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약혼이 발표되겠군요. 예상보다는 늦어졌지만, 아무런 변수도 없습니다.”
클로드의 말을 들으며 미나즈는 맞은 편 황녀 궁의 테라스로 시선을 던졌다.
소녀들 틈에서 황녀는 천사처럼 아름답게 웃고 있었다.
저 소녀는 곧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강인한 인형을 손에 넣게 될 것이다.
“아니.”
미나즈는 고집스럽게 중얼거렸다.
“나는 아직 변수를 믿어.”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흐름이 뭔가로 인해 움직이고 있었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하던 계획에 간신히 생긴 균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있다면 미나 즈는 그것을 어떻게든 흔들어 볼 생각이었다.
클로드는 그런 그녀에게 두고 보자는 표정을 지은 뒤 자리로 돌아갔다.
곧 회합장의 문이 열렸다.
“황제 폐하께서 들어오십니다.”
체펠린 궁정백의 진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
별궁을 나서던 엘레노어의 발걸음은 방해를 받았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스카이가 집사라고 소개한 노인이 나중을 위해서라도 거짓말을 하기 보다는 적당히 모호하게 얼버무리는 게 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 여유가 없었으므로 엘레노어는 지루한 문답을 빨리 끝내고 싶었다.
“칼라브리아 백작님을 만나러 가는 건 아니잖아요. 비켜 줘요.”
스카이의 집사라면 리안이 지금쯤 공작가의 회합을 위해 황궁에 있다.
는 것을 알 터였다.
집사가 노인 특유의 색이 옅은 눈을 끔벅이더니 다시 물었다.
“언제 돌아오실 겁니까?”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엘레노어는 고개를 저은 뒤 빠르게 덧붙였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공작 전하는 아실 거예요. 그러니 그냥 보내 주세요.”
그간 지켜본 스카이의 성격상 미행을 준비해 두었을 것이다.
집사는 인정하듯 천천히 앞에서 비켜났다.
“마차를 준비시킬까요?”
눈이 마주치자 스카이 페이드라는 씩 웃어 보였다.
‘요망한 남자군.’
별 뜻은 없겠지만, 머리가 좋은 남자이니 자기가 그런 식으로 하면 여자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분명 알고 있을 것이다.
어지간히 거물을 상대하는데 잔뼈가 굵은 미나즈마저도 그의 미소에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들켰는데 계속 쳐다보기도 민망해서 미나즈는 다시 낭독에 집중했다.
미나즈가 하품을 참는 것에 한계를 느낄 무렵 드디어 기다리던 본론이 시작되었다.
“금일의 안건은 바로 제국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논의입니다.”
“제국에는 오랫동안 미뤄 온 의무가 있습니다. 바로 하크메르시아 토벌 건입니다.”
난데없는 안건에 공작들의 표정이 동시에 움찔했다.
‘갑자기 웬 하크메르시아?’
하크메르시아는 제국 남부에 서식하는 희귀 마수로 어지간한 건물보다 훨씬 거대한 체격과 극도로 발달한 철갑 같은 비늘, 맹독이 서린 날카로운 손톱과 이빨을 지녔다.
무척 위험하고 마을을 공격하기도 했으므로 토벌해야 마땅했지만, 굳이 국가적으로 나서지 않은 것은 지능을 가진 마수라 타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번쩍이는 것을 좋아했으므로 적당량의 보물과 가축 등을 바치면 인간을 괴롭히는 일이 없었다.
“최근 제국이 안팎으로 시끄럽습니다. 이런 시기에 마수가 출몰하면 흉흉하니 황제 폐하께서는 토벌을 원하고 계십니다.”
치적을 쌓고 싶다면 그러면 될 일이다.
이게 공작들을 전부 모아 놓고 긴 급히 회합할 정도의 안건인가?
미나즈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이 옆에서 클로드가 입을 열었다.
“하크메르시아는 정해진 개체 수 이상으로 늘지 않습니다. 지출하는 제 물의 양이 적지는 않으나 피를 흘리지 않는 대가라면 괜찮지 않습니까?”
“쉽게 토벌할 수 있다면 선대에서 미리 처리했겠지요. 하크메르시아는 무척 빨라서 대군으로 포위할 수도 없고 검이나 활도 통하지 않습니다.”
보르미아 공작도 한마디 거들고 나서자 체펠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과거 토벌된 기록을 보면 하크메르시아는 대군보다 소수의 뛰어난 기사가 대적하기 쉽다고 합니다. 마침 제국 역사상 최고의 재능을 지녔다 칭해지는 기사단장님이 있으시니 적기가 아니겠습니까?”
미나즈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예상치 못한 위력에 사망하지 말란 법이 없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최고 가문의 뛰어난 인재를 필요하지도 않은 사지에 몰아넣다니.
누구도 동의하지 않을 이상한 회합이었다.
“제국의 중임을 맡은 칼라브리아백작에게 그런 위험한 임무를 굳이 시킬 필요가 있습니까?”
“백작께서는 고통받는 백성들을 위해 기꺼이 나서 주실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야 리안의 성격상 싸우다 죽을지언정 무섭다고 회피하지는 않겠지.
그러나 공작들의 반응은 모두 좋지 않았다.
“다만, 모두가 아시다시피 칼라브리아 백작께서는 제국의 부마로서 오랫동안 물망에 오른 인물입니다.
황녀 전하께서는 이번 생일을 맞아 성년이 되셨지요.”
체펠린 궁정백이 말을 멈추고 한번 헛기침을 했다.
“두 분이 이른 시일에 성혼한다면 그것이 하크메르시아를 토벌하는 것보다 제국의 안정에 더욱 도움이 될 거라는 것이 폐하의 의견이십니다.”
설마 이렇게 조잡한 수까지 쓰다니.
미나즈는 속으로 탄식했다.
갑자기 일어난 과부와의 염문에 마음이 조급하다고 해도 이건 너무 허접했다.
수년간 제국을 빈틈없이 통치한 황제가 아닌 유치하고 단순한, 어린애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다.
‘황녀인가.’
황녀를 사랑하게 된 이후 그토록 영민하던 황제가 의아한 판단을 내리는 일이 잦아졌다.
부정에 마음이 쏠려 정국을 보는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중대 안건이니만큼 공작가의 동의를 얻어 결정하려고 합니다. 공작가의 모든 분을 모셨습니다만, 편의상공작 작위 이상을 가진 분들로 표결을 진행하려 합니다.”
미나즈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아서, 미나즈, 로우앤이 미혼이고, 페이드라 가문은 두 사람 모두 공작 이상이며 칼라브리아와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부부이니 사실상 공작가의 직계 중 공작이 아닌 것은 리안뿐이었다.
이렇게 되면 선별이 아니라 의도적인 배제였다.
그를 배제하고 진행할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리안은 역시 황녀에게 청혼할 마음이 없는 거구나.’
설령 염문이 끝났다고 하더라도 황녀와 결혼할 마음이 없는 거다.
그래서 리안의 양친을 불러들여 그에게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려는 것이다.
“정확히 우리가 표결하는 사항이 무엇입니까?”
보르미아 공작이 평소처럼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하크메르시아 토벌을 진행할지, 이번 출몰은 무시하고 본격적인 결혼 준비에 박차를 가할지에 관한 표결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이것보다는 세련되게 진행할 수 있을 텐데.
너무나도 즉물적인 행태에 미나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칼라브리아 백작은 아직 황녀 전하와 약혼한 상태가 아닐 텐데요.
다른 여인과 결혼할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표결을 진행합니까?”
“황녀 전하와의 결혼이 아니면 국가의 중대사와 무관하므로 토벌은 그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말하는 체펠린도 머쓱한 듯 시선을 떨어뜨린 상태였다.
‘사지로 보낼 건지, 아니면 황녀와 결혼시킬 건지 택하라 이건가?’
공작들과 부모, 황가까지 뭉치게 한 다음 목숨을 미끼로 리안을 압박할 셈인 것이다.
너무 치사해서 한마디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다.
“제국의 귀족들은 배우자를 정할 권리가 있을 텐데요. 아무리 국가의 대사라고 해도 당사자를 배제하고 표결로 정한다는 건 이상하지 않나요?”
미나즈의 말을 칼라브리아 공작이 거칠게 받아쳤다.
“당신은 항상 반대만 하고 나서는군, 폐하께서 정하신 일인데 잠자코 따르게.”
평소보다 까칠한 태도를 볼 때 별거 중인 부인의 등장이 몹시 신경에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미나즈는 그딴 사정은 안중에 없었다.
곧장 무례한 말을 받아치려고 했으나 황제가 직접 입을 열어 언쟁을 종료시켰다.
“표결 후 칼라브리아 백작과는 양 친과 함께 내가 직접 얘기하겠네.
받아들일지 말지는 그의 선택이야.”
황제가 직접 부모까지 데려가서 압력을 넣는데 무슨 선택권이 있다는 거야.
그런 미나즈의 불만과 상관없이 표결이 시작되었다.
체팰린이 회합장을 돌며 공작들에게 각각 백옥과 홍옥을 나눠 주었다.
“칼라브리아 백작과 황녀의 결혼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은 백옥을, 반대하는 사람은 홍옥을 앞으로 밀게.”
황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칼라브리아 공작이 백옥을 밀었다.
반대하기 힘든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것이다.
‘그런 허술한 수작에 넘어갈 사람이….’
미나즈의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옥이 하나 가운데로 날아왔다.
‘있었군.’
미나즈는 지루한 얼굴의 로베르 페이드라 대공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충 찬성하고 지루한 회의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되면 곤란한데.’
스카이는 엘레노어 남작 부인을 애인으로 삼았을 정도니 찬성할 가능성이 컸다.
그러나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남자니 대세가 넘어오면 다른 결정을 할지도 모른다.
‘이쪽 셋이라도 우선 반대를….’
작은 희망이라도 걸어보고자 옆을 그가 이쪽을 보자 미나즈는 그에게만 보이도록 한 손을 든 채 입 모양으로 말했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어차피 반대하지 못할 거라면 이게 낫죠.’
딱 부러지는 발음만큼 입 모양도 깔끔해서 읽기 쉬웠다.
‘아니면 당신이 먼저 반대할 겁니까?’
확실히 황제가 나선 상황에서 내놓고 가장 먼저 반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추후 보복의 포화를 맞게 될 가능성이 컸다.
‘어쩌지.’
이긴다면 모를까, 어차피 질 게 뻔한 표결 때문에 정치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나.
미나즈가 홍옥과 백옥을 손에 쥔 채 망설이고 있을 때였다.
툭.
처음으로 탁자 중앙에 홍옥이 떨어졌다.
정적 속에 모든 이의 시선이 그것을 내민 사람에게로 쏠렸다.
“당신, 무슨 짓이오?”
침묵을 깬 것은 칼라브리아 공작의 분노에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는 얼굴을 꿈틀거리며 홍옥의 주인인 플로이드 공작 부인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