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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33화 (33/120)

제33화

세 여자를 태운 마차가 호텔 앞에 도착했을 때는 온 사방이 어둠에 잠긴 후였다.

밝게 불이 밝혀져 있을 줄 알고 일부러 뒷문에 마차를 댔으나 호텔은 컴컴하니 어두웠다.

“이거 영업 중인 거 맞나요?”

그레이엄이 내부를 기웃거리며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겠네.”

이 커다란 호텔을 전부 대절하기라도 한 걸까?

들어가기 불안했지만, 지금은 리안을 믿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엘레노어는 나무 그늘에서 비앙카스타와 함께 내린 뒤 그레이엄에게 명령했다.

“적당히 마차를 달리다가 안전 가옥으로 가서 용병들과 함께 대기해.”

“네.”

일단 이곳에 있다가 추적을 따돌리고 나면 도성을 떠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엘레노어는 후문을 밀고 작은 불빛이 들어오는 연금술사의 배지를 찬 뒤 넓은 호텔 부지로 들어섰다.

한때 사람이 북적였을 아름다운 조경의 정원은 어둡고 텅 비어 있었다.

한참을 가로지르는 동안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왜 이렇게 넓은 거야.’

엘레노어의 숨이 점점 가빠졌다.

아무리 가볍다지만, 사람 하나를 업고 한 번에 주파하기엔 입구까지 거리가 멀었다.

끙끙거리던 엘레노어는 도중에 발견한 정자에 비앙카스타를 내려놓고 주저앉아 버렸다.

‘잠깐만 쉬자.’

그렇게 숨을 돌리고 있은 지 얼마가 지났을까.

슬슬 떠나기 위해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엘레노어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느 결에 나타났는지 바로 뒤에 남자가 서 있었다.

“역시 당신이었군요.”

“누, 누구세요?”

“그렇게 놀랄 거 없습니다.”

남자가 불빛 쪽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갸름한 얼굴선과 부드러운 갈색 곱슬머리.

파티에서 만난 적 있는 리안의 친구, 블레인이었다.

“리안이 자기가 없는 사이 당신을 보호하라 부탁했습니다. 호위가 당신이 이 호텔에 진입했다고 해서 연락을 받고 바로…..”

담담하게 말하던 블레인이 멈칫했다.

아마 그 호위라는 남자가 엘레노어의 몰골과 동행인에 대해서는 보고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피로 칠갑한 엘레노어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비앙카스타를 번갈아 보았다.

‘이건 오해의 소지가 있겠는데.”

온몸에 뒤집어쓴 피와 핏기 없이 쓰러진 가녀린 소녀.

세상에서 가장 의심 없는 사람이라도 연쇄 살인범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엘레노어가 필사적으로 변명을 떠올리는 사이 블레인이 떨떠름한 어조로 물었다.

“저… 소녀는 살아 있는 겁니까?”

“네. 아직은.”

황녀가 알게 되면 곧장 시체가 되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두기 곤란하니 안으로 좀 옮기고 싶은데요.”

“아, 그게, 정문으로 들어가는 건 곤란합니다만.”

“다른 손님이 있나요?”

“그렇습니다.”

컴컴해서 영업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손님이 있었나.

그렇다면 낭패다.

그러나 블레인의 입에서는 그것보다 더 최악의 상황이 흘러나왔다.

“지금 리안의 어머님이 와 계십니다만.….”

엘레노어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룩 흘렀다.

리안의 어머니라면 그 악명 높은 플로이드 공작 부인?

엘레노어는 너무나 당혹스러워 얼떨떨한 어조로 말했다.

“피 칠갑한 상태로 기절한 귀족 영애를 납치해 오기에는 좀 시기가 안좋네요.”

“네. 그런 거 같습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렸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는 유지하고 있던 냉정과 인사치레는 흔적도 없었다.

“으악!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아! 이제 어쩌면 좋죠!”

둘은 동시에 패닉 상태에 빠졌다.

블레인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엘레노어를 책망했다.

“타이밍이 안 좋다니. 피 칠갑한 상태로 귀족 영애를 납치해 오기 좋은 타이밍 따위가 있을 것 같습니까?”

“하지만 칼라브리아 백작님이 자유롭게 이용하라고 했다고요.”

“그렇다고 살인 은폐 장소로 쓰면 어떻게 합니까!”

“살인이라니 실례네요. 아직 안 죽었거든요? 그리고 자유롭게 써도 된다는 말은 용도를 제한하지 않는단 말 아닌가요?”

“자유도 자유 나름이지! 당신한테 자유란 말 가르쳐 준 게 누굽니까?

그 작자 교육 위원회에 제소할 겁니다!”

입씨름을 나누던 둘은 본관 건물의 방 하나에 불이 들어온 것을 보고 말을 멈췄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엘레노어가 황급히 블레인에게 요구했다.

“상황은 알았으니 마차나 하나 빌려줘요!”

“어딜 가려고 그럽니까?”

“어디든 내 목을 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없는 곳이요.”

“그런 곳은 수도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블레인이 단호하게 말한 뒤 눈을 가늘게 떴다.

“애초에 그런 모습으로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마차 타고 왔습니다만.”

“검문에 안 걸렸습니까? 바이스 후작 가문의 영애가 납치를 당했다고 수도가 발칵 뒤집혔..….”

말하다가 블레인이 또다시 표정을 굳혔다.

“설마… 이 아가씨……?”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들킬게 뻔했으므로 엘레노어는 조금 멋쩍게 웃었다.

블레인이 미소를 보고 잠시 누그러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정신이 돌아온 듯 펄쩍 뛰었다.

“대체 무슨 짓을 벌이고 다니는 겁니까! 한 달 동안 제국 최고 신랑감을 두 명이나 홀려서 뒤집어 놓은 거로는 화젯거리가 부족합니까?”

“그건 다 내가 피해자라고요!”

리안도 스카이도 일방적으로 찾아온 것이었다.

블레인은 이마를 짚고 한숨을 푹내쉰 뒤 말을 꺼냈다.

“일단 몰래 들어가서 당신 몰골을 좀 가다듬읍시다. 마음 약한 사람이 보고 심장 마비 일으키기 전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다른 손님은….”

“본관에는 공작 부인과 그 일행 정도밖에 없습니다. 뭐 이렇게 넓은데 설마 들키겠습니까? 재수가 더럽게 없지 않고서야.”

최근 재수 없는 방면으로는 제국 둘째가라면 서러운지라 불안했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둘은 비앙카스타를 둘러업고 거대한 본관을 빙 돌아서 후문으로 향했다.

“복도에서 직원과 마주치면 어쩌죠?”

뒷문 앞에 도달한 엘레노어는 낮은 목소리로 블레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럴 걱정은 없습니다. 내부는 지금 텅텅 비었으니까.”

“그럼 소문대로 영업은 중단된 건가요?”

블레인이 고개를 저었다.

“앞으로도 영업할 일 없을 겁니다.”

“왜요?”

“여긴 리안이 샀으니까.”

“네? 이 호텔을요?”

엘레노어는 놀란 눈으로 눈앞의 거대한 건물을 보았다.

“이야기가 기니까 듣고 놀라는 건 나중으로 좀 미뤄 둡시다.”

그러면서 블레인은 뒷문을 조용히 열었다.

문안에 들어서자 매캐한 공기가 코를 찔렀다.

“문 닫은 지 좀 돼서 건물 대부분이 먼지 소굴입니다. 메이드를 불러 새 방을 준비시킬 동안 일단 내 방으로 가서 거기 딸린 욕실을 사용하죠.”

블레인의 설명에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살금살금 계단을 올라가서 구석에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나자 잔뜩 날이 서 있던 긴장이 조금이나마 느슨해졌다.

“목욕하고 있으면 내가 적당히 옷을 준비해 오겠습니다.”

블레인이 나가고 엘레노어는 욕실로 들어섰다.

깨끗한 물로 찝찝한 몸을 씻고 나자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그러나 욕실에서 아무리 기다려도 블레인은 좀처럼 돌아오지 않았다.

빈집에서 여자 옷을 구하기가 만만 찮은 모양이었다.

기절한 비앙카스타를 너무 오래 혼자 둘 수 없었으므로 엘레노어는 타올을 감싼 채로 욕실을 나왔다.

‘뭐 입을 게 없을까.”

블레인의 방이라고 했으므로 옷가지가 전혀 없진 않을 것이다.

엘레노어는 방을 뒤져 적당히 블레인의 셔츠를 하나 꺼내 입었다.

체격 차이가 커서인지 셔츠는 거의원피스가 되었다.

허리에 적당히 숄을 두른 엘레노어는 비앙카스타를 돌보기 시작했다.

‘정말 안 깨어나네. 괜찮은 거 맞나?’

비앙카스타는 젖은 수건으로 뺨을 닦아도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창백하던 뺨에 핏기가 돌아오고 잠든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가득 안고 있던 부담을 내려놓은 듯한 얼굴.

어쩌면 지금 그간 꾸지 못했던 꿈들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엘레노어는 부드럽게 그녀의 바싹마른 피부를 닦아 주었다.

*

엘레노어가 한창 목욕하고 있을 즈음.

방 밖으로 나온 블레인은 메이드의 뒤에 어색하게 서 있었다.

야밤에 청년 귀족의 노크를 받고 깨어난 메이드의 발그레한 뺨은 빈 방을 청소해 달라는 말에 세상 가장 싸늘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하하. 원래 쓰던 방에 쥐가 나와서 말이야. 밤늦게 미안하게 됐네.”

“아뇨. 귀족 나리들께 이렇게 혹사당하는 게 제 일인걸요.”

메이드의 목소리는 정중했지만, 무척이나 냉랭했다.

아무래도 이곳에 머무는 동안 가래침이 첨가된 스튜를 먹게 될 가능성이 커 보였다.

“하하… 전에 ‘필란지 앤 미스우드’ 잡화점의 손수건이 가지고 싶다고 했나? 마침 내일 그쪽에 가는데.

하나 사다 줄까?”

“정말요?”

회유책에 메이드는 손쉽게 마음을 풀었다.

블레인은 비단 손수건이라는 적지 않은 출혈을 좀 더 알뜰히 이용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공작 부인은 주무시러 가셨나?”

“아뇨. 좀 전부터 호텔 안을 돌아다니고 계세요.”

“뭐? 이런 시간에? 멀리서 오시느라 피로하실 텐데 주무시지 않고.”

블레인의 당황한 목소리에 메이드가 답했다.

“쉬시기에는 주변이 흉흉한 것 같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경계를 강화하고 계세요.”

“경계를?”

“네. 담장과 정원에 부인의 근위병들을 배치하신다고 하셨어요. 수도의 콩나물들은 영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플로이드 공작가의 근위병은 북방출신 특유의 용맹하고 야성적인 면으로 유명했다.

내일 공작 부인 모르게 비앙카스타와 엘레노어를 밖으로 빼돌려야 하는 블레인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나쁜 소식이었다.

“게다가 기분도 나빠 보이셨어요.

저녁 내내 ‘그 여자를 빨리 찾아야 하는데.’, 라거나 ‘대체 어디로 증발한 거야. 찾기만 하면……….‘이라는 말을 중얼거리셨고요.”

공작 부인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렸다.

블레인은 제국 기사단장의 오른팔로서 황궁에서 근무하며 황족과 수많은 고위 귀족을 접했다.

그러나 그중에 누구도 플로이드 공작 부인만큼 그를 주눅 들게 하는 인물이 없었다.

‘찾으면 그 자리에서 목을 칠지도 모르겠군.’

공작 부인의 성미를 생각하면 있을 법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인데 리안 녀석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호위에 따르면 리안은 황제와 단독면담에 들어간 뒤 아직까지 소식이 없다고 했다.

덕택에 블레인만 죽을 맛이었다.

‘내가 올 때까지 무슨 수를 써서든 엘레노어를 보호해.’

리안이 그렇게 말했을 때는 엘레노어가 페이드라 공작의 별궁에 있었다.

그리 어렵지 않을 줄 알고 흔쾌히 수락했는데,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걸까.

한숨을 푹 내쉬며 휑한 표정으로서 있는 그를 메이드가 흔들었다.

“자작님?”

“어? 어?”

“이제 청소 끝났는데요.”

“아, 그래? 그럼 이제 도, 돌아가자.”

블레인이 함께 방을 나서자 메이드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어디 가세요? 이 방으로 옮긴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 아하하. 나는 내 베개가 아니면 잠을 못 자서… 전에 쓰던 방에 가서 좀 가져와야겠어.”

쥐에 이어 베개 타령까지 하다니.

네가 그러고도 기사.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블레인을 보는 메이드의 눈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원래도 그다지 좋지 못한 평가가 바닥을 친 게 확실했다.

그렇게 평판을 깎아 먹은 끝에 방을 준비시킨 블레인은 터덜터덜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어렵게 돌아온 그곳에서도 안식을 찾기는 어려웠다.

“으앗! 그, 그게 무슨 모습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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