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 제24화
방을 나선 스카이는 욕실로 향했다.
복도를 지나는 그의 앞에 신기루처럼 한 남자가 나타났다.
스카이의 심복 제니트였다.
“귀국을 미루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래도 그러려던 참이긴 했다.
이유를 묻기도 전에 제니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황제 폐하께서 공작 전하를 찾으십니다.”
“폐하께서 나를? 무슨 일로?”
“정확히는 공작가의 모든 이들을 찾으셨습니다. 이번 주말 공작들과 회합을 할 테니 반드시 참석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뭔가 일을 벌이시려는 모양이군.”
황제가 공작들을 모아가며 급히 벌일 일이라면 하나 정도밖에 없었다.
바로 리안 칼라브리아와 황녀의 약혼 발표였다.
“좋아. 귀국은 미루지. 공국에 사람을 보내서 늦어진다고 전해.”
이야기하는 사이 두 사람은 욕실에 다다랐다.
스카이는 곁에 있는 제니트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옷을 훌훌 벗었다.
공기 중에 스카이의 눈부신 나신이 드러났다.
조각과도 같은 육체를 무심하게 바라보던 제니트는 그의 모습이 평소와 다른 상태인 것을 포착했다. 그는 마치 날씨 얘기를 하는 듯한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저 여인에게 성적인 방면으로 관심이 있으셨습니까?”
저렇게 사무적으로 던질 질문은 아니었지만, 스카이는 태연하게 받아쳤다.
“그러면 안 되나?”
“그냥 리안 칼라브리아를 견제하고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데려오신 줄 알았습니다만.”
“처음에는 그랬는데 지금은 다른 관심도 생겼어.”
흡족한 듯 웃으며 스카이는 널찍한 욕탕으로 한 걸음 들어섰다.
그의 몸이 닿은 부분부터 맑게 파문이 번져 나갔다.
적당한 온도의 온수 속으로 몸을 담그며 스카이가 말을 이어 나갔다.
“똑똑하고 예측 불가인 데다가 계산적이잖아.”
“장점…… 입니까?”
“침실에서도 그렇다면 장점이지.”
제니트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저 여인은 계속 별궁에 두실 생각이십니까?”
“그렇겠지.”
물론 그녀가 나가지 않도록 설득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냥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내버려 둬.”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가만히 두면 무슨 일을 할지 궁금하거든.”
스카이는 엘레노어를 곁에 잡아 두고 싶었다.
바로 어젯밤에 죽을 위기를 넘긴데다가 낯선 곳에서 눈을 떴는데 침착하기 짝이 없는 모습만 봐도 그녀는 범상치 않은 여인이었다.
아마 함께 있으면 재미있는 일이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녀의 목숨을 노렸던 자가 또다시 손을 뻗어 올지도 모릅니다.”
“뭐 이제 그녀도 조심할 테고, 어차피 리안도 지키고 있잖아? 그보다 내 경호에 집중하라고.”
스카이가 농담조로 말을 덧붙였다.
“리안 칼라브리아가 언제 내게 검을 휘두를지 모르니까. 자네가 경호에 실패하면 내일은 내 묘비 디자인을 골라야 할지도 몰라.”
“칼라브리아 백작이 당신에게 해를 끼칠 정도로 그 여자를 귀애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지.”
스카이의 여유로운 대답에 제니트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정말 칼라브리아 백작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그럼 정중하게 안으로 맞아들이면 되겠지.”
천연덕스럽게 말한 뒤 스카이는 씩웃기까지 했다.
“그럼 드디어 무표정이 아닌 얼굴을 보게 되겠군. 기대되는데.”
“…분부하신 일들을 처리하겠습니다.”
제니트는 말해 봐야 소용없다고 느꼈는지 작게 한숨을 내쉰 뒤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사라져 버렸다.
었다.
그러나 비앙카스타의 방에는 한 점의 햇살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커튼을 꼭 닫은 채 방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침대 옆에는 손도 대지 않은 식사가 놓여 있었다.
배가 고프다 못해 속이 뒤집힐 것 같았지만, 비앙카스타는 이대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노라고 끊임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황녀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온몸에 오한이 들었다.
제발 들여보내지 말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녀의 명령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집안에서 천덕꾸러기인 비앙카스타가 사람대접을 받는 오직 한 가지 이유는 황녀와 가깝기 때문이었다.
역시나 그녀가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흠칫하는 비앙카스타의 얼굴 위로 짙은 사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머, 아가씨. 아직도 주무시고 계셨어요?”
메이드가 호들갑을 떨며 불을 켜려 하자 황녀가 만류했다.
“괜찮아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서 쉬세요.”
황녀는 창가로 가서 커튼을 젖힌 뒤 침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눈물에 젖어 퉁퉁 부은 비앙카스타를 보더니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이 엉망이네요. 비앙카스타.”
목소리에는 걱정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비앙카스타는 공포심에 젖었다.
황녀가 그녀에게 경어를 쓸 때는 무척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정말 당신은 대체 나를 어디까지 실망하게 하는 건지.”
입가에 핀 미소와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 황녀에게서 흘러나왔다.
“항상 다정하게 대하려고 해도 당신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알게 될 때마다 절망적이에요. 어지간한 천치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죠.”
들을수록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존재가 되는 것 같았지만, 그 가시 돋친 말에도 반가운 구석이 있었다.
비앙카스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남작 부인은…. 주, 죽었나요?”
“그렇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어요.”
황녀의 푸른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별궁 시녀 말로는 페이드라 공작과 함께 밤을 보내고 시녀까지 불러 들였다더군요.”
그렇다면 남작 부인은 무사한 모양이었다.
비앙카스타는 살인자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안도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황녀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비앙카스타는 기분 좋은 모양이네요.”
“나, 남작 부인이 페이드라 공작님과 맺어졌다면 칼라브리아 배, 백작님과는 끝난 거니까… 황녀님의 뜻대로….”
비앙카스타는 차마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그녀를 보는 황녀의 눈빛에는 버러지를 보는 듯한 한심함이 깃들어 있었다.
“정말 비앙카스타는 따돌림당할 때부터 느꼈지만, 눈치가 없네요.”
또 말실수한 걸까.
황녀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듯 비앙카스타의 방 안을 서성였다.
그녀가 지나칠 때마다 드레스 자락이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향기를 흩뿌렸다.
“그 천한 여자가 공작가의 남자와 어울리는 게 말이 되나요? 아무리 페이드라라지만 말이죠. 이제 또 멍청한 사람들이 그 추잡한 과부를 떠받들어 댈 텐데 당신은 생각도 없어요?”
가면을 결코 깨지 않는 황녀가 아무리 단둘뿐이라 해도 이렇게 직설전락하는 것은 두려운 법이다.
그러나 비앙카스타는 차라리 그런 곳에 격리되어 황녀를 피할 수 있다.
면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라면 잡혀갈 바에는 차라리 죽겠어요.”
자기가 시킨 주제에.
마치 남의 일처럼 말하고 있는 황녀가 증오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표출하긴커녕 제대로 노려보지조차 못한 채 비앙
“제가 어떻게 하길 바라시나요.”
“그 여자를 죽인다면 다시 생각해볼 수도 있어요.”
그건 비앙카스타에게 더는 선택지가 아니었다.
엘레노어가 와인을 넘기는 걸 본 순간.
사람을 죽여서 살아남을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제가 죽으면 전부 끝나는 거지요?”
“결국, 최악의 결론을 내리는군.”
차갑다 못해 섬뜩하기까지 한 기운이 황녀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오들오들 떨고 있는 비앙카스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아뇨. 그런 하찮은 것으로 용서받기에는 너무 큰 실패네요.”
“하, 하지만….”
“잘 들어요. 당신 하나만으로는 절대 못 끝내요.”
비앙카스타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녀의 공포를 즐기듯 황녀는 천천히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도 친구의 정을 생각해서 당신이 괴로운 장면을 보게 하진 않을게요.”
황녀는 아주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푸석해진 비앙카스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먼저 가서 기다리면 곧장 친구가 따라올 테니까 다행이에요.”
비앙카스타가 죽으면 곧장 에이드리언을 죽이겠단 말이었다.
“그럼 난 아바마마를 뵈러 가야 해서 이만 실례할게요.”
황녀가 몸을 돌리자 꼼짝도 못 하던 비앙카스타는 구르듯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황녀의 드레스 자락을 잡고 매달려 애원했다.
“제발 다른 사람에게는 손대지 마세요. 제 잘못이니까 저 혼자 죽을 게요. 절대 황녀님께 피해가 돌아가지 않게 할게요.”
그러나 황녀는 드레스 자락을 빼냈다.
에이드리언을 살릴 수 있다면 뭐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자신이 대체 무슨 힘으로 황녀의 손아귀에서 그를 구한단 말인가.
무력함과 막막함에 눈물만 솟아올랐다.
비앙카스타는 입을 벌려 목소리를 내려 애썼다.
황녀의 모든 비밀을 입 밖으로 내어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나오는 것은 기괴한 소리뿐이었다.
답답한 마음에 비앙카스타는 쟁반에 놓인 찻잔과 찻주전자를 마구 집어던졌다.
값비싼 도자기가 깨지며 갈색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 액체를 찍어 글자를 만들려고 했지만, 아무 의미도 없는 문양만 생겨날 뿐이었다.
그녀가 일으킨 소란에 방을 들여다 본 메이드는 인상을 찌푸리며 방문을 닫아 버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절망에 찬 소름 끼치는 목소리가 비앙카스타의 방을 밤새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