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화
페이드라 대공은 도서관을 정신없이 서성이며 열변을 토해 냈다.
“저 녀석은 수도 없이 여자를 만나다가 눈이 하늘 끝으로 가 버렸어!
무슨 지성이 훌륭하고 아름다우면서 방사에도 능하고, 벌판에 맨몸으로 던져 놔도 홀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그런 여인이 아니면 마음을 허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단 말이지!
대체 그런 여인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의아하다고!”
어찌나 울분이 쌓였는지 그는 숨도 쉬지 않고 한 맺힌 말을 빠르게 쏟아 냈다.
“더는 여자랑 놀기만 하는 꼴은 못보겠다! 나는 상대가 누가 됐건 빨리 손주가 보고 싶단 말이야!”
아무래도 페이드라 대공은 칼라브리아 공작과 정반대의 고민을 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내일 공작가의 회합이 끝나면 공국으로 돌아가려 할 텐데. 그전에 뭐라도 건수를 만들어야 해.”
그의 산만한 중얼거림 중 하나의 단어가 엘레노어의 귀에 꽂혔다.
“회합이요?”
“그래. 바로 내일! 황제와 회합만 없었으면 이미 제국을 떴을지도 몰라.”
황제와의 회합이라.
왠지 이용할 수 있을 느낌이 들었다.
“무슨 회합이지요?”
“그냥 모든 공작가의 직계가 모여 제국의 앞날에 관해 얘기를… 아니, 그건 중요치 않고!”
페이드라 대공이 화제가 바뀌는 것에 짜증 내며 말했다.
“내 말 잘 들어.”
페이드라 대공은 윤곽이 또렷한 얼굴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들이밀었다.
“자식을 낳으면 녀석도 나처럼 마음을 잡을 거야. 그러니 어서 후사를 만들게. 아이 하나만 낳아 주면 평생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 주지.”
“하지만… 저는 과부의 몸으로 공작 전하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뭐 정식 공비는 안 돼도 귀비로 들이면 되지 않겠나.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유혹에만 신경쓰라고.”
단단히 못을 박은 뒤 페이드라 대공은 엘레노어를 빤히 바라보았다.
“뭐 계속 곁에 두는 걸 보니 마음에 든 모양이고, 이렇게 예쁘니 시간문제겠군.”
그는 만족스러운 듯 씩 웃으며 엘레노어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 말대로만 하게. 아들이 정신만 차리면 나중에 정비가 들어와도 내가 당신 편을 들어 줄 테니까.”
페이드라 대공은 그렇게 혼자 결론을 내 버렸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기정사실이 될 것 같아 엘레노어는 황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그건 곤란…….”
그러나 뭐라 제대로 말하기도 전에 도서관에 또 다른 목소리가 울렸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이번에는 스카이가 미간을 찌푸린채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무척 의심하는 시선으로 페이 드라 대공을 바라보았다.
“아버님께서 무슨 일로 도서관에 오셨습니까?”
“나는 뭐 독서도 안 하는 줄 아느냐?”
페이드라 대공은 당당하게 받아쳤지만, 그와 초면인 엘레노어가 보기에도 도서관과는 친분이 없어 보였다.
“흠흠. 나는 그럼 만찬회가 있어서 이만.”
자기가 생각해도 좀 민망한지 페이 드라 대공은 슬며시 꽁무니를 뺐다.
“아버님이 무슨 얘기를 했지?”
“별 얘기 아니었어요.”
엘레노어는 고개를 저었다.
가뜩이나 야릇한 눈길을 보내는 스카이에게 부친이 후사를 만들라고 부추겼다는 말을 굳이 꺼내서 낯뜨거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싶지 않았다.
“그보다 공작님이야말로 도서관엔 무슨 볼일이시죠?”
“당신에게 선물이 있어서.”
“선물?”
스카이가 새하얀 봉투를 꺼내 내밀며 입꼬리를 올렸다.
“왕자님이 보낸 편지.”
묵직한 봉투를 받아들자 청량한 향기가 어쩐지 익숙했다.
이어서 [R. 칼라브리아]라는 서명을 본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백작님이… 직접 오셨던 건가요?”
“아니. 대리인이 왔어.”
스카이가 가만히 들고만 있는 엘레노어를 부추겼다.
“열어 봐도 좋아.”
반응을 살피는 듯한 스카이가 신경쓰였지만, 어차피 내용을 훑어봤을테니 감출 것도 없었다.
봉투 속에 든 것은 비단으로 싼꾸러미와 카드 한 장이었다.
[꼭 만나고 싶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짧고 담백한 문장.
별말도 아닌데 리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심장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잘생긴 남자는 글씨도 참 설레게 잘 쓰지?”
스카이가 곁에서 능글거렸다.
마음을 읽힌 것 같아 엘레노어는 새침하게 받아쳤다.
“공작님은 악필이시겠군요.”
“아니, 그럴 리가.”
스카이가 돌려서 까는 말을 무척 당당하게 받아치는 사이 엘레노어는 동봉된 꾸러미를 열었다.
금으로 된 열쇠에 가죽끈으로 태그가 달려 있었다.
태그를 살펴보자 주소가 쓰여 있었다.
‘팰리시티 7번가의 중앙 구역이라.’
대략 위치를 가늠해 본 엘레노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샨카른 호텔 주변? 그 부근에 저택이 있었나?’
호텔 부지가 워낙 광활해서 정확하진 않지만, 저택은커녕 타운 하우스도 없었다.
‘그럼 이건 호텔 키? 방을 예약해둔 건가?’
매각한다고 들었는데 아직 영업 중인 모양이었다.
“거기로 찾아가 이름을 대면 알아서 해 줄 거라고 하던데.”
스카이가 생각에 잠긴 엘레노어에게 부연 설명을 해 주었다.
“부르지 않으면 가지 않을 테니 부담가지지 말고 언제든 마음껏 사용 하라더군.”
아무리 헤어졌다고 한들 스카이 결에 머무는 게 신경 쓰이는 걸까.
하지만 지금 그를 만나도 무슨 의미가 있을까.
리안의 속내를 읽을 수 없어 마음만 심란해졌다.
“만나러 갈 건가?”
복잡한 심경에 빠져 있던 엘레노어는 스카이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글쎄요. 왜 저를 찾으시는지 모르겠네요.”
엘레노어는 일부러 무심한 것처럼 카드와 열쇠를 다시 봉투에 넣으며 말했다.
“당신이 왜 이걸 제게 전해 주는지도 모르겠고요.”
“내게도 편지가 들어 있었거든.”
“무슨 내용이었죠?”
스카이는 그냥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 대답하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스카이와 함께 도서관을 나왔다.
“이제 몸은 좀 괜찮나?”
복도를 지나며 스카이가 질문을 던졌다.
“네. 오늘은 한 번도 피를 토하지 않았어요.”
스카이가 경고한 대로 며칠간 토혈이 간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속이 뒤집어지고 빈혈이 일어났지만, 독살당할 뻔한 것치고는 양호한 편이었다.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두 사람은 엘레노어의 방 앞에 도달했다.
“오늘 밤도 내 방에 올 생각이 없나?”
스카이의 은근한 물음에 엘레노어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하군. 내일 칼라브리아 백작의 칼에 맞아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는데.”
“시체로 돌아오면 그날은 방으로 가서 밤새 추모할게요.”
엘레노어의 말에 스카이는 소리 내서 웃었다.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야?
내가 그렇게 싫은가?”
가까이서 바라보는 눈매는 처음과 달리 부드러웠다.
위험해 보여서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남자지만, 대단히 매력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엘레노어는 동요하는 마음을 들키지 않으려 고개를 돌리며 고집스레 말했다.
“어머니께서 교제를 신청하기 전에 잠자리로 끌어들이려는 사내는 믿지 말라 하셨거든요.”
“현명한 어머니시군.”
스카이는 쿡쿡 웃으며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엘레노어를 내려보았다.
“그거 칼라브리아 백작에게도 적용되는 건가?”
“안녕히 주무세요.”
일부러 마지막 말은 못 들은 척하고 엘레노어는 문을 닫았다.
‘제국의 앞날이 걸린 논의라.’
엘레노어는 대공이 흘린 이야기에 주목했다.
그토록 거창한 이야기는 소시민인 자신과 상관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도 주목할 만한 부분은 있었다.
‘내일은 스카이가 별궁을 비우겠구나.’
제국의 시선도 내일은 저 회합에 쏠릴 것이다.
그렇다면 내일이 기회다.
엘레노어는 스트링 스톤을 만지작거리며 욕실로 향했다.
*
황녀 궁 로사그란데.
황녀를 가까이 두고 싶다는 황제의 소망에 따라 그녀의 궁에서는 황제의 궁전인 에오가이노스가 똑바로 보였다.
이 아름다운 전망을 감상하기 위해 황녀의 티 파티는 자주 테라스에서 열리곤 했다.
“정말 동화 속에 들어온 것처럼 아름답네요.”
오늘도 마찬가지로 테라스에서는 영애들의 티 파티가 있었다.
장미 정원을 그대로 옮겨 온 듯 생화로 호화롭게 꾸며진 테이블 주변에 모여 앉은 영애들은 한시도 쉬지 않고 재잘거렸다.
“페이드라 공작님도 너무하시지.
어떻게 그런 여자를 황궁에 들일 수가 있나요?”
“백작님이 바로 버린 것도 그런 저 열한 기질을 꿰뚫어 보신 거겠죠.
그렇게 가벼운 여자는 금방 질리기 마련이래요.”
탄생제 이후로 주요 주제가 된 엘레노어 남작 부인의 험담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제 사람들도 슬슬 정신이 돌아오는 거 같아요. 저희 어머니도 남작 부인의 책은 읽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제 가정 교사도 문장이 너무 조잡하고 천박하다고 비난하셨어요. 서민 출신인 게 한 페이지만 읽어도 극명하게 드러난다고요.”
그렇게 말한들 온 제국이 남작 부인의 책을 구하기 위해 열광하고, 페이드라 공작과 엘레노어의 얼굴을 한번 보려고 시녀들조차 별궁을 기웃거리느라 여념이 없다는 사실이 달라지진 않았다.
황녀는 뻔한 이야기에 염증이 났지만, 적당히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억지로 지켰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 오셨다!”
이제나저제나 입구만 바라보던 황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
황녀의 외침에 영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건강을 핑계로 탄생제나 각종 국정회의도 칼라 브리아 공작에게 위임한 채 수도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이번 회합에 참가하는 것도 극비사항이었기에 수도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영애들의 선망 어린 시선 속에 황녀는 공작 부인에게로 다가갔다.
“언제 수도에 오신 거예요?”
“지금 막 도착했습니다.”
황녀는 그녀를 테라스 안쪽으로 극진하게 모셨다.
“폐하께서 부르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그간 어찌나 뵙고 싶었는지.”
“저도 황녀 전하를 뵙고 싶어 이렇게 먼저 들렀습니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따뜻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황녀는 그녀의 근엄한 얼굴에 웃음을 머금게 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리안을 좋아했던 황녀는 황제를 졸라 핑계를 만들어서 북방 영지까지 따라가곤 했다.
그러나 막상 리안은 검을 수련한다.
며 제대로 상대도 해 주지 않은 탓에 공작 부인과 훨씬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딸을 원했던 공작 부인은 애교가 많은 데다 붙임성 좋은 황녀를 무척 귀여워했다.
“수도를 떠나 유일하게 그립던 것이 황녀 전하십니다. 한동안 수도에 머물 테니 자주 뵙게 될 겁니다.”
무뚝뚝한 공작 부인이 드물게 미소를 지었다.
주변을 둘러싼 영애들의 얼굴에도 선망의 빛이 가득했지만, 황녀는 공작 부인을 독점한 채 말을 나눌 기회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체펠린 궁정백이 그녀를 맞으러 왔다.
“공작 부인. 이제 이동하실 시간입니다.”
“아아. 어디로 가면 되지?”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황녀는 벌떡 일어나 그녀를 따라갔다.
황제궁은 바로 앞이었지만, 짧게라도 자신의 의중을 암시해 둘 필요가 있었다.
“공작 부인. 저는, 오늘 아주 중요한 것을 결정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혹시….”
굳이 문장을 맺지 않아도 똑똑한 공작 부인은 의미를 알아챘을 것이다.
“모든 일은 반드시 순리대로 풀릴 것입니다.”
간절한 황녀의 어깨를 톡톡 두드린 뒤 공작 부인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회합장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보며 황녀는 긴장한 표정을 지었지만, 속으로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그래, 순리.
어떤 방해가 있더라도 세상은 결국 순리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황녀님 저기 보세요! 칼라브리아백작님께서 입궁하고 계세요!”
호들갑스러운 영애의 목소리에 황녀는 수줍은 얼굴을 한 채 난간으로 다가갔다.
리안 플로이드 칼라브리아가 제국 기사단 정복을 입은 채 에오가이노스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그를 보자마자 그간 쌓였던 원망과 미움이 속절없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다른 사람이면 절대 살려 두지 않았을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그는 여전히 완벽했다.
보면 볼수록 그를 얼마나 원하고 얼마나 사랑하는지만 깨닫게 된다.
‘결국 당신은 나의 것이 되는 수밖에 없어.’
그와 함께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다.
오늘이 지나면 저 남자는 내 곁에 있게 되겠지.
그를 바라보는 황녀의 색이 옅은 푸른 눈동자가 뿌듯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