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박이라니 당치도 않다.
엘레노어는 그런 것이 통하는 상대와 아닌 상대를 구분할 줄 알았다.
“그저 제 상황에서 생각할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말했을 뿐입니다.”
또렷한 대답에 공작 부인이 묘한 눈빛을 했다.
“그럼 내 경우의 수를 말해 볼까.”
공작 부인이 위압적인 어조로 말했다.
“여기서 그대를 죽이고, 그대의 시체를 들이밀며 리안을 포기시킬 수도 있지.”
지 않은가?”
어느 정도 막무가내긴 했지만, 결국 그와 함께 밤을 보낸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다.
공작 부인은 부정하지 않는 엘레노어를 지그시 바라보며 날카롭게 물었다.
“감정이 없진 않을 텐데. 떠나려는 이유가 뭐지?”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 속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고 있거든요.”
15세 때부터 시가로부터 끔찍한 핍박과 인격 모독, 갖은 수모를 이겨 내고 간신히 홀로 살아갈 기반을 갖추었다.
짧은 만남과 불투명한 교제로 그 모든 걸 놓치라고?
게다가 생명의 위협을 하는 중인 상대가 묻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분수를 넘는 일을 바라지 않아요.
함께해서 폐가 될 마음을 고집할 필요는 없겠지요.”
“뜻밖에도 패기가 없군.”
방금까지 위협했으면서 엘레노어가 너무 깨끗하게 물러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소시민에겐 그 무엇보다 살아서 내일을 맞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요.”
공작 부인은 낮게 혀를 찼다.
“솔직히 당신은 즉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야. 화나게 하면 안 되는 상대를 화나게 했지.”
“네. 너무 많은 사람을 적으로 만들었죠.”
“적 대부분은 문제가 되지 않아.
정말 경계해야 할 사람은 하나 정도 일까.”
그건 자신을 뜻하는 걸까?
“그대에게 다행인 건 나도 그 사람을 경계하고 있다는 거겠군.”
공작 부인은 뜻 모를 말을 중얼거리더니 몸을 뒤로 물렸다.
“우선 그대는 살려 두도록 하겠다.”
공작 부인의 입에서 드디어 그 말이 나왔다.
“그건 보호해 주신다는 뜻인가요?”
“어렵지 않지만, 그럴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군. 우선 두고 볼뿐이네.”
원하던 답은 아니었지만, 엘레노어의 몸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풀렸다.
여유 있는 줄 알았는데 한시름 덜고 나서야 자신이 얼마나 긴장하고 있었는지 느껴졌다.
“그대는 이곳에 머무르게.”
“네?”
“내가 결론을 내릴 때까지 내 시야에 있어야 해.”
마땅한 은신처가 없어 흘러들어 온 것이므로 머무는 게 나쁘지 않았지만, 잡아 두는 의도를 몰라 얼떨떨했다.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는 엘레노어에게 공작 부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지?”
“당장에라도 백작님 주변에서 사라지라 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그대가 이곳을 나가게 됐다면, 아마 그땐 시체가 되었을 거야.”
엘레노어는 공작 부인의 쌀쌀맞은 말 보다 이어진 중얼거림에 더욱 놀랐다.
“바로 그렇게 할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서툰 애원이나 저열한 감언이설로 환심을 사려 들지 않는 건 나쁘지 않았으니까.”
이건….
좋게 보인 건가?
말 내용은 그런 듯한데 공작 부인 이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어서 감별이 쉽지 않았다.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방심하고 내 심기에 거스르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살려 두기로 했어도 내 인내심은 깊지 않으니까.”
싸늘한 말을 덧붙인 뒤 공작 부인은 방을 떠나려는 듯 뒤로 조금 물러섰다.
‘휴. 이제 끝난 건가.’
돌아서는 공작 부인을 보며 간신히 내일까지 목이 붙어 있게 된 상황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순간이었다.
“저건 누구지?”
공작 부인의 시선이 살짝 솟은 침대에 꽂혀 있었다.
바로 방금 심기를 거스르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건만.
곧바로 찾아온 위기에 엘레노어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페이드라 공작으로 부족해서 또다른 남자라도 데려온 건가?”
“아뇨. 저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대답하다 엘레노어는 중간에 멈췄다.
남자가 아니긴 한데 전혀 다행인 상황이 아니었다.
과연 이 위기는 모면할 수 있을까?
“남자가 아니라?”
“…그냥 납치해 온 영애인데요.”
말이 길어지면 더 구차해질 것 같아 그냥 솔직하게 말해 버렸다.
“납치라고?”
“그렇습니다.”
재차 확인해도 엘레노어의 대답에 변화가 없자 공작 부인의 미간이 점점 좁아졌다.
“어쩐지 방 안에서 피 냄새가 자꾸 난다 싶더니.”
“그 피는 제가 흘린 거예요.”
슬며시 덧붙인 말에 반응 없이 공작 부인은 비앙카스타에게 다가가 얼굴을 확인했다.
“이 소녀는 어느 집 영애?”
“비앙카스타 바이스 후작 영애입니다.”
“소문이 좋지 않은 영애이긴 하지만, 납치해 올 이유가 있었나?”
“그건… 어제 저를 독살하려 했거든요.”
엘레노어의 대답에 공작 부인의 눈썹이 쓱 올라갔다.
“그게 사실인가?”
엘레노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는지 공작 부인은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독살 시도에 납치라……….”
내내 찌푸려져 있던 공작 부인의 입매가 부드러워졌다.
“그래도 제대로 할 줄 아는 부분도 있는 모양이군.”
음?
“우리 북방 사람들은 예로부터 ‘불평할 시간이 있으면 낭비하지 말고 곧장 복수를 계획하라.’ 했지.”
그녀는 엘레노어의 어깨를 두드리며 조언했다.
“이런 일은 후환이 없도록 확실하게 처리해.”
말을 마친 공작 부인은 방을 떠났다.
이상한 부분에서 점수를 딴 모양이었다.
엘레노어는 어안이 벙벙해져 있다.
가 이내 한숨과 함께 바닥에 주저앉았다.
*
에오가이노스,
집무실의 높은 의자에 앉은 황제는 눈앞에 선 수려한 청년을 노려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시 한번 말해 보게.”
부디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으나 리안은 담담한 어조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크메르시아를 토벌하고 오겠다하였습니다.”
섬세한 세공 테이블 위에 놓인 황제의 손이 불끈 쥐어졌다.
“내가 그에 앞서 한 말은 제대로 들은 건가?”
“황녀 전하께 청혼하고 다음 연회에서 발표하면 하크메르시아 토벌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하셨습니다.”
리안의 목소리는 아주 또렷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가 자신의 의도를 곡해했을 조그만 가능성을 고려해 좀 더 노골적으로 물었다.
“하크메르시아 토벌은 아무리 그대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리안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조금 끄덕였다.
“마수의 토벌은 국가를 위해 필요한 일이지만, 황녀와의 약혼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던 일이네.
그것을 빠르게 해결하고 제국 백성들을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 아닌가?”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리안의 붉은 입술은 거침없이 단언했다.
“하크메르시아 토벌과는 관계없습니다. 저는 황녀 전하와 약혼하지 않겠습니다.”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황제의 침착함에 균열이 갔다.
“이유가… 뭐지?”
황제의 이를 악문 질문에 리안은 차분히 답했다.
“사랑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평정을 잃지 않는 체펠린도 이 대답에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 상대가 설마..…?”
“폐하께서 예상하는 여인이 맞을 것입니다.”
황제의 나이에 비해 팽팽한 이마에 주름이 가고 입매가 분노로 일그러졌다.
“지금… 그 말에 책임질 수 있겠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곁에 서 있던 체펠린이 움찔할 정도로 황제의 얼굴에는 노기가 만연했다.
그러나 황제의 진노를 단독으로 받으면서도 리안의 얼굴색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대에게 강제로 명을 따르게 하고 싶지는 않았네만… 제국과 황가에 필요한 일이라면 그러지 않을 수 없어.”
황제는 위협하듯 이를 내보이며 말했다.
사실상 최후통첩이 던져진 것이다.
순간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집무실 내에 체펠린이 침을 넘기는 소리만이 울렸다.
그 정적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저는 평생 폐하의 검으로 살아가 고자 했습니다.”
리안의 보랏빛 눈동자는 잔잔하면서도 깊은 힘을 담고 있었다.
“부디 제가 변절하지 못하게 잡아 주십시오.”
낮은 목소리는 한 치의 여지도 없었다.
체펠린은 탄식 속에서 눈을 감았다.
끝도 없이 지속될 것 같던 침묵은 황제의 한마디로 끝났다.
“.…물러가라.”
황제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잡아 누르듯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만인지상의 몸으로 태어나 이렇게 한 사람에게 인내해 보는 일은 처음일 터였다.
리안은 예법에 맞게 인사를 올린 뒤 천천히 돌아섰다.
나가는 그의 뒷모습은 방금의 대화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
황제의 시선이 타는 듯 꽂혀 있었지만, 리안의 넓은 등에서는 경계하는 기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리안이 사라지고 나서도 체펠린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한참 후 황제가 내뱉는 듯한 어조로 말을 뱉었다.
“리안에게 하크메르시아 토벌을 명하게.”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되는 상황임에도 체펠린은 솔직하게 간언했다.
“폐하. 하크메르시아 토벌은 시급한 시안이 아닙니다. 목적이 무산된 이상 굳이 추진할 필요가……….”
“칼라브리아 백작을 기사단과 함께 수도 밖으로 내보내고 그 여인을 처리해.”
황제가 체펠린의 말을 자르며 빠르게 명령했다.
“세간의 시선 따윈 신경 쓰지 말게. 필요하면 황제의 명령이라 해도 좋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황가의 명예나 겉으로 보이는 모양새를 접어 두고 강압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여기까지 말한 이상 리안은 극도로 분노하며 반발할 게 뻔했다.
“폐하. 정 뜻이 그러시다면 더욱 안전하고 간단한 방법이 있습니다.”
체펠린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고했다.
“서약을 이용해 칼라브리아 백작께 강제적인 복종을 명하시지요.”
어차피 반발할 거라면 리안이 마수를 토벌하며 겪을 위험이나 돌아와서 통제 불능 상태에 빠질 리스크를 짊어질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그리할 수 있다면 그리했겠지.”
“하지만 전에 분명히…….”
분명 서약의 존재를 긍정했는데 왜 몸을 빼는 것일까.
체펠린이 의아한 가운데 황제가 천천히 일어서 창가 쪽으로 돌아섰다.
“허나 서약의 주인은 아일린이야.”
생각지 못한 말에 체펠린은 당황했다.
그가 말문을 잃은 사이 황제가 창너머 솟아 있는 황녀궁 ‘로사그란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죽고 사라져도 리안이 그 애를 배신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했네.
둘이 마음으로부터 깊이 이루어지게 되면 알려 주려 했지.”
“폐하….”
“모든 짐은 내가 지고 가면 되네.
아일린은 알아야 할 필요가 없어.”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딸의 인생이 조금이라도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택하는 것인가.
그런 감정적인 문제라면 굳이 무엇이 효율적인지 고할 필요가 없었다.
체펠린은 깊이 고개를 조아렸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에오가이노스를 물러 나온 체펠린은 황궁의 중정을 가로질렀다.
정리해야 할 수많은 생각이 어지럽게 떠다니는 가운데 한 가지 질문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만일 황녀 전하께서 서약에 대해 알게 되면 과연 어떻게 될까.’
황녀가 서약을 이용하면 리안은 평생 그녀에게 복종하며 거역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천사 같은 전하께서 절대 악용하지는 않을 테지만.’
그러나 어쩐지 끝도 없는 불길한 예감이 몰려들었다.
그것으로부터 도망치듯 체펠린은 예복의 깃을 여민 채 무거운 발걸음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