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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29화 (29/120)

제29화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이마 위로 부드러운 은발이 한 가닥 드리워졌다.

클로드 로우앤 공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새카만 대리석 원탁 위에 얹어져 있던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다.

한 치의 어긋남 없는 그의 몸가짐은 결코 원칙을 벗어나지 않는 그의 성정의 표상이었다.

마침 들어서고 있던 미나즈 에이브로트 공작이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녕, 클로드, 일찍 왔네.”

클로드는 함께 도착한 아서 보르미아 공작에게만 인사를 했을 뿐 미나 즈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간 우리랑 놀아 주지도 않고 뭐했어?”

“바빴습니다.”

뻣뻣한 클로드의 대답에 미나즈가 입술을 비죽였다.

“뭘 하느라 그리 바쁜데?”

미나즈는 냉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클로드 곁에 앉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춤 연습은 확실히 아닐 텐데 말이지.”

연회 첫날 황녀를 상대로 팔과 다리가 함께 나가는 춤을 선보였던 클로드는 얼굴을 좀 붉혔다.

귀여운 녀석. 무뚝뚝한 척하려고 해도 금방 속을 들켜 버린다.

미나즈는 어렸을 때 클로드를 업고 다닌 기억이 생생해서 다 자란 지금도 여전히 그때의 예민한 소년처럼 느껴졌다.

“우리뿐인가? 다른 사람들은?”

“우리뿐입니다.”

보르미아 공작이 말을 덧붙였다.

“오는 길에 칼라브리아 공작을 봤습니다. 체펠린 궁정백을 붙잡고 역정을 내고 있더군요.”

“네? 어째서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사람이 일없이 다른 사람을 볶는 게 하루 이틀입니까?”

클로드가 슬쩍 끼어들어 칼라브리 아 공작의 험담을 했다.

“그럼 리안은요? 함께 있었나요?”

“네. 수심에 잠긴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수려한 모습이었습니다.”

“아아. 수도에 있는 동안 그 잘생긴 얼굴을 꼭 보고 가야 하는데 말이죠.”

미나즈의 말에 클로드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냉정한 주제에 왜 리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걸까.

보르미아 공작이 쿡쿡 웃으며 말했다.

“황녀 전하께서 그토록 연모하는 게 이해가 되지요. 그 고고한 얼굴을 보고 있으면 최근의 염문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건 그 여자가 자신의 가치를 올리려고 퍼뜨린 헛소문일 겁니다. 칼라브리아 백작은 선을 아는 남자니까요.”

완고한 클로드의 말에 미나즈가 헛웃음을 지었다.

“대체 언제부터 자유연애가 선을 넘는 행동이었지?”

“보통은 아니지만, 평생 제국의 미래 부마로 살아온 사람에게는 그렇습니다.”

클로드가 무뚝뚝하게 딱 잘라 말했다.

“그 지긋지긋한 염문 이야기는 우리끼리라도 안 하면 안 됩니까? 전부 끝난 일인데.”

“안 끝났을 수도 있잖아? 가능성있으면 희망이라도 걸어 보는 거지.”

“희망?”

클로드의 반문에 미나즈는 턱 끝을 치켜들며 도발적으로 말했다.

“솔직히 황녀와의 결혼이 깨져서 우리에게 나쁠 것은 없잖아.”

다른 두 공작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당황해서 주변을 살피는 둘을 보고 미나즈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도 없는데 뭘 그렇게 긴장해?

얼굴들 풀어요.”

“지금, 지금… 여기가 그런 얘기를 하기에 적합한 장소라고 생각합니까?”

“그럼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를 하려고 비밀 모임이라도 해?”

클로드가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으나 미나즈는 거침없이 말했다.

“차라리 여기가 안전하지. 우리끼리 몰려다니다 심기를 거스르면 안되니까 말이야.”

“우리가 만나는 걸 누가 견제라도 한다는 겁니까?”

“그야 안 하겠지. 알아서 눈치 봐야 하는 신세인데. 대륙 최고의 부와 최강의 검의 결합이라니. 반칙이라고, 상대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미나즈는 접착제를 삼킨 것처럼 입을 딱 다물고 있는 두 사람을 노려보았다.

“그런 얘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우리 선대도 너처럼 조용히 있었겠지. 그런 바보 같은 묵인 때문이 우린 밀려난 거라고, 클로드.”

클로드가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딱 다물었다.

제국의 부를 거머쥔 북부의 플로이 드 공작가.

제국의 검으로서 황가를 수호하는 중앙의 칼라브리아 공작가.

넓은 제국을 행정으로 통치하는 남부의 보르미아 공작가.

제국의 토대이자 심장, 법을 다스리는 동부의 로우앤 공작가.

그리고 미나즈는 제국에 도전하는 국가가 없도록 세계를 조율하는 감시자로서 외교를 담당하는 에이브로 트 공작가의 수장이었다.

다섯 개의 권력을 나눠 가진 공작가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균형을 유지해 왔다.

공고함에 방심한 틈을 타 그것이 무너진 게 미나즈는 불만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만약 자신이 수장이었다면 칼라브리아 공작가와 플로이드 공작가가 결합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는 막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성인이 되고 사리 분별을 하게 됐을 때는 이미 리안이라는 존재가 탄생한 후였다.

뒤늦게 남은 공작가가 연합한다 해도 부와 무의 결합에는 대적할 수 없다.

“네가 그렇게 칼라브리아 백작을 찬양해 봤자, 그가 황가와 결합하면 우린 허수아비 신세가 될 거야. 네가 가짜 공작이라고 부르는 페이드라보다도 힘이 없어질걸.”

잠시 잠잠하던 클로드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요? 이 대화가 한탄 말고 다른 의미가 있는 겁니까?”

“뭔가 해 볼 수도 있겠지. 부모가기회를 놓쳤다고 해서 우리도 그래야 할 필요는 없잖아.”

“우린 황가를 위해 존재하는 겁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해서도 안 되고요.”

“왜 안 돼? 우리는 황제의 검 아래 모인 봉신이지 황제의 부속품이 아니야.”

미나즈의 말을 클로드는 부정하지 못했다.

그것이 제국의 이념이었으니까.

봉신은 원칙적으로 자신이 섬길 주군을 자유롭게 정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럼 황제 폐하께 반기를 들겠다.

는 겁니까?”

“그렇게 거창한 게 아니야. 리안이 황녀와 같은 마음이라면 말릴 방법이 없지. 하지만 그 남자가 흔들린 이상 황녀랑 맺어지지 않을 명분은 생긴 셈이잖아.”

공작들이 대놓고 반대는 못 해도 막대한 권력을 가지게 될 당사자인 리안의 의견에 힘을 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클로드는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칼라브리아 백작의 의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을 텐데요. 그 남자는 본인 생각대로 움직이진 못할 테니까.”

여유롭던 미나즈의 표정이 움찔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의 명예를 위해 그의 인생이 자기 의지에 따른 거라고 말해 주고 싶은 것뿐이지요.”

클로드는 늘 냉정한 그답지 않게 고조된 목소리였다.

“너는 ‘서약’의 소문을 믿는 거야?”

미나즈가 소리 낮춰 묻자 클로드는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황제 폐하께서 아무 안전장치도 없이 칼라브리아 공작만 믿고 그런 중대한 일을 추진하진 않았겠지요.”

“서약했다면 어느 쪽? 공작이 직접? 아니면……….”

‘리안을 꼭두각시로 만들었나?’

라는 말을 삼키며 미나즈는 낮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설마 자기 아들 인생을 그런 식으로………?”

“명예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담보로 잡은 인간이 자식의 인생이라고 못 팔겠습니까?”

늘 딱딱한 클로드는 드물게 고조된 얼굴이었다.

“본인은 팔았다는 자각도 없을 겁니다.”

묵묵히 있던 아서 마저 말을 보탰지만, 미나즈는 여전히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칼라브리아 백작이 서약자라면 과부와 사랑의 도피 같은 걸 했을 리가 없잖아.”

“칼라브리아 백작이 서약에 대해 모르고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어떻게 그걸 몰라?”

“어렸을 때 당했다면 기억이 없을 테니까요.”

이번에는 미나즈도 말문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깰 수 없는 약속이란 게 있는 법입니다.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일이에요.”

클로드는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투였다.

그 말을 끝으로 세 사람 사이에 물을 끼얹은 듯한 침묵이 흘렀다.

아서 보르미아 공작은 불편한 공기를 피하려는 듯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젖혔다.

그리고 곧 그는 놀란 목소리를 냈다.

“아니. 저분이………!”

“누가 왔나요?”

“플로이드 공작 부인입니다.”

무심하던 클로드마자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은 즉시 창가로 다가가 확인했다.

정말로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 에오가이노스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분까지 오시다니 황제 폐하께서 단단히 칼을 간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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