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화
그레이엄은 침묵의 서약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침묵의 서약을 하면 ‘서약자’는 ‘시전자’가 발설하지 말라는 말을 어떤 방법으로든 전달할 수 없어요. 글자를 쓰면 이상한 문자가 되고 말하려고 하면 기괴한 소리를 내게 되죠.”
들을수록 앞뒤가 딱 들어맞았다.
“아무래도 그게 맞는 거 같은데.”
“흐음. 글쎄요.”
확신하는 엘레노어와 달리 그레이 엄은 여전히 믿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이미 주술은 제국 내에서는 엄격한 처벌로 거의 모습을 감췄어요.
최근에 있던 주술 사건은 조사해 보면 모두 병자의 망상이었다고요.”
그런 그녀에 아랑곳없이 엘레노어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정말 주술을 걸었는지 알아볼 방법이 있을까?”
“각인이 나타나지만 그건 시전자만 볼 수 있으니까…… 역시 스트링 스톤일까요.”
“스트링 스톤? 그게 뭔데?”
그레이엄은 다 땋은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건성으로 말했다.
“스트링 스톤을 들고 주술에 걸린 사람과 맨살을 맞대면, 시전자와 서 약자를 잇고 있는 서약의 끈이 보인다고 해요.”
“그럼 누가 걸었는지까지 한 번에 알 수 있겠구나.”
“뭐 상대방도 그 장소에 있다면 그렇겠죠.”
상대를 확인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서약의 끈이 나타나면 주술에 걸렸다는 증거였다.
그 정도면 궁금증을 풀기에 충분했다.
“그걸 구할 수 있어?”
“연금술사의 탑에 가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거 엄청나게 비싸요. 지금 우리는 별로 가진 돈도 없잖아요?”
이야기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서인지 그레이엄은 소극적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현금도 없었고 지금은 탄생제 기간이라 은행도 열지 않는다.
저택에 가면 좀 더 있긴 하지만, 부족할 거고 누군가 노리고 있는 와중에 그레이엄을 저택으로 보내는 게 현명한 행동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엘레노어는 깔끔하게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저기.”
엘레노어가 가리키는 것을 보고 그레이엄 양이 입을 떡 벌렸다.
화장대 위에는 엘레노어가 리트라 엘 후작 부인에게서 받은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그것은 탄생제라는 대목 내내 사교계를 휘어잡기 위해 큰손인 부인이 신경 쓴 선물이었다.
어림짐작으로도 2만 골드는 충분히 호가할 것이다.
“그거와 바꿔 달라고 해 봐. 혹시 부족하면….”
“부족할 리가요! 추, 충분해요!”
그레이엄 양은 경악한 표정으로 황망하게 말했다.
“그런 걸렸는지 안 걸렸는지 모를 주술 때문에 저 보물을 넘기신다고요?”
“나한테는 목걸이보다 그걸 확인하는 게 더 중요해.”
그러나 그레이엄은 목걸이가 더 중요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찬란하게 빛나는 목걸이를 아쉬운 눈길로 바라보며 미련이 철철 넘치는 목소리로 확인했다.
“하지만 구해도 사실을 확인하려면 바이스 후작 영애와 맨살이 맞닿아야 하는데요?”
비앙카스타의 얼굴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이란 것은 그 정도로 평생 접점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녀를 만나기조차 쉽지는 않을 거란 뜻이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오늘 중으로 꼭 좀 구해줘.”
“휴. 알겠어요.”
그레이엄은 마지못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들어 상자 안에 넣었다.
“그리고 용병 길드에 부탁해서 한동안 머물 수 있는 안전가옥을 찾아봐.”
생명의 위협을 받았으니 주의를 기울여야만 했다.
“네. 그럼 다녀올게요.”
그레이엄이 목걸이를 들고 드레스룸을 빠져나갔다.
거대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엘레노어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든 바이스 후작 영애를 만나야 해.’
별궁에는 사람들의 눈이 많으니 엘레노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미 퍼져 나갔을 것이다.
만일 누군가 정말 그녀에게 주술을 걸어 살인을 사주했다면 지금쯤 비앙카스타는 위험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엘레노어는 바로 어제 자신을 죽이려 했던 사람을 걱정할 정도로 무르진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제거되면 배후를 확인할 방법이 사라지고 만다.
최대한 빨리 그녀를 만나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엘레노어가 비앙카스타를 만날 방법에 대해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공작님께서 남작 부인을 찾으십니다.”
들어온 하녀의 말에 시계를 보니 벌써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이런 밤에 찾는 이유가 뭘까.
엘레노어는 아침에 보였던 스카이의 야릇한 손길을 떠올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스카이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엘레노어가 문가에 선 채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찾으셨다고요.”
“응. 이제 슬슬 잘 시간이니까.”
엘레노어의 의심스러운 눈길이 스카이가 앉아 있는 비단 커튼을 친호두나무 침대로 향했다.
“은혜는 다른 방법으로 갚고 싶은데요.”
철벽 치는 말에 스카이는 픽 웃었다.
그는 여태껏 살며 여인을 거절한 적은 많아도 거절당해 본 적은 전혀 없었다.
딱히 유혹할 필요도 없이 눈만 마주치면 제아무리 눈이 높은 귀족 여인들도 살살 녹아내렸다.
그래서 엘레노어의 반응이 무척 신선했다.
“이유가 뭐지? 어차피 칼라브리아백작과 헤어졌다면 나와 함께 해도 상관없지 않나.”
“높은 분들의 일탈에 어울리는 건 내 생애 한 번이면 됐어요.”
엘레노어의 말은 담담했지만, 어딘지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아무래도 정말 끝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하지만 그녀를 지키는 경호 인력의 양과 질을 볼 때 둘이 끝났을 리가 없었다.
스카이는 다시 살며시 떠보는 질문을 던졌다.
“살해 위협을 당한 게 바로 어제인데. 혼자는 위험하잖아.”
“용병은 충분히 고용하고 있어요.”
“그런 허술한 용병들로는 당장 오늘 밤도 장담하지 못해.”
슬며시 겁을 주며 스카이는 그녀의 반응을 살폈다.
“물론 내가 다른 쪽으로 위험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지만, 나와 있다면 최소한 매일 아침 해가 뜨는 건 볼 수 있을 거야.”
스카이의 말에 엘레노어는 입술을 깨물었으나 태도를 누그러뜨리진 않았다.
“내게 손을 대게 할 바에는 달빛 속의 죽음을 택하겠어요.”
비장한 각오가 어린 걸 볼 때 리안이 자신을 지켜 준다는 것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최강의 기사단이 지키고 있다는 걸 안다면 두려워할 리가 없을 테니까.
왜 모르는지 알 수 없지만, 스카이는 이용하기로 했다.
“그냥 곁에 있어. 아직 해독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니 위험해.”
“난 이제 괜찮은 거 같은데요.
“아니. 앞으로 한동안 불시에 몸에 남은 약효 때문에 피를 토하게 될 거야.”
약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엘레노어는 그가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가려낼 수가 없었다.
스카이가 흔들리는 그녀에게 넌지시 말을 던졌다.
“그렇게 싫다면 당신에게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까.”
“한 방에서 밤을 보내며 말인가요?”
“내일부터는 따로 방을 준비하라고 해 주지.”
거기까지 말해도 엘레노어는 선뜻 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나를 그렇게나 못 믿는 건가?”
“저는 남자의 그런 약속은 별로 신뢰하지 않아요.”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믿어 줄수 있지?”
그녀는 뺨을 살짝 긁적이며 생각하더니 담담하게 답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상대를 묶었던 거 같네요.”
묶었다고? 남자를?
정말 만만치 않은 여자다.
“그런 거로 안심할 수 있다면.”
비유적일 표현일 뿐 설마 정말 묶지는 않겠지.
스카이는 웃으며 여유롭게 답했다.
탁 트인 설원은 북방의 상징이다.
눈이 가득 쌓인 벌판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칼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남쪽 사람이라면 기겁하고 집안에 틀어박힐 온도였으나 하늘은 청명하고 무척 맑았다.
태양이 깨끗한 눈밭 위에 점점이 찍힌 발자국을 비추었다.
그 끝에는 한 중년 부인이 서 있었다.
질이 좋은 검은 모피를 값비싼 보석 브로치로 여민 모습은 그녀의 높은 신분을 내비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여느 귀부인들과 달랐다.
드레스 대신 활동하기 편한 가죽바지에 허벅지까지 오는 부츠를 신고 있었고, 화장기 없는 얼굴은 햇볕에 건강하게 그을려 있었다.
그녀는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로 전 나무 꼭대기를 응시했다.
곧 창공 위로 새카만 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점점 커지더니 순식간에 여인의 앞으로 다가왔다.
활강을 시작한 강인한 날개.
그것은 사냥감을 물고 돌아오는 한 마리의 매였다.
“옳지, 잘했어.”
여인이 팔을 내밀자 매는 물고 온 토끼를 바닥에 떨어뜨린 뒤 팔에 감은 가죽 장갑 위에 내려앉았다.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먹이를 먹이고 있을 때였다.
“공작 부인!”
멀리서부터 한 사내가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무릎까지 잠기는 눈밭을 능숙하게 갈라 바로 앞에 말을 세운 사내는 한 통의 편지를 내밀었다.
“수도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황제의 직인이 찍힌 편지의 겉면에는 ‘크리스티 플로이드 공작 부인’이라는 수신인 명이 적혀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편지를 뜯어 훑어 본 그녀는 곧 혀를 찼다.
“회합?”
“네. 공작 부인께서 반드시 참가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습니다.”
“그딴 건 수도에 있는 바깥양반이 알아서 하면 되잖아.”
황제의 명령임에도 그녀는 싫은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수하는 그런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응접실에서 사자가 기다리고 있으니 직접 이야기를 들어 보시죠.”
공작 부인은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말에 올라탄 뒤 저택으로 달렸다.
응접실에 들어선 그녀는 사자의 정중한 인사를 막은 뒤 즉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굳이 나를 오라고 하는 이유가 뭐야?”
사자는 대뜸 반말하는 공작 부인의 태도가 익숙한 듯했다.
“이건 극비입니다만, 이번 회합은 아드님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내 아들?”
“네. 사실 최근 수도는 칼라브리아백작님의 염문으로 떠들썩합니다.”
리안의 이야기가 나오자 공작 부인의 심드렁하던 표정에 조금 변화가 있었다.
“염문이라니. 내 아들이?”
공작 부인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
는 얼굴을 했다.
“떠들썩하다면 황녀는 아닌가 보군. 대체 상대가 누구지?”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라는 여인입니다.”
공작 부인의 입가가 기묘한 모양으로 변했다.
“하? 그 파티를 돌며 관능 소설을 낭독하는 그 여자 말인가?”
“그렇습니다.”
황궁의 사자는 엘레노어 남작 부인 이 이런 북방의 변경까지 알려졌다는 게 좀 의외인 얼굴이었다.
“내 아들이 그 유명한 여자와 놀아나고 있다고?”
“네. 물론 하룻밤의 일탈이라고는 합니다만….”
사자는 공작 부인을 부추기려는 말투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녀는 추문을 자신의 유명세를 위해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 때문인지 칼라브리아 백작님께서도 마음을 잡지 못하셔서 황녀 전하와 황제 폐하의 근심이 대단합니다.”
“유명세에 추문을 어떻게 이용하는데?”
“파티를 돌며 돈을 긁어모으고 있다고 합니다.”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녀는 천장을 잔뜩 노려보다가 불쑥 말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리안에게서 편지가 왔었지.”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내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더군.”
“누구라는 말은 없었습니까?”
공작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칼라브리아 백작은 편지에서조차 말수가 적은 모양이었다.
“내 아들을 이용해서 돈을 벌다니.
참으로 맹랑한 여자로군.”
플로이드 공작 부인의 몸에서 범상치 않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싸늘한 시선을 수하에게 돌리며 내뱉듯이 말했다.
“수도로 갈 준비를 하게. 직접 가서 해결하겠어.”
싸늘한 공작 부인의 명령이 떨어졌다.
주인의 불편한 심기를 눈치챈 듯 어깨에 앉아 있는 매가 날개를 펄럭였다.
그에 흠칫한 사자는 꽁무니를 빼듯 응접실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