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이른 새벽.
수도 외곽의 대로를 걷던 부인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드는 말을 보고 비명을 올렸다.
끔찍한 사고가 일어날 것처럼 보였으나 다행히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블레인은 멋진 솜씨로 말을 멈춰세운 덕분이었다.
“정말 멋진 승마 기술이군요, 손님.”
고용인이 말고삐를 받아 쥐며 칭찬했다.
블레인은 품위 있는 태도로 입을 열었다.
“쿨럭.”
멋진 모습과 상반되는 90세쯤 된 노인 같은 기침 소리가 나왔다.
밤새 말을 달려온 탓이었다.
블레인은 쑤시는 삭신을 두들기며 자신이 도착한 장소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로즈우드 파크]
탄생제 주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별로 없이 한산했다.
“어서 오십시오. 여기 안내서입니다.”
경매장 입구에서 직원이 오늘 경매하는 물품에 관한 안내서를 나눠 주었다.
한참 이곳저곳을 기웃거린 블레인은 토지 경매장에 들어섰다.
“코아톤 영지의 호숫가 농지와 공터를 매각합니다. 시작 금액은 2000골드입니다.”
주변을 둘러본지 얼마 안 되어 그는 리안을 발견했다.
나름대로 정체를 숨기려 초라한 후드에 망토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비율이 다른 데다 살짝 드러난 턱선마저 우월했다.
가릴 대로 가렸는데도 여전히 그를 힐끔거리는 귀부인까지 있었다.
블레인은 자세를 낮추고 그를 향해 접근했다.
“리안.”
리안은 경매사에게 고개를 고정한 채였지만, 뒤에서 갑자기 부르는데도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아마 경매장에 들어서자마자 존재를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그는 옆자리에 앉으라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기사단 이전할 땅 사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블레인이 묻자 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가로 복귀한다면 기사단 이전 용지 따위는 필요 없었다.
블레인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꼭 전할 말이 있어. 어젯밤에…….”
“잠깐.”
리안이 블레인의 말을 끊으며 손가락을 들었다.
두 번째 경매까지 종료되고 세 번째 물건의 경매가 시작되고 있었다.
“두 번째 소금 광산을 낙찰받은 주인공께서는 대기실로 이동해 주십시오. 그럼 다음 물건은 샨카른 호텔및 부대시설 부지입니다.”
블레인은 하려던 말을 잠시 멈추고 경매사를 보았다.
이번 물건은 블레인도 많이 들어 본 것이었다.
그곳은 황궁 앞 광장에 인접해 있어 그가 항상 지나는 곳이었다.
팜블리코 에비뉴가 인접한 데다 바로 앞에 강이 있어 전망까지 훌륭한 팰리시티 중심부의 거대한 금싸라기 땅.
호텔 시설도 훌륭하고 입지가 좋아 운영도 잘 되고 있었으나 샨카른 자작과 동업자들이 이권 다툼을 벌이다 파산한 후 매물로 나왔다.
모든 귀족이 선망하는 위치였으나, 어지간한 가문의 영지를 전부 팔아도 사기 어려운 어마어마한 가격 때문에 섣불리 매입자가 나타나지 못했다.
“다섯 번째 유찰되었으나 채권단의 요청으로 이전 가격 그대로 진행합니다.”
최근 몇몇 재벌로 유명한 가문이 연대해서 매매한 뒤 쪼개서 사용하기 위한 준비 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혹시 오늘 매각되는 건 아닐까?
호기심에 블레인은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고요하기만 했다.
“시작 가격은 1억 골드입니다.”
시작가에 블레인은 헛웃음을 지었다.
팰리시티 중심가의 저택도 10만 골드면 구입할 수 있고, 어지간한 초호화 저택도 50만 골드면 충분했다.
한숨이 나올 만큼 무시무시한 가격이었다.
‘탄생제 기간이라 다들 안 온 모양이니 오늘도 유찰되겠군.”
블레인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3, 32번 손님. 입찰하신 겁니까?”
경매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부근을 가리키고 있었다.
시선을 따라가 본 블레인은 하마터면 턱이 빠질 뻔했다.
리안이 입찰 팻말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매장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지만, 리안은 태연했다.
“세, 세 번 호가하고 낙찰하겠습니다.”
얼이 빠진 듯한 경매사가 호가하는 동안 경매장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결국, 낙찰봉이 딱 하는 소리를 냈다.
경매장의 고용인들이 다가와 두 사람을 안내했다.
“낙찰자께서는 대기실에서 대기해 주십시오.”
대기실에 둘만 남자 블레인이 참고 있던 질문을 터뜨렸다.
“너 진짜 이 땅 살 거야?”
리안은 너무나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받은 것도 없다며! 대체 무슨 돈으로?”
“내가 상속받을 수 있는 건 칼라브리아 공작만은 아니야.”
순간 블레인은 잊고 있던 사실을 되새겼다.
리안은 대륙 최고의 부. 플로이드 공작가의 하나뿐인 후계자이기도 했다.
아직 작위를 잇지는 못했으나 성인 이 되었을 때 재산의 일부를 미리 상속받았다고 들었다.
아무리 전체 규모를 파악하기조차 어렵다는 플로이드 공작가라지만 미리 받은 상속분 정도로 이런 호텔을 구입할 수 있을 줄이야.
“그럼 호텔을 사서 사업으로 기사단을 지원하려는 거야?”
그냥 그 돈으로 기사단을 운영해도 100년은 갈 테니 그편이 낫지 않냐고 권하려고 했으나 리안에게서 생각지도 못한 답이 돌아왔다.
“사업에 관심 없어. 고쳐서 저택으로 쓸 거야.”
“최고급 호텔을 저택으로 쓰겠다고?”
어이없어하는 블레인의 반응에 리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분명 저택으로 써도 손색이 없을 텐데.”
초호화 실내 장식과 우아한 가구, 그리고 각종 부대시설이 갖춰졌으니 그야말로 최고급 저택인 건 사실이었다.
“그야 당연히 좋지만, 황금 광산에 유원지 만드는 꼴이잖아! 거긴 황제 궁만큼이나 크다고! 그런 저택을 어디다 써? 호텔이라면 대충 운영해도 금화를 갈퀴로 긁어모을 텐데!”
제국에서 상업의 평가는 높은 편이었다.
귀족들도 자산을 증식하는 데 관심이 많은 편이라 최고의 입지에는 어김없이 상업 시설이 들어서 있었다.
그러나 리안의 한마디가 블레인을 말문을 막히게 했다.
“돈은 충분하니 굳이 더 필요 없어.”
장차 세계 최고 재벌 가문의 가주가 될 남자는 황금 광산에 유원지를 태연하게 만드는구나.
블레인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소심하게 토를 달았다.
“그런 짓 하면 플로이드 공작 부인에게 혼날걸?”
“어머니께서 검 차고 다니면 손 다치니까 위험하다고는 안 하셨나?”
리안이 허리에 찬 검을 살짝 흔들며 받아쳤다.
아무래도 어렸을 때 리안을 끌고 다니며 공작 부인에게 호되게 혼난 탓에 공포심이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블레인은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말을 돌렸다.
“일부만 기사단으로 쓰고 나머지는 그냥 호텔로 두지 그래? 네겐 굳이 저택이 필요하지도 않잖아.”
그러나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한 상황을 만들려면 필요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블레인이 다시 캐어물으려고 하는데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저는 로즈우드 파크의 대표 그리 즈먼 남작입니다.”
거래의 규모상 대표가 직접 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초라한 차림새의 리안을 보고 다소 당황한 듯했으나 노련한 사업가답게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 태도로 인사했다.
“실례지만 존함을 여쭤봐도 괜찮습니까?”
“일라이 매트슨.”
이름을 들은 그리즈먼 남작은 더욱 혼란에 빠진 표정이었다.
리안이 댄 이름은 그의 부관 이름이었다.
평민 출신인데다 비하인드 나이츠소속이므로 세상에 명성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 정도 건물을 인수하는 상대가 그러한 듣도 보도 못 한 상대라는 걸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인수 절차에 대해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1억 골드를, 어떤 방법으로 지불하실 계획이십니까?”
역시 바로 지불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중소 도시의 인구를 1년간 먹여 살릴 수 있는 금액이었다.
보석, 부동산, 채권 등을 몇 차례에 나눠서 지불할 지 길게 의논해야 할 터였다.
그러나 리안은 담백하게 회의를 끝냈다.
“현금과 보석으로 즉시 지불하겠습니다.”
가뜩이나 잘생긴 리안의 몸에서 후광이 보이는 것 같았다.
블레인은 사인하는 리안을 바라보며 평생 친하게 지내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그렇게 일사천리로 계약을 마친 리안과 블레인은 로즈우드 파크를 떠났다.
마차에 올라탄 리안이 블레인에게 물었다.
“할 얘기가 뭐였지?”
“어?”
“내게 할 말이 있다며?”
블레인은 너무 엄청난 일이 일어나서 잊고 있던 목적이 떠올랐다.
“네 여자의 부정에 대해 알려야 할것 같아서 왔지.”
자못 비장한 어조로 말문을 열자리안의 보라색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부정이라니? 엘레노어가?”
“그래.”
“무슨 말인지 설명해.”
목소리는 딱딱했으나 별로 믿는 기색이 없었다.
블레인은 불퉁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나 아까 리트라엘 후작 부인 저택에 갔었어. 네가 그렇게 좋아하기에 어떤 여자인가 했더니. 너와의 관계를 이용해서 고위 귀족들에게 대접을 받고 돈을 벌고 있더군.”
실망하기를 바라고 꺼낸 말이었는데 리안은 그게 뭐 어떻냐는 얼굴이었다.
“네가 뭐가 아쉬워서 그런 여자에게 구애해? 분명 예쁘기는 하지만, 외모가 전부는 아냐. 네가 찾기만 하면 그런 가벼운 여자 따위는..…….”
험담을 늘어놓던 블레인은 섬뜩한 느낌에 멈칫했다.
리안이 그만하라는 듯 무시무시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네가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었다면 검을 뽑았을 거야.”
더 말하면 정말 뽑을 기세였다.
아무리 여자가 좋다지만, 친구를 저렇게 잡아 죽일 눈으로 보다니.
블레인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툭 내뱉었다.
“그럼 그 여자가 네게 했던 걸 다른 남자에게도 하고 있다면?”
“뭐?”
“남작 부인은 어젯밤 페이드라 공작과 함께 별궁으로 향했어.”
리안이 잘생긴 눈썹을 조금 들며 물었다.
“페이드라 공작? 로베르 페이드라 대공을 말하는 건가?”
“아니. 그 아들 스카이 페이드라 말이야. 대단한 미남이던데.”
두 사람은 같은 아카데미 출신이었으므로 안면이 있을 터였다.
“왜 그 남자와 나간 거지?”
“페이드라 공작이 남작 부인에게 오늘 밤 초대하고 싶다고 했어.”
갸웃거리던 리안의 고개가 멈췄다.
그의 얼굴이 심각해졌으므로 블레인은 조금 더 자극적인 양념을 치기로 했다.
“남작 부인은 술에 취했다며 그의 품에 안겨서 나갔지. 둘 사이의 분위기가 아주 야릇하던데. 남녀가 그렇게 나갔으면 뭘 했을지는 뻔한 거 아니겠어?”
말을 마치자마자 블레인은 방금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살벌한 기운을 느꼈다.
“으악, 리안! 무슨 짓이야!”
리안이 갑자기 일어서 질주 중인 마차의 문을 벌컥 열었다.
히히히히힝~!
블레인의 비명과 함께 말의 울음소리.
이어서 찢어지는 듯한 바퀴 소리가 팰리시티의 대로를 요란하게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