리고 일부러 그런 것일 테지.

“그럼 이제 어쩔 생각입니까? 당신은 이게 진짜 이루어질 거라고 생각 합니까? 당신의 운명에 반하는 일이라고요.”

“아뇨. 그녀가 내 운명입니다.”

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못 박았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클로드가 뭔가 더 말하려는데 곁에서 있던 미나즈가 소매를 잡아당겨 멈췄다.

돌아보자 그녀는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함께 그곳을 본 리안의 입술 사이에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머니.”

거기에는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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