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화
요란한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부가 기겁해서 마차를 세웠다.
급정거에 블레인은 거의 바닥에 나동그라질 뻔했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엘레노어를 만나야 해.”
블레인은 간신히 몸을 가누고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리안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그 여자는 포기해, 리안!”
“그럴 수 없어.”
“이미 늦었어! 벌써 날이 밝았다.
고! 그 남자와 동침했을 게 분명해!”
리안이 잠시 멈칫했다.
곧 진짜 칼 맞는 거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오싹한 기운이 리안에게서 마구 뿜어져 나왔다.
감정에 기복이라는 게 있나 의문스러웠던 리안이 이렇게 화내는 모습은 난생 처음이었다.
“설령 정말이라고 해도……….”
리안의 붉은 입술 사이로 이를 악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남자 곁에 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어.”
다른 남자 품에 안겼어도 가서 매달리겠다니. 제정신이 아니다.
블레인은 사력을 다해 말렸으나 리안은 간밤에 북극곰이라도 삶아 먹었는지 괴력이 어마어마해서 저지할 수가 없었다.
질질 끌려가면서도 블레인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가서 뭘 어쩌려고 그러는데?”
“엘레노어를 만나서 직접 얘기할 거야.”
“페이드라 공작이 둘이 만나도록 내버려 둘 거 같아?”
리안은 대답 대신 검을 뽑아 들었다.
마차와 연결된 끈을 끊고 말을 타고 달려갈 모양이었다.
그의 눈빛과 검광을 볼 때 가로막는다면 페이드라 공작의 모가지는 몸통과 굿바이 키스를 나누어야 하는 신세가 될 듯했다.
“베어 버리게? 무슨 권리로? 너는 그 여자와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
블레인의 외침이 마침내 효과가 있었다.
리안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춘 것이다.
“남작 부인이 정식 교제 요청을 거절했다며? 그런데 이런 식으로 찾아가면 만나 줄 것 같아?”
사실 리안이 어마어마한 재력과 명예, 그리고 외모를 가지고 있어서 간과했지만, 그는 엘레노어에게 확실하게 거절당한 상황이었다.
조금 효과가 보이는 듯하자 블레인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남작 부인에게도 검으로 위협할 거야? 네가 그렇게 행동하면 그녀는 더 정이 떨어질 거라고.”
리안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살기도 빠져나갔다.
블레인은 다가가 그의 손에서 검을 빼앗아 들고 차분하게 등을 두들겼다.
“적당히 하고 저택으로 돌아가자.
우선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먼저야.”
블레인은 굳어 버린 리안을 추슬러서 다시 마차에 태웠다.
흔들리는 마차는 정적에 휩싸였다.
리안은 얌전해졌지만, 혼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화를 내는 리안도 그렇지만, 슬퍼하는 리안도 적응하기 어려웠다.
“잊어버려. 그 여자는 네 인연이 아닌 거야.”
살다 살다 리안을 여자 문제로 위로하게 될 날이 올 줄이야.
당연히 그를 만나게 되면 상대가 질척거리며 매달릴 줄 알았다.
그는 세계 최고의 신랑감이니까.
하지만 스카이가 나타나면 얘기가 달랐다.
무려 제국 황실과의 갈등이라는 거대한 시련을 각오해야 하는 리안과 달리 페이드라 공작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재산도 평생 쓰지 못할 만큼 많고 외모도 충분히 뇌쇄적이었다.
‘이거로 해결된 거겠지.’
남작 부인의 행태가 좀 얄밉고 짜증 나긴 하지만, 스카이에게 가 버리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었다.
리안은 낙심하겠지만, 어쨌든 황녀와 결혼할 거고 시간이 지나면 엘레노어를 잊을 것이다.
블레인이 그렇게 희망 회로를 돌리고 있을 때였다.
“포기할 수 있었으면 시작도 안 했어.”
리안의 입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
“그녀의 입으로 들을 때까진 끝난게 아니야.”
저기. 너 이미 거절당했는데.
“직접 만나서 해결하지.”
평범한 말이었으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때문에 심상치 않게 들렸다.
혹시 오늘 누구 하나 죽는 거 아닐까?
섬뜩한 예감으로 블레인의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
엘레노어는 햇살을 느끼며 잠에서 깨어났다.
잠든 기억이 없는데 이미 태양이 중천인 걸 봐서는 한낮인 듯했다.
가늘게 눈을 뜨자 낯선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여긴 어디지?’
멍하니 생각하며 시선을 돌린 엘레노어는 경악했다.
아름다운 흑발의 남자가 침대 머리 맡에 앉은 채 그녀를 내려 보고 있었다.
“잘 잤나?”
씩 웃는 그를 보자 ‘스카이 페이드라’라는 이름이 그려졌다.
동시에 어렴풋이 어젯밤의 기억이 부옇게 떠올랐다.
‘테라스에서 이 남자를 만나고 나서 분명 밖으로 나왔는데…….”
그 후가 급격히 흐릿했다.
엘레노어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내가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음. 보이는 그대로지.”
그녀는 편안한 실내복 차림이었고 스카이 역시 가운을 입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느슨한 복장으로 한방에서 함께 밤을 지새웠더라.
“놀란 기색이 없군. 이런 상황에 익숙한 건가.”
엘레노어가 침착하게 앉아 있자 스카이가 눈썹을 올렸다.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비명을 올려 봤자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왠지 그와 동침했을 거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당신의 명성이 과대평가됐다는 생각이요.”
스카이는 무슨 말이냐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굉장히 절륜하다고 들었는데 별로 몸이 힘들지 않아서.”
엘레노어의 태연한 말에 스카이 잠시 멍해졌나 싶더니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한 방 먹었군. 내 명예를 위해서라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안 되겠어.”
스카이는 유쾌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피라네타륨이란 독을 알고 있나?”
엘레노어가 고개를 젓자 그는 가볍게 설명해 주었다.
“제국 외곽에서 자라는 피라트라는 야생화를 졸여 만든 맹독이야. 마실 때는 향이 거의 나지 않지만 넘기고 나면 달콤한 냄새가 나는 피를 토하게 되지.”
“내가 그걸 먹었다는 건가요?”
“그래. 당신에게서 나는 향을 맡고 알았지.”
그의 말을 듣자 간밤의 기억이 좀 더 돌아왔다.
와인을 먹고 느꼈던 고통의 감각.
그리고 누가 그걸 자신에게 건넸는지도..
“그건 아주 귀해서 어지간한 부자가 아니라면 구할 수 없고 알고 있는 사람 자체도 드물지.”
엘레노어도 난생처음 듣는 독이었다.
“그럼 당신이 나를 구한 건가요?”
“그래. 운이 좋은 줄 알아.”
스카이는 으스대듯 말했지만, 이내 정정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사실 치사량을 먹지 않아서 살았어. 이건 해독제가 없는 독이라서 중독되면 죽을 때까지 피를 쏟아 내게 되거든.
멈췄다면 산 거야.”
그렇다고 해도 그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엘레노어는 자세를 바로 한 뒤 솔직하게 감사의 말을 건넸다.
“덕분에 아침을 맞았군요. 이 은혜는 잊지 않겠어요.”
“감사는 흔쾌히 받도록 하지. 밤새당신을 간호하느라 고생했으니까.
향기가 강해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어.”
스카이는 손가락을 내밀어 고개를 숙인 엘레노어의 턱을 올렸다.
곧 보석 같은 녹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는 엘레노어를 지긋이 응시하며 턱을 쥐었던 손가락으로 입술을 부드럽게 쓸었다.
“어찌나 달콤한지 독이란 걸 알아도 입을 맞추고 싶더군.”
그의 눈길이 묘한 열기를 띠고 있었다.
분위기가 야릇해지자 불편해졌다.
감사의 뜻으로 그의 절륜함을 체험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구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거리감이 느껴지는 인사를 건네며 엘레노어는 살며시 몸을 뒤로 뺐다.
“나를 여전히 경계하는군. 생명의 은인을 보는 시선이 아닌데.”
엘레노어는 스카이의 지적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왜 저를 도운 거죠?”
“당신이 마음에 들어서라는 대답은 부족한가?”
엘레노어는 찡그린 미간으로 답을 대신했다.
“내 말을 믿지 않나 보군.”
“저는 10대 때부터 범죄자의 과부로서 살아온 사람입니다.”
스카이가 그게 뭐 어떠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잘은 몰라도 그는 찾아오기 전에 이미 자신의 모든 이력을 조사했을 것이다.
“갑자기 나타난 고위 귀족이 애정을 표현하는 것을 진심이라 믿을 정도로 순진하긴 힘들군요.”
스카이는 그녀의 날카로운 반응에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어쩐지 흡족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 칼라브리아 백작의 애정을 거부하는 것도 그런 이유인가?”
“제가 거부한 게 아닙니다만.”
“뭐 그렇게 해 두고 싶다면 그런 것으로 해 두지.”
전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엘레노어는 중요하지 않은 걸로 그와 말씨름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친절의 대가로 공작님께서 제게 바라는 건 뭐죠?”
다시 핵심으로 돌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남자가 여자에게 잘해 주는 이유는 뻔한 게 아닌가?”
엘레노어는 스카이의 능글맞은 말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받아쳤다.
“저는 당신이 바라는 상대가 되지 못할 거예요.”
“그건 무슨 의미지?”
“당신의 침대를 데워 드릴 수 없다는 뜻이에요.”
“나를 거부하면 어쩌려고? 설마 그 몸으로 밖에 나가겠다는 건가?”
“다리는 멀쩡하니 못 할 것도 없죠.”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목숨을 구걸할 생각은 없었다.
배짱을 부리자 스카이가 두 손을 들며 시원스레 말했다.
“좋아. 그럼 내 절륜함은 당신이 그럴 기분이 되고 나면 선보이는 것으로 하지.”
그가 한발 물러서자 엘레노어는 다소 마음을 놓았다.
그녀는 다음으로 궁금한 질문을 던졌다.
“바이스 후작 영애는 어떻게 되었나요?”
“일단은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어.”
정신을 잃기 전 상황을 돌아보면 엘레노어가 독을 마셨다는 걸 눈치 챈 건 스카이뿐이었다.
“당신에게 독을 준 것은 그 영애인가?”
“아마도요.”
“호법청으로 사람을 보낼까?”
호법청은 제국의 사법부였다.
잠시 생각하던 엘레노어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일단 생각이 정리될 때까지 외부에 알리지 말았으면 좋겠어요.”
아무래도 비앙카스타의 행적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바이스 후작가를 적으로 돌리는 일은 사양하고 싶었다.
스카이는 선선히 수락했다.
“좋아. 그렇게 해 주지.”
“그리고 여러 가지 수습이 필요한 것들이 있어요. 우선 리트라엘 후작가에는…….”
“잠깐, 잠깐.”
스카이는 엘레노어의 말을 막듯 손을 세웠다.
“그런 건 천천히 하도록 해. 지금은 안정이 우선이야.”
“난 이제 괜찮은데요.”
스카이는 엘레노어를 설득하는 대신 협탁을 열더니 뭔가를 휙 던졌다.
받아보니 보석이 세공된 예쁜 손거울이었다.
“당신의 입술이 지금 내 것과 비슷해지면 그때 괜찮다고 믿어 주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입술은 피부와 비슷할 정도로 새하였다.
입술이 원래 색으로 돌아오는 게 해독이 완료됐다는 표식인 모양이었다.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스카이는 유유히 몸을 일으켰다.
“그럼 얌전히 있으라고. 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잠깐만요.”
엘레노어는 방을 나가려는 스카이를 불러 세웠다.
“부탁이 있어요.”
“뭐지?”
“가능하면 제 조수인 그레이엄 양을… 이곳으로 데려오고 싶은데요.”
“조수?”
“네. 그녀도 위험할지 모르니까요.”
사실은 여러 가지 일을 진행하는데 믿을 만한 사람의 도움이 필요해서였다.
스카이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으나 흔쾌히 수락했다.
“좋아. 데려오지. 대신 당신은 회복에 전념하도록 해.”
말을 마친 스카이는 방을 떠났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으나 그의 말대로 몸을 회복하는 게 먼저였다.
엘레노어는 그레이엄이 올 때까지 쉬기로 하고 침대에 몸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