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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34화 (34/120)

제34화

블레인은 셔츠 차림으로 길고 쭉 뻗은 다리를 드러내고 서 있는 엘레노어의 모습에 혼비백산했다.

그러나 엘레노어는 새빨개진 얼굴로 어쩔 줄 모르는 그를 보고도 태연하기 그지없었다.

“가릴 곳은 다 가렸는데 뭐 어때요. 크로트를 할 때는 훨씬 짧은 옷도 입는데.”

크로트는 제국 귀족들이 즐기는 스포츠로 일종의 수중 골프였다.

블레인 역시 크로트를 즐겼고 물에 들어가야 하는 만큼 부츠에 짧은 바지를 입은 여성을 상대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어두운 방 안에 둘뿐인 상황. 가린 부위가 더 넓다고 해도 흰 셔츠 차림은 제법 순진한 블레인에게는 자극이 너무나 컸다.

심지어 엘레노어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육감적이었다.

어쩐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리안에게 죄를 짓는 기분이 든다.

“됐으니까 일단 옷이나 갈아입으십시오!”

블레인은 오는 길에 챙겨 온 옷가지를 던지듯이 건넨 뒤 돌아섰다.

엘레노어가 군말 없이 욕실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기 시작하자 방 안이 조용해졌다.

“미안합니다. 기껏 구한 게 그런 옷뿐이라.”

정신이 좀 돌아온 블레인이 사과의 말을 던졌다.

그가 가져온 것은 메이드가 입을 법한 검정 드레스였다.

“가져다준 게 어딘가요? 고마워요.

밤에 무작정 와 놓고 볼로냐 후작부인의 가운을 요구하진 않아요.”

엘레노어의 소탈한 말은 대단히 의외였다.

‘종잡을 수 없는 여자로군.’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사교계를 주름잡으며 남자들과 염문을 몰고 다니는가 하면 쓸쓸한 표정을 짓거나 메이드 옷을 태연하게 받아 입기도 한다.

어느 것이 그녀의 진짜 모습일까.

생각에 잠긴 블레인에게 엘레노어가 질문을 던졌다.

“밖의 상황은 어때요?”

“공작 부인이 수도가 흉흉하다면서 저택 경비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지금 온 담장과 각 출입구에 공작 부인의 호위병이 잔뜩 깔렸습니다.”

그러자 엘레노어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그럼 어떻게 하죠? 최대한 빨리 도망쳐야 하는데.”

“우선 여기 숨어 있다가 틈을 봐서 나가도록 합시다.”

잠시 말없이 기다렸지만, 엘레노어는 좀처럼 문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초조해하고 있는데 엘레노어의 나지막한 중얼거림이 울렸다.

“이거 안 잠기는데.”

“네? 안 잠긴다고요?”

블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이즈를 몰라 일부러 엘레노어가 입기엔 좀 크다 싶은 옷을 골라 왔다.

가녀린 그녀의 체구에 맞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럴 리가. 잘못 입은 거 아닙니까?”

그러자 엘레노어가 뭐라 작게 웅얼거렸다.

“뭐라고요? 잘 안 들립니다.”

“단추가 몸통 중간부터 안 잠긴다.

고요!”

엘레노어가 소리를 빽 지르자 블레인은 뭔가 깨달았다.

확실히 엘레노어의 체형은 상당히 특별한 구석이 있었다.

그가 말문을 잃은 사이 엘레노어가 원래 옷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방 밖으로 나왔다.

“이거로는 안 돼요. 다른 옷을 못구하면 내 옷을 세탁해서 입겠어요.”

엘레노어가 옷자락을 들고 블레인에게 다가섰을 때였다.

단련된 블레인의 귀에 또다시 미세한 인기척이 들렸다.

“밖에 누가……….”

말을 잇기도 전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블레인은 뻣뻣이 굳은 채, 당당하게 서 있는 플로이드 공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말소리가 들리기에 궁금해서 와봤더니….”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말을 흐린채 고고한 보랏빛 눈동자로 방 안을 살폈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 마주 선 두남녀.

바닥에 널브러진 옷자락과 셔츠 한 장 차림의 엘레노어.

그녀의 전신과 파리해진 블레인의 얼굴 구석구석 시선이 떨어졌다.

‘망했다.’

블레인은 암담한 낭패감을 느꼈다.

이 너무나도 수상한 몰골과 상황.

엘레노어는 이대로 병사들에게 붙잡혀가 죽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녀가 죽으면 칼을 들고 쫓아올 제국 최고의 기사와의 혈투를 각오해야만 한다.

생명의 위협 속에 굳어서 아무 말못 하는 두 사람에게 플로이드 공작부인의 질문이 떨어졌다.

“그 여자는……?”

공작 부인의 찌르는 듯한 눈빛은 없는 죄도 만들어서 빌고 싶어질 정도로 날카로웠다.

공황에 빠진 채 입술을 달싹이던 블레인은 뭔가 떠올려 냈다.

‘공작 부인은 엘레노어를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저도 모르게 커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여자는, 제, 제 애인입니다!”

스스로가 듣기에도 얼빠진 목소리였다.

공작 부인이 미간을 찌푸리며 둘을 번갈아 보았다.

“네 애인이라고?”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의 눈빛에 불신이 가득 떠올랐다.

들어 올린 코끝과 찌푸린 미간, 그리고 일그러뜨린 입매.

그것을 조합한 표정은 블레인에게 ‘네가 뭔 재주로 저런 여자를?’ 이라고 하는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블레인은 발끈해서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도 요즘 수도에서 나름 잘 나가는 기사입니다만.”

“너를 칭찬하고 싶지만, 유감스럽게도 내가 이걸 받아 버려서.”

공작 부인은 기다란 드레스 자락에서 작은 족자를 꺼내 블레인에게 획던졌다.

그것을 펼쳐 본 블레인과 엘레노어의 표정이 딱 굳었다.

그것은 엘레노어의 얼굴을 그야말로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초상화였다.

‘이미 알고 있었구나.’

정체는 처음부터 들킨 셈이다.

“네가 내 아들이랑 염문을 일으킨 여인과 눈이 맞았다는 건가?”

“모든 건 세간의 오해입니다. 리안이 잠시 끼어들긴 했지만, 우리의 사랑은 흔들린 적조차 없습니다.”

계속 애인설을 밀어붙이려 했지만, 공작 부인은 더욱 인상을 쓰기만 했다.

“그건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연극인가.”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쯧쯧. 말이 돼야지. 너와 사귀면서 내 아들을 보고 흔들린 적조차 없다니.”

아들을 극애하는 고슴도치 어머니라면 할 법한 말이지만, 블레인은 뼈를 맞은 표정이었다.

“됐으니 자리를 비워 주게.”

“저도 같이 있으면 안 됩니까?”

“너는 밖에서 기다렸다가 리안 오면 같이 놀도록 해.”

공작 부인의 마치 어린 애를 대하는 듯한 말투에 블레인이 발끈했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 저도 이제 스무 살입니다만.”

“흠, 벌써 그렇게 됐나.”

나름 용기를 낸 반항인 것 같았지만, 공작 부인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흠. 어디 자네의 열네 살 때 추억이라도 나눠 볼까? 아마 카랑스 백작의 파티였지. 자네가 처음으로 본 홍학에 놀라서 그만…….”

“나가겠습니다.”

더 버티고 있어도 과거만 털릴 뿐 할 수 있는 게 없어 보였다.

차라리 나가서 리안을 찾아 불러오는 게 나을 것이다.

‘부디 죽지 말아요.

당신이 죽으면 나도 리안에게 죽을 테니까.’

그런 눈빛을 보낸 뒤 블레인은 방을 떠났다.

*

‘살아남으면 꼭 카랑스 백작의 파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봐야지.”

공작 부인과 둘만 남게 되자 엘레노어가 떠올린 생각이었다.

목숨이 경각에 처했는데 거듭된 생명의 위협에 공포심이 무뎌진 건지 마음이 차분했다.

“당신이 내 아들과 화려하게 염문을 뿌리고 있는 소문 속 여인이로군.”

싸늘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

공작 부인으로부터 고위 귀족 특유의 위압적인 분위기가 뿜어져 나왔다.

“듣자 하니 평민 출신에 별 볼 일 없는 집안의 과부라고 하던데.”

일견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는 말이었으나 이미 사교계에서 온갖 풍파를 겪은 엘레노어는 내성이 강했다.

이 정도는 원래 시어머니인 도나테마리체 남작 부인이 하던 폭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 아들을 유혹해 하룻밤을 보내고 그 추문을 이용해 돈을 벌고 있다고 들었네. 거기에 태연하게 페이 드라 공작에게 옮겨 갔다지?”

다소 왜곡이 있었으나 엘레노어는 잠잠히 들어 넘겼다.

경험상 말대답을 하면 비난이 길어지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힐난하는 것으로 공작 부인의 차가운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왜 여기로 돌아온 거지?

다시 리안을 흔들려고? 아니면 이번에는 블레인도 유혹해 보려는 건가?”

여기까지 말하고서야 공작 부인의 말이 멎었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엘레노어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녀가 가까워지자 엘레노어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런 그대가 내 아들과 데네브의 밤을 보낸 거로군.”

데네브의 밤.

공작 부인이 알고 있었나.

내내 태연하던 엘레노어의 얼굴이 살짝 움찔했다.

“리안이 보낸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지. 표정을 보니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아는 모양인데.”

이제 공작 부인은 바로 지척에 있었다.

어둑어둑한 방 안에서 보랏빛 눈동자만 선명하게 보였다.

“그 애가 그렇게까지 했다면 네게 정말 진심이란 거야.”

공작 부인은 엘레노어를 지그시 응시하다 검지 끝으로 턱을 올렸다.

“여태껏 무뚝뚝하던 애인데. 당신에게서 대체 뭘 본 거지?”

그건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데.

공작 부인의 자문에 엘레노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모르는 뛰어난 성품인가? 아니면 이 예쁜 외모?”

첫 만남에서 바로 침실에 들어갔으니 인격이나 성품은 아니겠지.

뺨을 지나 턱을 쓰는 손길에 긴장한 엘레노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말이 없군.”

공작 부인은 눈썹을 올리더니 뻗었던 손을 거두었다.

“뭐라도 하는 게 좋을 텐데. 내가 당신을 어떻게 해야 할까?”

자문 같았지만, 공작 부인이 결론을 내리게 둘 수는 없었다.

이대로 입 다물고 있으면 내일 아침까지 목숨이 붙어 있을지 모르니까.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저를 보호해 주세요.”

“뭐라고?”

“보호해 주시면 백작님이 오시기 전에 이곳을 바로 떠나겠습니다.”

공작 부인은 이런 말이 나올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녀는 찌푸렸던 미간을 폈다가 다시 좁힌 후 입매를 오므리기를 반복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내 아들을 떠나는 건가?”

떠나고 자시고 딱히 리안과의 관계를 기대하고 온 게 아니었다.

엘레노어는 그냥 솔직하게 대답했다.

“제가 여기 온 건 갈 곳이 여기뿐이었기 때문이에요.”

“어째서?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온 수도가 자네를 파티에 모시려고 들썩인다던데.”

“.…환영 뒤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도 끝이 없으니까요.”

말한 뒤 엘레노어는 침대에 누워 있는 비앙카스타를 흘깃 보았다.

워낙 체구가 작고 방 안이 어두워서 공작 부인은 아직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안식을 찾긴 어렵겠지. 달콤한 꿀에는 벌이 모여드는 법이니까.”

“그게 살아남을 유일한 방법이라면 모든 걸 걸어 볼 수밖에요.”

만만치 않은 엘레노어의 대답에 공작 부인이 눈을 빛냈다.

“지금 나를 협박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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