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21화 (21/120)

제21화

스카이의 폭탄 발언에 사방이 술렁였다.

엘레노어는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스카이를 바라보았다.

위기에 봉착한 상태인데도 그의 접근이 달갑지마는 않았다.

‘아무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 남자가 아냐.’

그게 엘레노어가 받은 인상이었다.

스카이는 경계 중인 엘레노어에게 천천히 다가섰다.

그가 앞으로 오자 존재감에 압도된 탓인지 사람들이 조금씩 물러서 주변에 원이 생겼다.

“대답은?”

가까이에서 씩 웃는 수려한 얼굴은 분명 매혹적이었다.

‘외모가 좋다 해도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는 것은 사양이야.’

그러나 엘레노어는 거절할 여유가 없었다.

“읍.”

입을 열려는데 순간 눈앞에 캄캄해 지더니 몸이 휘청댔다.

간신히 쓰러지는 건 면했지만, 비틀대다가 그만 스카이에게 기대고 말았다.

“음? 너무 좋아서 다리라도 풀린 건가?”

스카이는 여유롭게 농담을 하며 엘레노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팔을 뿌리치고 싶어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미소 짓고 있던 스카이의 얼굴이 창백해진 엘레노어를 보고 살짝 굳었다.

그는 그녀를 조금 살피다가 곧 손에 든 와인에서 시선을 멈췄다.

“너무 빨간데.”

스카이는 그녀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와인은 이상할 정도로 빨갔다.

와인에 이상한 것이 들어 있었던 건가.

하지만 평범한 맛이었는데.

멍하니 생각하는 사이 스카이가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거의 입술이 맞닿을 지점에서 멈춘그는 숨을 들이 쉬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이 와인을 마셨나?”

나직한 물음에 엘레노어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한 모금… 흡.”

대답하려다 엘레노어는 고개를 틀고 입가를 틀어막았다.

극도의 구역감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힘겹게 억눌렀으나 입술 사이로 뭔가가 흘러나왔다.

토사물일까 해서 질색했는데 금속맛이 났다.

엘레노어는 자신이 토할 뻔한 것이 ‘혈액’임을 깨닫고 당황했다.

‘뭐지? 독?’

평소 건강했기에 달리 피를 토할 이유가 없었다.

‘누가 이런 짓을?’

중독된 와중에도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의지가 솟구쳤다.

죽인 범인을 잡아 복수하지 않고서는 죽어도 눈을 감을 수가 없다.

죽을 때가 되면 주마등이 스친다고 했던가.

엘레노어는 어째 주마등 대신 추리본능이 빠르게 회전했다.

그녀는 황급히 주변을 훑었다.

그러나 비앙카스타는 소란을 틈타도망쳤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도망쳤다면 역시 그녀가 독을 준 모양이었다.

이름 높은 제국의 악녀.

지금 생각해 보니 덜덜 떠는 게 무척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어린 소녀인 데다 애처로운 모습이 어서 아무 의심도 없이 술을 받아 마신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그럼 도중에 왜 멈춘 거지?’

비앙카스타는 계속 마시려는 엘레노어를 말렸다.

당시 그녀의 눈빛은 간절하기 짝이 없었다. 사랑뜨 영애가 부추길 때도 마시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야 할 게 많은데 속이 점점 타는 듯 아파 머리가 흐려졌다.

다 모르겠고 어쨌든 비앙카스타를 잡아 물어라도 봐야 하니 다잉 메시지라도 남길까.

그런데 비앙카스타의 머리글자가 B였나? 아니면 V?

다잉 메시지 스펠링이 틀리면 시체 옆에서 사랑뜨 자작 영애가 비웃을 것 같았다.

엘레노어가 손가락에 피를 묻히며 고민하는 사이 다시 한번 속이 뒤집혔다.

이번에는 심한 고통도 동반되어 그야말로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더는 버틸 체력이 없었다. 이대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실례.”

스카이는 짧게 말하더니 갑자기 엘레노어를 품 안에 안았다.

당황할 새도 없이 그녀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스카이가 그녀를 안아 든 것이었다. 사방에서 영애들의 부러운 탄성이 울렸다.

스카이는 그대로 엘레노어를 안은 채 천천히 홀로 내려갔다.

계단 바로 아래에 리트라엘 후작부인이 놀란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남작 부인이 취기가 올라온 모양입니다.”

“아, 그래요? 그럼 객실에 눕힐 준비를…”

“아뇨. 그녀는 오늘 밤 나와 함께할 겁니다.”

엘레노어는 그가 일부러 오해를 불러일으킬 어휘를 사용한다고 느꼈다.

스카이는 거기에 더해서 도발하듯 엘레노어를 내려 보며 물었다.

“그렇지?”

의기양양한 표정이 얄미웠다.

그러나 엘레노어는 그가 세계적으로 유명한 약초학의 대가이자 주술사임을 알았다.

‘설마 시체를 치우고 싶어서 데려가는 건 아니겠지.

지금은 살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맞춰 주는 수밖에 없었다.

“실례를 용서하세요. 리트라엘 부인.”

안 좋은 속을 억지로 억누르며 간신히 그렇게 말한 뒤 엘레노어는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스카이에게 기댔다.

리트라엘 부인이 어안이 벙벙한 기색으로 물었다.

“괘, 괜찮은가요, 부인은?”

“그녀는 내가 책임질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스카이가 씩 웃자 리트라엘 부인과 주변 여인들의 얼굴이 멍해지고 붉은 물감을 뿌린 것처럼 홍조가 떠올랐다.

그녀들의 눈빛에서 엘레노어는 연애의 신을 보는 듯한 경외감을 느낄수 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동경 어린 시선을 받으며 파티장을 벗어났다.

얼마 뒤 그들의 등 뒤로 리트라엘 후작 부인의 간절한 외침이 울렸다.

“다음 낭독회도 부디 제발 꼭 제 저택에서 해 주세요, 남작 부인이 이 이이인!”

그 뒤로 저거 다 수작이고 연기니 속지 말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는 사랑뜨 영애의 목소리도 들렸다.

필사적이던 엘레노어는 더는 버틸수 없었다.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다.

*

‘하마터면 겉모습에 속을 뻔했군.’

스카이 페이드라와 함께 떠나는 엘레노어를 본 순간 블레인이 떠올린 생각이었다.

신분이 낮다지만 충분한 기품과 영민함이 느껴졌고, 대화를 나눠 보니 뜻밖에 속도 깊은 것 같았다.

혹시 선입견 때문에 좋은 여자를 오해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머리를 드는 참이었다.

그런데 태연하게 스카이의 품에 안겨 교태를 부리는 모습이라니.

좀 전까지 멀쩡하다가 술에 취한 척하는 연기가 그야말로 일품이었다.

아무리 리안의 정식 교제를 거절했다지만, 사교계를 뒤집어 놓은 사랑의 도피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다른 남자로 갈아탔단 말인가.

심지어 리안을 어둠의 플레이로 사로잡아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어 놓고 말이다.

남자를 사로잡는 마력이 있는 건 분명하지만, 절대 엮여서는 안 될 위험한 여자였다.

‘리안에게도 이 사실을 빨리 알려 야겠다.’

아무리 사랑에 홀려 버렸다지만, , 그래도 대놓고 다른 남자에게 안겨 떠났다는 말을 들으면 정이 떨어질 터였다.

그는 영애들이 붙잡는 것도 뿌리치고 한달음에 말을 달려 저택으로 돌아왔다.

“집사! 리안은 어디 있지?”

블레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저택에 울려 퍼졌다.

집사가 황급히 달려 나와 그를 맞았다.

“백작님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대체 어디에 갔기에 아직도 안 온 거야?”

다그쳐 물어도 그가 모르는 걸 집사가 알 리가 없었다.

잠시 속을 끓이던 블레인은 다른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그는 저택 밖으로 나와 정원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어이! 어디 있어? 물어볼 게 있으니까 나와!”

그러나 정원은 고요할 뿐 어떤 응답도 없었다.

“이봐! 지키고 있는 녀석! 있는 거 다 알아! 중요한 일이라고!”

블레인이 찾고 있는 것은 리안의 개인 기사단이었다.

아마 리안은 공작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해 분명히 이 저택에도 호위를 붙여 놓았을 것이다.

있는 건 확실한데 너무 실력이 뛰어난 나머지 어디에 있는지 감이 오지 않았다.

기사단에서 나름대로 중임을 맡고는 있었지만, 사실 블레인은 처세술이 강점이지 무술은 특기가 아니었다.

“숨어 있는 거 안다니까! 빨리 좀 나오라고!”

아무도 없는 정원을 향해 소리치고 있으려니 집사가 만취한 게 아닌가 의심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주인의 위엄을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불러내야만 했다.

“나와!”

마지막으로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다 안다는 듯 있을 법한 곳을 진지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허공과 눈싸움을 한 지 얼마가 지났을까.

집사가 슬금슬금 의사를 부르기 직전이 됐을 때쯤 다행히 정원 구석에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예상대로 비하인드 나이츠의 갑옷을 입은 남자였다.

블레인은 집사에게 이거 보라는 눈빛을 던진 뒤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이리 와 봐! 좀 물어볼 게 있어!”

곧 남자가 가까이 다가왔다.

홀에서 흘러나온 불빛을 받자 험상궂은 그의 얼굴에 선명하게 그어진 끔찍한 흉터가 드러났다.

누가 최강 기사단의 일원이 아니랄까 봐 전신에서 방금 어디서 사람을 생매장하고 온 것 같은 살벌한 기운이 풍겼다.

그의 품격을 확인한 블레인의 태도가 급격히 정중해졌다.

“혹시 아까 연회장에서 일어난 일을 봤나… 요?”

남자가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블레인의 호위를 담당 중인 모양이었다.

봤다면 설명할 수고를 던 셈이었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 페이드라 공작과 연회장을 떠난 사실을 리안에게 전했습니까?”

“단장님께서는 감시가 아니라 호위만을 명하셨습니다.”

엘레노어의 사생활을 침해하지 않도록 명령 범위 내에서만 움직이게 지시한 모양이었다.

하여튼 검귀들은 융통성이 부족하다. 블레인은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리안은 어디 있습니까?”

“그건 대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지 말고 좀 말해 줘요.”

“안 됩니다.”

계속 실랑이를 벌였지만 남자는 완고하게 버텼다.

“당신은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나는 태연하게 다른 남자랑 자러 가는 여인에게 리안이 청혼하게 둘 수 없어!”

참다못한 블레인은 그에게 덤벼들어 목덜미를 잡았다.

“계속 말 안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최대한 무섭게 협박하며 온 힘을 다해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남자는 산들바람을 맞은 800년 묵은 고목나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잠시 용을 쓰던 블레인은 쓸데없는 짓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냥 놔두면 리안이 상처받을 텐데. 당신은 그래도 괜찮아?”

블레인은 슬며시 손을 풀며 물었다.

그리고 그의 색이 옅은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덧붙였다.

“…요.”

남자는 입을 비죽였으나 곧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 역시 리안이 그렇게 되는 건 싫은 모양이었다.

“단장님께서는 로즈우드 파크 경매장에 가셨습니다.”

“경매장?”

로즈우드 파크.

그곳은 세상의 모든 것을 출품할 수 있다는 제국의 종합 경매장이었다.

자산가들의 수집품이나 보석을 거래하는 ‘대 옥션’이 분기별로 있었지만, 대체로 죄를 저지르거나 빚을 지고 갚지 못한 이들의 자산을 압류해 처분하는 곳이었다.

값이 싸고 별의별 물건이 다 있어서 뭔가 구하는 게 있으면 꼭 들러야 할 곳이었지만, 수도 구석에 있어 말을 타고 가도 수 시간이 걸릴 정도로 멀었다.

“거기는 대체 왜 갔어요?”

“근처 호텔에서 묵으신 후 내일 경매에 참여하실 것입니다.”

리안이 경매장에서 대체 뭘 사려는 걸까.

짐작도 가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만 급해졌다.

내일은 탄생제 마지막 날.

그를 한시라도 빨리 제자리로 돌려 놓고 싶었다.

블레인은 말에 올라타 어둠에 잠긴 팰리시티를 가로질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