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반대하다니!’
미나즈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혹시 색을 잘못 본 거 아냐?’
당사자인 부인은 너무나도 평온해서 의심의 여지가 충분했다.
진 스카이에게 쏠렸다.
“과반이 넘었으니 더 이상의 표결은 의미가 없겠군요.”
관망하고 있던 스카이가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차피 다수결이 중요한 표결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핵심을 찌르는 말이었다.
가장 중요한 표가 던져진 후 표결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를 증명하듯 황제의 시선은 오로지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공작 부인. 그게 그대의 의견인가?”
황제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지엄하게 물었다.
그 날이 선 긴장감 속에서도 플로 이드 공작 부인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처음으로 듣는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음성은 묘한 힘이 서려 있었다.
“오랜 기간 아들과 떨어져 어미 노릇도 제대로 못 했습니다. 혼인이라도 제 아들을 먼저 만나 논의하게 해 주십시오.”
정중하지만 위엄 있는 말투.
그것을 들으며 미나즈는 언젠가 선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는 그렇게 괄괄하게 말하지만, 막상 그 사람 앞에 가면 아무 말도 못 할 거다. 세상에는 막을 수 없는 사람이 있는 법이니까.’
왜 두 가문의 결혼을 방관했냐는 추궁에 부친은 그렇게 답했었다.
그런 게 어딨느냐고 당시에는 코웃음을 쳤는데 직접 만나 보니 역시 황제는 내뱉듯 말하고는 회합장을 떠났다.
황제가 사라지자 플로이드 공작 부인도 표연히 몸을 일으켰다.
“당신 제정신이오?”
칼라브리아 공작이 그녀에게 다가가 고함을 질렀다.
“그토록 황녀를 애지중지하더니 대체 이게 무슨 장난이오! 이미 당신이 북방으로 떠났을 때 합의했던 일일 텐데!”
“굳이 불러내서 묻기에 의견을 밝혔을 뿐인데요.”
“뭐가 어째? 이건…….”
“입 다물어요.”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날카로운 말에 칼라브리아 공작의 입이 멈췄다.
“잘 들어요. 내가 없는 데서 뭘 마음대로 하건 나는 상관하지 않아요.
그런데 감히, 나를 불러내서 존중하는 척하며 허수아비로 만들 수는 없어요.”
“그럼 당신은 우리 아들을 사지로 보내겠다는 거요?”
“나는 리안을 만나겠다고 말했을 뿐이에요.”
공작 부인은 굳어 버린 남편을 경멸하듯 바라보며 말을 뱉었다.
“당신에게도 뭔가 지킬 게 남았다.
면 체면이라도 챙겨요.”
거기까지 말하고 공작 부인은 획돌아서 버렸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미나즈는 황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가며 물었다.
“공작 부인! 의논드릴 일이 있는데라 플로이드로 찾아가도 될까요?”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거절할까 봐 긴장했는데 담담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나는 도성에 머물 겁니다. 에이브로트 경.”
“그럼 거처를 알 수 있을까요?”
“당장은 만날 사람이 있어 바쁘니 장소를 정하면 연락하지요.”
만날 사람?
미나즈는 조심스러운 태도로 물었다.
“혹시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을까요?”
공작 부인의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
뻣뻣이 굳은 미나즈를 보며 공작부인이 다시 물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나요?”
질문하는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눈빛은 사냥감을 노리는 매를 닮아 있었다.
그것을 정면으로 받은 미나즈의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왜 만나려는 거지.’
사실 공작 부인의 눈빛을 보면 추측이 무의미했다.
이대로 그녀를 보내면 곧 엘레노어 남작 부인의 부고로 다시 한번 수도가 발칵 뒤집힐 게 뻔해 보였다.
‘벌써 죽어서는 곤란한데.’
남작 부인은 미나즈에게 있어 간신히 찾아온 변수였다.
이용할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이 날 때까지는 살아 있는 게 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가 어디 있는지 온 세상이 다 아는데 감추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녀의 거취에 관해서라면 페이드라 공작에게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미나즈는 그냥 발을 빼기로 했다.
‘그 유능한 남자가 알아서 잘 지켜주겠지.’
리안의 허를 찔러 모처럼 손에 넣은 것을 놓치고 싶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페이드라 공작?”
공작 부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그 소문이 정말인 모양이군.”
전국의 유통망을 꽉 쥐고 있는 부인답게 머나먼 북방에 틀어박혀 있으면서도 페이드라 공작과 엘레노어 남작 부인의 염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본인에게 직접 물으시지요.”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고개를 끄덕인 뒤 이내 회합장을 떠나 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미나즈의 귀에 불만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당신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겁니까?”
미나즈는 클로드의 잔뜩 찌푸린 표정을 보고 입술을 비죽였다.
“왜 화를 내는 거야? 뜻대로 잘 해결됐는데.”
“잘 해결되긴 뭐가 잘 해결됐습니까? 이래 봤자 어차피 서약에 걸렸다면 아무 소용도 없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반대하지 그랬어?”
미나즈의 물음에 클로드는 말문을 잃은 듯 잔뜩 인상을 썼다.
다가온 보르미아 공작이 빙긋이 웃으며 불만스러운 얼굴의 클로드를 바라보았다.
“성정이 곧으시니 실패하더라도 옳지 않은 일은 못 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클로드가 뭐라 받아치려 했으나 미나즈의 주의는 다른 곳으로 돌아가버렸다.
“어? 저기!”
“칼라브리아 백작이군요.”
리안이 에오가이노스로 들어서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그새 가 버린 모양이었다.
가서 리안에게 공작 부인이 엘레노어 남작 부인을 찾고 있다고 알릴까했지만, 체펠린이 다가가는 게 더 빨랐다.
“황제 폐하께서 기사단장님을 찾으십니다.”
리안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은 어두운 표정으로 체펠린과 함께 사라지는 리안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똑, 똑.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워 있던 비앙카스타는 노크 소리를 들었다.
하도 악몽에 시달린 탓에 지금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 있는 게 현실인지 아니면 환각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아가씨. 손님이 찾아왔어요.”
퉁명스러운 메이드의 목소리가 이 내 현실임을 알려 주었다.
비앙카스타가 대답하지 않자 곧 문이 벌컥 열렸다.
“언제까지 누워 계실 거예요? 손님이 오셨다고요.”
“지금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힘없는 목소리로 답하자 메이드가 짜증 섞인 답을 돌려주었다.
“하지만 상대가 막무가내라고요.
좀 일어나 보세요.”
비앙카스타를 대하는 메이드의 태도야말로 막무가내였다.
온 제국에서 따돌림을 당하며 후작부부마저 외면하는 소녀는 집에서조차 영애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와 누워 있는 비앙카스타의 이불을 걷었다.
“좀 보세요. 이걸 아가씨께 전해주라고 하셨어요.”
메이드는 황녀가 아니면 비앙카스타의 손님에게도 그다지 공손하지 않았다.
귀찮다며 내쫓지 않고 비앙카스타에게 알리러 온 걸 보면 상대방이 아무래도 제법 두둑한 돈을 몰래 찔러 준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아마 순순히 물러가지 않을 것이다.
빨리 그녀를 내보내기 위해 비앙카스타는 할 수 없이 몸을 일으켰다.
“밖에 온 게 누구예요?”
“모르겠어요. 전해 준 걸 보면 알거라던데요.”
메이드가 내민 것을 본 비앙카스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은 붉은 가죽 표지의 책이었다.
[악녀의 비밀]
제목 아래에는 저자 엘레노어 남작부인의 이름과 함께 서명이 적혀 있었다.
“뭐라고 전할까요?”
메이드는 빨리 나가고 싶은 듯 창백해진 비앙카스타를 재촉했다.
*
엘레노어는 마차에 앉은 채 자꾸 흘러내리는 안경을 손가락으로 치켜 올렸다.
그녀는 현재 싸구려 금발 가발을 쓰고 알도 없는 안경을 쓴 데다 지독할 정도로 진한 향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누가 보든 우아하고 세련된 사교계의 귀부인이 아니라 삶에 찌든 거리의 여자라 생각할 것이다.
변장할 거리를 준비해 오라는 말에 그레이엄이 충실하게 따른 결과였다.
“영애께서 안으로 들어오라 하십니다.”
“아까는 일어나지 못할 만큼 아프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가 뭐 어떻게든 일으켜서 설득했죠.”
메이드는 자신의 수완을 자랑하듯 으스대며 손을 내밀었다.
“가기 전에 약속한 돈을 먼저 주세요.”
엘레노어는 묵묵히 10골드 금화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쁜 듯 주머니에 밀어 넣는 그녀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아파서 드러누워 있는 영애에게 수상하기 짝이 없는 여인을 손님으로 맞게 하다니.
‘후작 가문의 메이드가 겨우 10골드에 충성심을 팔아먹는군.
아니, 충성심 따위는 본래 없었던게 맞겠지.
비앙카스타가 집에서 제대로 된 영애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소문이 사실인 듯했다.
소문난 악녀란 건 명예를 아는 가문에서는 수치인 것이다.
“저를 따라오세요.”
엘레노어는 곧 어두침침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실내 장식은 제법 귀족 영애에게 걸맞은 값비싼 것이었으나 오랫동안 창문을 열지 않았는지 방 안의 공기는 탁하고 무거웠다.
음침한 방 한가운데를 차지한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크고 호화로운 침대.
그 위에서 방의 주인이 겁에 질린 눈을 한 채 엘레노어를 응시하고 있었다.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네요.”
엘레노어가 코끝을 살짝 치켜들며 입을 열었다.
“하긴 죽이려고 했던 상대가 찾아오면 그런 얼굴이 되는 게 당연하죠.”
엘레노어의 싸늘한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