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화
어둠이 세상을 보랏빛으로 물들인 늦은 시각.
체펠린 궁정백의 발걸음이 우뚝 솟은 대리석 전각 앞에서 멈췄다.
드높은 지붕의 형태가 하늘을 떠받드는 듯 보인다 해서 에노가이오스라 불리는 궁전.
하스카토르 제국의 황제 궁이었다.
체펠린 궁정백은 금빛 융단이 깔린 넓은 홀을 가로질러 허리를 깊숙이 굽혔다.
황금으로 찬연하게 장식된 황좌 위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앉아 있었다.
하스카토르 제국의 황제 클라우스하스카토르가 딱딱한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칼라브리아 공작이 변명과 함께 자네에 대한 불평을 잔뜩 늘어놓고 돌아갔네.”
리안 칼라브리아에게 엘레노어 남작 부인을 보낸 것이 드디어 황제의 귀에도 들어간 모양이었다.
체팰린은 허리를 깊이 숙이며 사죄를 올렸다.
“송구합니다. 모든 것이 제 불찰입니다.”
“자네로서는 드물게 조언에 실패한 셈이군.”
황제는 뜻밖에도 크게 화난 음성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꽤 비운 듯한 술병을 동안 황권을 유지하기 위해 큰 홍역을 치렀네.”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며 군림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노력이 필요했다.
어지간한 국가의 왕보다 세력이 강성하다는 다섯 공작가는 모두 합치면 황가보다 더 큰 위세를 가지고 있었다.
조금 방심하면 공가에 많은 권한을 빼앗기고 허수아비가 되고 만다.
그 때문에 황제는 평생 외교보다 공작들을 견제하는데 많은 신경을 할애해야 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황가에 가장 충성스러운 칼라브리아 공작가는 현공작이 가주가 된 후 무가로서 입지가 점점 약해지는 중이었지.”
공작가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지금의 권세가 무색하게 20년 전만 해도 칼라브리아 공작가는 쇠락하는 중이었다.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가주인 칼라브리아 공작이 제국 기사단장의지위에 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이용해 공작가의 힘을 흡수할 계획을 세운 걸세.”
“어떤 계획입니까?”
“플로이드 공작가의 부를 이어받아 회생할 수 있게 허락하는 대신 칼라 브리아 공작에게서 단 하나의 후계만 낳고, 그 애를 내게 넘긴다는 밀약이었지.”
부와 무를 손에 쥔 공작가에게서 몇몇 특권들을 회수하는 정도로 예상했던 체펠린 궁정백은 엄청난 말에 평정을 잃었다.
“후계를 넘긴다고요? 그걸 공작이 받아들였습니까?”
“그래. 둘의 후계가 칼라브리아와 플로이드 작위를 모두 이은 뒤 공식적으로 내 양자가 되어 뒤를 잇는다는 조건이었어.”
황제는 어마어마한 사실을 담담하게 설명해 나갔다.
“나는 자식을 가질 생각이 없었으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지. 그리고 칼라브리아 공작으로서는 자신의 핏줄이 제국 역사상 가장 막강한 황제가 된다는 데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
공작이 지독한 야심가라는 건 알고 있었으나 설마 이런 뒷거래가 있었을 줄이야.
분명히 예전의 황제는 자식을 가지는 걸 거부하고 고집스레 황후조차들이지 않았다.
“황녀님과 만나고 나서 계획이 바뀐 거군요.”
아일린은 황제가 짧은 인연으로 만난 여인이 갑자기 안고 나타난 사생아였다.
황제는 그 천사 같은 아기를 만난 뒤 부정에 눈을 떠 예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나는 아일린이 나와 같은 고생을 겪지 않았으면 해. 지금처럼 순수하고 티끌 하나 없이 평생 안락하게 살길 바라네. 그러려면 황제가 되는 것보다는 황후가 되는 게 나을 거야.”
물론 위정자가 되어 고생하는 것보다 강력한 황제를 세워 두고 부와 권력의 과실만을 즐기는 게 편안할 것이다.
딸을 끔찍이 아끼는 황제다운 말이었다.
“그래서 칼라브리아 백작을 양자로삼는 대신 그녀와 결혼시키려고 하신 거군요.”
“마침 잘됐다고 생각했네. 황후가 된 그 애를 위해서는 정통성에 문제가 없고 강한 권력을 지닌 황제가 필요해. 게다가 아일린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일편단심으로 그를 좋아했으니까.”
황제 역시 제국의 다른 모든 사람처럼 리안과 황녀가 맺어질 거라 믿었던 것이다.
“굉장히 위험한 약속을 하셨군요.”
체펠린 궁정백이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 속은 모르는 게 아닙니까.
큰 힘을 손에 넣은 칼라브리아 백작을 통제할 강력한 방법이 필요했을 텐데요.”
“그거라면 있지. 아주 고전적인 방법이.”
‘고전적인 방법’이라는 말에서 번뜩 짚이는 것이 있었다.
“설마, ‘서약’을 하신 겁니까?”
황제는 미소를 지을 뿐 긍정하지 않았다.
놀랍고도 거대한 비밀에 체펠린 궁정백은 사색이 되었다.
“왜, 놀랐나?”
“놀랐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체펠린 궁정백은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히 고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황녀 전하와 칼라브리아백작이 결혼하지 못할 일은 없겠군요.”
“뭐, 그렇긴 하지만, 벌써 비장의 카드를 사용할 필요는 없겠지.”
황제가 선혈처럼 붉은 와인을 잔에 따르며 말했다.
“그게 발각되면 리안은 절대 지금까지처럼 살지 못할 테니까. 그리고 아마 평생 아일린을 미워하게 되겠지.”
서약 때문에 의지에 반해서 강제로 결혼하게 된다면 당연히 그럴 것이다.
리안처럼 긍지가 높은 이라면 절대 받아들이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일린이 마음 없이 껍데기뿐인 상대를 사랑하게 둘 수는 없어. 그 전에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 봐야만 해.”
“염두에 두신 방법이 있으십니까?”
말하면서 체펠린은 대략 황제의 심중을 짐작했다.
이게 바로 이번에 공작들의 회합을 개최한 까닭일 것이다.
“우선 리안에게 선택을 하게 할 생각이네.”
“어떤 선택 말씀이십니까?”
“위험한 임무를 주고 아일린과 결혼한다면 피하게 해 주는 거지.”
체펠린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리안은 목숨이 아까워서 자기 뜻을 굽힐 성격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변수는 있었다.
“아일린과 대화 중 아직 리안을 설득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네.”
체팰린은 예상이 적중했음을 느끼며 침을 꿀꺽 삼켰다.
크리스티 플로이드 공작 부인.
제국 최강의 무가의 수장인 칼라브리아 공작의 부인이자 제국 최대 부를 거머쥔 플로이드 공작가의 가주.
여걸 중의 여걸인 그녀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피도 눈물도 없으며 아들을 끔찍이 익애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부친과 사이가 좋지 않은 리안도 모친과의 관계는 각별했다.
‘영민한 판단이군.’
황녀의 의도는 그런 게 아니겠지만, 공작 부인을 수도로 부른다는 건 리안을 압박하기 위해서 꽤 효과적인 방법이 될 터였다.
라 플로이드가 통제될 거고, 운신의 폭도 좁아질 것이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아들을 사지로 보내는 회합에 동의할 리 없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리안을 설득해줄 터였다.
‘결국, 남작 부인은 살아남지 못하겠군.’
공작 부인이 수도로 와서 리안의 염문을 알게 된다면 분명 남작 부인을 참살할 게 뻔했다.
자비심 없는 공작 부인은 완전무결한 아들의 오점을 보아 넘기지 않을 테니까.
체펠린은 서재에서 보았던 우아하고 아름답던 남작 부인이 모습을 떠올렸다.
계속 후회하고 있던 조언이 더욱 후회스러웠다.
이제 그 어린 남작 부인은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었다.
“리안이 아일린과 일단 결혼해 서로를 알아 가면 그 애를 사랑하게 될 걸세.”
과연 그럴까.
체펠린은 의구심이 들었으나 딸에 대한 부정이 철철 넘치는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럼 공작 부인에게 수도로 돌아와 이번 회합에 참여하라고 전갈을 보내게.”
“분부 받들겠습니다.”
대답을 마친 체펠린 궁정백은 황제 궁을 물러 나왔다.
*
“악녀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정말 소름 끼치는 아가씨군요.”
팰리시티의 별궁.
엘레노어는 호화로운 드레스룸에 앉아 그레이엄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스카이의 눈을 피하려고 택한 장소였다.
그레이엄이 목욕 후 단장 시중을 드는 척하고 따라 들어와 상담 상대가 되어 주었다.
“왜 그런 짓을 한 걸까요? 남작부인은 딱히 원한을 산 일이 없을 텐데 말이죠.”
그레이엄은 엘레노어의 비단결 같은 머리카락을 능숙하게 땅으며 말했다.
비앙카스타는 원작에서 비앙카스타는 리안을 짝사랑해서 황녀를 해코지하던 악녀.
그것을 믿는다면 리안과 엮인 엘레노어에게 원한을 품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엘레노어는 그녀의 살의가 미심쩍었다.
정말 죽이려고 했다면 왜 도중에 말렸을까.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사람들이 몰려오기 전에 엘레노어는 중독돼서 쓰러졌을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줄곧 마시지 말라는 듯 간절히 고개를 저었다.
왠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뒤에 그것보다 더 큰 악의가 도사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내 생각에는 단순한 원한이 아닌 것 같아.”
엘레노어는 그레이엄에게 비앙카스타가 뭔가 말하려다 기괴한 소리만 냈던 것을 얘기했다.
작가다운 실감 나는 묘사 덕에 그레이엄은 소름이 끼친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오싹하네요.”
“그냥 죽이려던 거라면 왜 그렇게 이상한 행동을 했을까?”
“원래부터 기행으로 사람들의 주의를 끌려고 드는 데다 상습적인 거짓말쟁이라던데. 요즘 유명한 남작 부인의 관심을 끌려던 게 아닐까요?”
그토록 구하기 어려운 맹독까지 동원해서 관심을 끈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엘레노어는 괴로워 보이던 비앙카스타를 떠올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혹시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았을지도 몰라.”
“사주요? 그런 고위 귀족에게요?”
그레이엄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설령 했다고 해도 그 악녀가 말을 듣겠어요?”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걸었을 수도 있잖아.”
“귀족 영애가 살인까지 불사할 만한 조건이 뭐가 있을까요? 누가 주술이라도 걸었다면 모를까.”
그 농담조의 말이 엘레노어의 귀에 탁 걸렸다.
“주술이라고?”
막막하던 차에 실마리를 찾은 기분이었다.
엘레노어는 달려들 듯이 캐어물었다.
“네. 제 이모님이 주술사시거든요..
예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그레이엄은 말을 하려다 멈추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말도 안 돼요. 주술 따위에 걸렸을 리가 없죠.”
“어째서?”
“주술은 상호 동의해야 하는 데다 법으로 엄격히 금지돼 있어요. 호위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후작 영애에게 대체 누가 그런 걸 걸 수 있겠어요?”
그녀의 말대로였다.
그래서 아마 그런 가능성에 대해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잖아? 그냥 가정이라도 해 봐.”
엘레노어는 회의적인 그레이엄을 설득하려 애쓰며 물었다.
“만약에 이게 주술이라면, 그런 식으로 행동시킬 만한 주술이 있어?”
그레이엄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머리를 굴렸다.
“침묵의 서약이라는 게 있긴 한데…….”
마지못해 내놓은 그레이엄의 말에 엘레노어의 영민한 푸른 눈이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