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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27화 (27/120)

제27화

블레인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눈앞에 우뚝 솟은 별궁을 바라보았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황궁이지만, 오늘만큼 발걸음이 무겁긴 처음이었다.

‘일단 오긴 했는데. 이거 이래도 되는 건지.’

그가 이렇게 황궁 한가운데에서 죽상을 짓고 있는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골치 아픈 그의 친구 때문이었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 페이드라 공작의 별궁에 기거한 지 4일째.

그에게 괜히 엘레노어의 근황을 전해 긁어 부스럼을 만든 죄가 컸다.

리안은 남작 부인을 포기하긴커녕 블레인의 저택에서 두문불출하며 건드리기 무서울 정도의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계속 엘레노어를 만나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그를 블레인은 필사적으로 뜯어말렸다.

안 그래도 사교계가 발칵 뒤집힌 상태인데 리안이 엘레노어를 되찾으려 페이드라 공작을 찾아가 행패를 부렸다는 소문이 돌면 감당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두들겨 패서 묶어 놓고 싶은데.’

리안이 훨씬 세지만 않았으면 반드시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나마 리안의 황소고집을 꺾을 방법이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거절당했는데 막무가내로 찾아갔다가 또 거절당하면 넌 끝장이야! 내 말 안 듣고 들이대면 싫어하는 걸 넘어서 경멸당할 거다!”

실상 블레인은 제대로 된 연애 경험도 없고 그간 마음에 든 여자를 리안에게 소개했다가 차인 게 여섯번이나 될 정도로 여자 복도 없었다.

제대로 된 남자라면 그의 연애 조언은 귀담아듣지 않겠지만, 리안은 블레인보다도 연애 경험이 없는 숙맥이었다.

“그녀가 확실한 것을 원한다며? 페이드라 공작을 보라고, 당당히 별궁까지 데려가니까 바로 받아들이잖아. 너는 스토커짓을 하기 보다는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을 준비나해.”

거기까지 말하자 그는 잠잠해졌지만, 블레인에게 대신 가서 편지를 전하라고 말했다.

이걸로 페이드라 공작이 리안의 칼에 맞는 상황은 방지한 것이다.

‘문제는 내가 페이드라 공작의 칼을 맞을지도 모른다는 거지.’

블레인은 부디 페이드라 공국에서는 연인에게 다른 남자가 보낸 러브레터를 전달하는 행동이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기를 바라며 입구로 다가갔다.

곧 한 노인이 다가와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외국 억양이 섞인 걸 보아 별궁관리가 아닌 스카이의 집사인 모양이었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을 만나러 왔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홀에서 블레인은 초조하게 기다렸다.

‘거절하면 깔끔하게 포기하고 즉시 돌아가야지.’

아마도 거절할 게 뻔했다.

여기까지 왔으면 할 만큼 했으니 어쩔 수가 없었다고 변명하면 될 것이다.

그렇게 마음의 준비를 마쳤을 때 집사가 홀로 돌아왔다.

“페이드라 공작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어쩔 수 없… 뭐라고요?”

거절당하는 것보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집사는 흠잡을 곳 없는 태도로 블레인을 맞이했다.

복도가 단두대로 향하는 길처럼 보였지만, 차마 제국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꽁무니를 뺄 수 없어 집사의 뒤를 따랐다.

곧 그는 혼자서는 열 수 없을 것 같은 묵직한 나무 문 앞으로 안내되었다.

집무실에 앉아 있는 스카이를 본 블레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만나서 반갑네. 캔터베리 자작.”

페이드라 공작은 몇 살 차이 나지도 않는데 무척 자연스럽게 블레인을 하대했다.

그러나 작위 차이도 크고 잘생긴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품격 때문인지 화가 나지 않았다.

요즘 남자들은 뭘 먹고 자랐길래저렇게 키도 크고 얼굴은 주먹만 한 것일까.

블레인은 속으로 불공평한 세상을 저주했다.

“남작 부인을 만나러 왔다고 했나?”

하아. 목소리도 좋군.

“네, 그렇습니다.”

“전하고 싶은 용건이 뭐지?”

“허락하신다면 직접 전달하고 싶습니다만.”

스카이는 블레인이 나름 용기 내서 꺼낸 말을 딱 잘라 거절했다.

“유감스럽지만, 남작 부인은 현재 건강이 좋지 않아서. 직접 만나는 건 곤란해.”

“어디가 안 좋은 겁니까?”

“민감한 부분이라. 나중에 괜찮아지면 직접 물어보게.”

몸이 안 좋다는 걸 리안이 알면 또 길길이 날뛸 텐데.

“남작 부인은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예정입니까?”

“음. 그녀가 머물고 싶을 때까지.”

한동안은 안 나가겠군.

블레인은 한숨을 내쉬며 품에서 준비해 온 편지를 꺼냈다.

“이걸 그녀에게 전해 주십시오.”

“미리 편지까지 준비해 왔나?”

“말을 전하는 주체가 제가 아니라서 말입니다.”

“그렇군.”

분명 리안을 대신해서 왔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시치미 떼는 걸 보니 무척 능구렁이 같은 남자였다.

스카이는 블레인이 책상에 내려놓으려던 편지를 직접 받아들었다.

“먼저 뜯어 볼 겁니까?”

“물론.”

무척 당당한 대답이 돌아왔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블레인은 부디 편지 내용이 페이드라 공작에 대한 험담이나 혹은 살인 계획이 아니기를 빌었다.

“리안이 그걸 전해 주면서 안에 든 것을 자유롭게 사용해도 좋다고 전해 달라 했습니다.”

그 외에 짧은 전언을 덧붙이자 스카이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용무가 끝났으나 블레인은 곧장 돌아서지 않았다.

그도 사람인지라 리안과 별개로 호기심이 솟았기 때문이었다.

“실례지만, 가기 전에 좀 묻고 싶습니다.”

“뭐지?”

“두 분이 현재 연인이 맞습니까?”

“글쎄. 어떨까.”

스카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자작이 보기에는 어떤 것 같은가?”

되묻는 스카이의 빙긋 웃는 얼굴은 솜씨 좋은 외교관처럼 어떤 속내도 읽기 어려웠다.

“서로 다른 방을 사용하는 걸 봐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블레인은 떠보기 위해 대담하게 대답했다.

리안이 심어 둔 심복은 대체 얼마나 능력이 좋은 건지 별궁까지 잠입해 엘레노어의 신변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에 따르면 첫날을 제외하면 두 사람은 다른 방에서 기거하고 있었다.

그 보고가 없었다면 리안이 당장 뛰어오는 것을 어떤 말로도 도저히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칼라브리아 백작은 여기까지 감시하고 있는 건가? 역시 대단한 남자군.”

페이드라 공작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으나 내부까지 침투당했는데도 별로 두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페이드라 공작님께서는 그녀에게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렇네.”

산뜻한 대답에 블레인은 당황했다.

이번에도 두루뭉술하게 넘길 줄 알았는데 처음으로 긍정했다.

혹시 리안을 견제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접근한 게 아닌가 싶었는데.

이렇게 되면 도리어 더 골치가 아파졌다.

“그러니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그녀를 만나게 해 줄 순 없어. 이만 돌아가게.”

스카이는 딱 잘라 말하고 일방적으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서던 블레인은 문 앞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을 질문했다.

“딱 하나만 대답해 주십시오. 당신은 동침하던 밤 그녀를 안았습니까?”

공작이 아니라 누가 상대라도 무례한 질문이었다.

무척 긴장했으나 스카이는 별로 불쾌한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목숨이 아까우니 밝혀 두지.”

스카이는 천천히 일어서 블레인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전해. 나는 묶여 있었으니까.”

블레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 무서운 여자!

리안 칼라브리아에 이어 스카이 페이드라까지 결박의 노예로 만들다니!

그나저나 제국의 미남들은 어쩌면 이렇게 취향이 한결같단 말인가.

아무래도 내가 인기 없는 것은 결박 취미가 아니라서인지도 모른다.

블레인은 충격에 휩싸인 채로 별궁을 떠났다.

*

엘레노어는 한숨을 내쉬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주술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려고 도서관에 왔지만, 허탕이었다.

별궁 도서관은 장서량도 적은 데다 주술 관련 서적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믿을 건 이것뿐인가.’

그녀는 시선을 내려 손가락에 낀 투박한 반지를 보았다.

보는 각도에 따라 붉은색으로도, 푸른색으로도 보이는 기묘한 보석.

그것은 그레이엄이 구해다 준 스트링 스톤이었다.

거금을 들여 입수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사용할 기회를 잡지 못했다.

현재 비앙카스타 바이스는 저택에 꼼짝없이 박혀 두문불출한다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파티에서 우연히 마주치길 기대할 수도 없었다.

‘역시 직접 찾아가 보는 수밖에 없나.’

그녀를 독살범으로 제소하면 공식적인 수사를 받을 수 있겠지만, 위험 부담이 컸다.

평민 출신 남작 부인이 후작 영애를 범인으로 지목하려면 빼도 박도 못 할 증거 정도는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으로써는 별다른 증거도 목격자도 없었다.

물론 공작인 스카이 페이드라가 그녀의 편을 들어 증언해 준다면 괜찮겠지만….

‘제일 수상한 건 그 남자야.’

당장은 신세 지고 있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심이 싹텄다.

약학의 대가이자 주술에도 해박한 남자.

그라면 희귀한 독약도 조제할 수 있을 거고 그 매력적인 외모와 화술로 순진한 소녀를 조종해 주술을 걸기도 쉬울 것이다.

심지어 하필 그날 거기에 있지 않았던가.

‘그가 모르는 사이에 비앙카스타를 조사해야만 해.’

어떻게 그의 감시를 피할 수 있을까.

엘레노어가 방법에 대해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무척 바쁜 모양이군.”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놀라 엘레노어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왔는지 한 남자가 등뒤에 서 있었다.

‘누구지?’

중년임에도 키가 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남자였다.

밝은 갈색 머리와 수염. 가무잡잡한 피부에 이국적인 복장이 낯설면서도 어딘가 눈에 익었다.

“자네가 리안 칼라브리아와 눈이 맞았다는 그 과부인가?”

남자는 풍부한 외국 억양으로 말했다.

다소 무례한 태도였지만, 그게 잘 어울릴 정도로 고압적이었다.

“누구… 시죠?”

대략 정체가 짐작이 갔지만, 엘레노어는 확인하듯 물었다.

“나는 이 별궁의 현재 주인 되는 사람이네만.”

아니나 다를까.

스카이의 아버지이자 페이드라 공국의 주인. 로베르 페이드라 대공이었다.

“대공 전하를 몰라뵈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엘레노어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내 아들이 여인을 처소에 데려온게 처음은 아니지만,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머무르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군.”

긴장으로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칼라브리아 공작처럼 분노로 펄펄날뛰기 전에 빨리 무마해야만 했다.

“심려치 마십시오. 저 역시 곧 떠나갈 사람입니다.”

“뭐라고?”

“저와 공작 전하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니까요.”

요즘 들어 이런 말을 참 많이 하게 되는 것 같다.

안심시키려던 엘레노어의 말에 페이드라 대공의 표정은 오히려 싹 굳었다.

“그러면 곤란한데.”

페이드라 대공이 서슬이 시퍼런 얼굴로 음산하게 외쳤다.

“여자와 관계가 반나절도 못 가는 저 녀석이 며칠씩 데리고 있는 여자가 드디어 나타났는데! 바로 떠난다.

니! 그럴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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