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가뜩이나 창백한 비앙카스타의 얼굴이 긴장으로 바짝 움츠러들었다.
‘살인 미수범은 저쪽인데 내가 흉악범인 것 같네.’
처량한 모습에 자꾸 곤두세워야 할 경계심이 누그러졌다.
엘레노어는 마음 약한 자신을 향해 투덜거리며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리고 주춤거리는 비앙카스타를 향해 손을 척 내밀었다.
“내 손을 잡아 봐요.”
“네?”
“이상한 건 안 묻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비앙카스타는 선뜻 손을 잡지 못하고 엘레노어가 내민 손을 바라만 보았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 잡아요. 해치려는 게 아니라고요.”
일부러 날이 선 말투로 내뱉었다.
비앙카스타는 움찔한 뒤 덜덜 떨면서 손을 내밀었다.
아주 작고 마른 가지 같은 손을 잡자 정전기가 일어난 것처럼 찌릿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엘레노어는 방 안을 가르는 선명한 붉은 선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정말 주술에 걸렸다니.’
예상한 일이지만, 실제로 나타난 선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비현실적이었다.
그것은 비앙카스타의 몸으로부터 뻗어 나와 일직선으로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다.
다행히 그 방향에는 창문이 있었다.
“남작 부인?”
엘레노어가 확인을 위해 손을 당기자 비앙카스타는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이쪽으로 와요.”
비앙카스타는 꼼짝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그녀를 강압적으로 몰아 붙이는 대신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었다.
아직 진실은 아무것도 확실히 드러난 게 없지만, 적어도 그녀가 피해자일 가능성이 커졌다.
엘레노어는 비앙카스타에게로 몸을 굽혀 눈을 마주쳤다.
“어쩌면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담담하고 사무적인 말투였으나 그 말이 일으킨 파장은 컸다.
많은 이에게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게 생업인 엘레노어도 이런 표정은 처음 보았다.
비앙카스타의 녹색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하지만 저, 저는… 나, 남작 부인의 잔에 약을…….”
“알아요. 그게 당신의 뜻이 아니었다는 것도.”
죄책감 가득한 목소리를 내던 비앙카스타는 말문을 잃은 듯 입술만 떨었다.
그녀는 마치 붕괴한 동굴에 갇혀 열흘째에 한줄기 내려온 밧줄을 발견한 것처럼 엘레노어의 손을 꼭 쥐었다.
“당신도 나를 도울 수 있겠어요?”
비앙카스타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나를 잡고 일어서요.”
엘레노어는 쇠약해진 그녀를 부축해서 함께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열자 탁 트인 전망이 펼쳐졌다.
시원스러운 대리석 광장 너머로 드높이 솟은 거대한 황궁.
그러나 엘레노어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모든 방문객을 감탄시키는 멋진 전망보다 그곳을 똑바로 향해 가는 붉은 선이었다.
엘레노어가 가장 의심하는 두 사람도 그곳에 있었다.
“비앙카스타.”
엘레노어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비앙카스타에게 질문했다.
“나를 해치라고 당신에게 사주한 사람은 스카이 페이드라 공작인가요?
비앙카스타는 슬픈 눈을 하더니 힘을 주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또렷한 대답에 마음이 놓이는 한편으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렇다면 남은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그러면 나를 죽이려는 건 황녀인가요?
이번 질문에 비앙카스타는 대답하를 끌어안았다.
품에 안긴 몸은 바싹 말라서 뼈밖에 남지 않았다.
그간 얼마나 깊은 마음고생을 했는지 여실히 전해지는 몸이었다.
“저, 저는.”
비앙카스타는 펑펑 울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지, 지금 죽어도 좋을 거 같아요.”
아무에게도 전할 수 없었던 진실을 누군가 알아준 것이 무척 기쁜듯했다.
이곳에 있는 한 황녀는 언제든 비앙카스타를 지배할 수 있었다.
후작가에 진실을 전한다 해도 하녀가 비앙카스타를 대하는 태도를 볼 때 믿어 줄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후작가에서 과연 황녀에게 맞서 그녀를 지켜 줄지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저, 저 같은 건 남작 부인의 짐이 될 거예요.”
자존감의 실낱도 찾아볼 수 없는 말이었다.
엘레노어는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을 쓸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내게도 당신이 필요해요.”
단순한 동정만이 아니었다.
귀족이 하는 일에는 명분이 필요한법.
비앙카스타는 황녀가 쓴 가면의 증거였다.
엘레노어가 황녀에게 맞설 이유를 정당화시켜 줄 수 있었다.
“비앙카스타. 황녀가 당신을 감시하고 있나요?”
“아마 그럴 거예요.”
같이 나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황녀에게 보고가 들어간단 뜻이었다.
변장하고 왔으니 벌써 정체를 들키지는 않았을 테지만, 어차피 엘레노어라는 걸 알아채는 건 시간문제일 것이다.
엘레노어는 잠시 생각한 후 입을 열었다.
“만일을 대비해서 내가 당신을 납치한 것으로 하죠.”
태연하게 말한 뒤 엘레노어는 비앙카스타의 몸을 휙 돌렸다.
“자, 그럼. 실례할게요.”
어리둥절해하는 비앙카스타의 목덜미를 그대로 후려쳤다.
연약한 몸은 한 방에 허물어지듯 바닥으로 쓰러져 버렸다.
‘만일을 대비해서 호신술을 배워 두길 잘했네.’
엘레노어는 쓰러진 비앙카스타를 내려다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실제로 해 본 적도 없는데 한 방에 이렇게 잘될 줄은 몰랐다.
스스로의 솜씨에 감탄하는 한편 뒤 늦게 고려하지 않은 부분이 떠올랐다.
‘나가는 길을 좀 물어보고 기절시킬 걸 그랬나.’
뭐 어차피 비앙카스타가 평소 남들 눈을 피해 집을 빠져나가는 성격으론 보이지 않았다.
후작 영애 방에 비밀 통로나 개구멍이 있진 않을 테니 큰 도움은 안될 것이다.
‘일단 나가 보자.’
비앙카스타의 방은 본관이 아닌 별관 탑 위에 있었다.
들어올 때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으니 운이 좋으면 나갈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걸 행운에 의존하는 몹시 위험한 계획이었지만, 시간을 끄는 것보다는 나을 듯했다.
엘레노어는 비앙카스타의 잠옷 위에 대강 외투를 입힌 뒤 등에 둘러 업고 과감하게 방을 나섰다. 키가 작은 데다 뼈밖에 남지 않아 어린애만 끔뻑이고 있었다.
“그레이엄. 일단 은신처로 가자.”
추적은 그녀가 저택 앞에서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시작되지 않았다.
미리 준비한 은신처로 가서 부인용 마차로 갈아탄 후 도성을 빙글빙글돌며 엘레노어는 고심에 잠겼다.
‘이제 어디로 가지..’
미리 그레이엄에게 준비시킨 용병들과 안전 가옥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안전 가옥은 평민 출신남작 부인인 자신이 겨우 며칠 수소문해서 알아낼 수 있는 장소다.
게다가 지금 아마 스카이가 붙인 미행도 있을 것이다.
앞으로 그녀가 맞서야 하는 강대한 적을 생각하면 미행도 따돌리고 몸을 숨길 수 있는 더욱 확실한 은신 처가 필요했다.
‘위기니까 이용할 수 있는 건 전부 이용해야 해.’
엘레노어에게는 당장 피 칠갑을 하고 찾아가도 며칠 숨겨 줄 정도의 인맥은 수두룩했다.
그러나 어설프게 선택했다가는 엘레노어 남작 부인에서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라고 불리던 시체가 되는데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페이드라 공작에게는 갈 수 없어.’
스카이에 대한 의심은 풀린 셈이지만, 여전히 그가 자신을 곁에 두는 이유가 불분명했다.
그의 속내를 모르는 이상 위태로운 상황에서 몸을 의탁할 수는 없었다.
믿을 수 있고, 지켜 줄 힘이 있고, 무엇보다 절대 나를 해치지 않을 것 같은 사람.
그렇게 좁히자 떠오르는 건 단 한 사람뿐이었다.
‘리안.’
만일을 대비해 그가 전달한 열쇠는 품에 간직하고 있었다.
부를 때까지 오지 않겠다고 한 데다 그가 준비한 장소라면 허술하지 않게 방비도 되어 있을 테니 무엇보다 적합했다.
심경이 여러 가지 복잡했지만, 이미 이것저것 따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길거리를 순찰하는 경비대를 마주치는 빈도가 늘고 있었다.
귀부인의 마차로 위장해서 검문에 걸리진 않았지만, 계속 지체하면 붙잡히지 말란 보장도 없었다.
“그레이엄, 샨카른 호텔로.”
엘레노어는 침착하게 명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