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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20화 (20/120)

제20화

‘제길. 안 보이잖아.’

2층인데도 사람들이 겹겹이 서 있는 데다 각종 장식 때문에 바로 확인할 수가 없었다.

혹시 엘레노어는 뭔가 알까 싶어 휙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직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지금은 진짜 리안이 왔는지 더욱 신경쓰였다.

블레인은 그녀를 테라스에 둔 채 홀로 돌아왔다.

인파를 헤치고 앞으로 나가자 곧 감탄 섞인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 스카이 페이드라 공작님이 오셨습니다!”

리안이 아니라는 말에 블레인은 안심했으나, 이내 곧 다시 놀라움에 물들었다.

스카이는 성인이 되고 나서 전혀 제국의 파티에 참여하는 법이 없었다.

‘저 남자가 왜 여기에 온 거지??

소문이 온통 위험하고 종잡을 수 없는 남자라 갑작스러운 등장이 불안했다.

그러나 블레인과 달리 파티의 분위기는 물씬 달아올랐다.

“저 그분 보는 거 처음이에요!”

“꺄, 저도요. 우리 앞으로 가서 인사해요.”

수려한 외모로 유명한 고위 귀족의 등장은 모든 이를 흥분하게 만들었다.

들뜬 영애들을 보며 블레인은 입술을 비죽거렸다.

‘그래 봤자 리안에 비하면 별 볼일 없을 텐데.’

약간의 질투심과 친구에 대한 자부 심이 치솟았다.

어디 얼마나 대단한지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블레인은 뒤로 물러나지 않고 자리를 지켰다.

곧 키가 큰 남자가 홀 중앙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블레인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제국의 별 리안 플로이드 칼라브리 아와 대칭되는 소국의 보석.

샹들리에 불빛을 받고 선 스카이 페이드라는 그야말로 감탄이 나올 지경이었다.

페이드라 공국의 전통 복식을 하고 있었는데, 피부를 드러내지 않는 하스카토르 제국의 보수적인 복식과 달리 옷자락이 느슨해 탄탄한 가슴과 팔 근육이 드러나 있었다.

귀족답지 않은 야성과 색기는 남자가 보기에도 치명적이었다.

외모만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존재감은 리안 이후로 처음이었다.

“후작 부인에게 가네요.”

옆에 있던 귀족 여인이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스카이는 천천히 다가와 저택의 주인인 리트라엘 후작 부인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갑작스러운 방문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국적인 억양의 성량이 풍부한 목소리였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사교계의 여왕답게 리트라엘 후작부인은 스카이가 손등에 키스하는 동안에도 고상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앞에 놓인 라즈베리 젤리처럼 목덜미가 붉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같이 별실로 들어가 대화를 나누시겠어요?”

리트라엘 후작 부인의 별실은 정말 특별한 사람들만 초대되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스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실례지만, 저는 이곳에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왔습니다.”

“그게 누구지요?”

파티 모두가 숨을 죽이며 답을 기다렸다.

스카이의 입에서 다시 예의 인상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은 어디 있습니까?”

*

떠들썩한 홀의 상황을 모르는 엘레노어는 오직 방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슬슬 나가도 되려나.’

떠들썩한 틈을 타 슬쩍 나가려던 엘레노어는 당황했다.

커튼 너머로 키가 큰 남자의 실루엣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번엔 또 누구야?’

추측할 새도 없이 커튼이 걷혔다.

드러난 남자의 얼굴을 보고 엘레노어는 무척 당황했다.

남자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미남이었다.

“당신이 소문 속의 주인공인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데 남자가 입을 열었다.

‘외국인?’

억양을 볼 때 제국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하대를 볼 때 상당한 고위 귀족인 듯했다.

“당신은 누구신가요?”

엘레노어의 물음에 남자가 수려한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스카이 페이드라.”

이름을 듣자마자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을 꿀꺽 삼키고 있는 엘레노어에게 스카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만나게 되어 영광이야. 엘레노어 남작 부인.”

그는 엘레노어의 손목을 잡았다.

매끈한 인상과 달리 마디가 불거진 남자다운 손이었다. 제법 검술을 익히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는 엘레노어의 손등에 입술을 맞췄다. 제국과 다른 페이드라식 인사법이었다.

“듣던 대로 무척 아름답군.”

그쪽이야말로 심장이 떨릴 정도로 매력적인 태도였다.

엘레노어는 정신을 다잡았다.

지하 세계의 왕자라는 이 남자의 위험한 소문을 생각하면 설레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걸 반증하듯 스카이의 입은 칭찬하고 있었지만, 눈은 조금도 웃고 있지 않았다.

“공작님이야말로 소문 그대로시군요.”

건조하게 칭찬을 돌려준 뒤 엘레노어는 손목을 뒤로 물렸다.

“바람을 쐬러 나오셨나요?”

그렇다고 하면 자리를 비켜 주겠다.

고 할 생각으로 물었다.

그러나 스카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당신과 이야기하러 나왔는데.”

“저와 이야기를요?”

슬쩍 둘러보니 창가에는 이미 많은 구경꾼이 몰려 있었다.

리안이 찾아왔던 밤의 데자뷔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듣자 하니 칼라브리아 백작과는 하룻밤의 일탈일 뿐이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

뭔가 거창한 화제가 나올 줄 알았는데 가십인가.

그러나 잡담이라기에는 눈빛이 마음을 꿰뚫어 보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사실이 아니라면 왜 그리 말하겠어요?”

“글쎄. 그냥 그렇게 보이고 싶은 건지도 모르지.”

의미심장한 말투.

거짓말을 하면 어려운 상대지만, 진실이었기에 딱히 감출 것도 없었다.

“저는 칼라브리아 백작님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예요.”

엘레노어는 침착하게 대답한 뒤 일부러 무례하게 덧붙였다.

“명성 높은 페이드라 공작님께서 여인들이나 좋아할 가십거리에 흥미가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이렇게 해 두면 화가 나서 더는 말을 걸지 않겠지.

그러나 스카이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내가 관심을 두는 건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야.”

그럼 뭐냐고 물으려는데 스카이가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바로 당신이지.”

이건 무슨 말이지?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시간을 내줄 수 있겠나?”

바로 앞에서 바라봐도 스카이의 바다색 눈동자에서 속내를 읽어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가까이하면 위험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러나 고위 귀족의 초대를 감히 거절하긴 어려웠다.

“제안 진심으로 감사합니다만, 한동안은 여러 가문과 약속을 잡아 두었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맞을 때 초대해 주신다면 기꺼이 찾아뵙겠습니다.”

일단 거리감을 두기 적당한 말로 선을 그었다.

“그럼 저는 이만 실례하죠.”

엘레노어는 서두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애쓰며 테라스를 벗어났다.

등에 스카이의 시선이 따끔거릴 정도로 느껴졌다.

테라스를 벗어나자 압박에 가깝던 긴장이 풀렸다.

걸음을 재촉해서 빠르게 홀로 통하는 계단 쪽으로 걸었다.

모퉁이를 도는 순간 엘레노어는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에 깜짝 놀랐다.

“나, 남작 부인!”

그것은 새카만 머리카락을 한 자그마한 소녀였다.

소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한 잔의 와인을 내밀며 더듬더듬 말했다.

“저, 저는, 부인의 오랜 팬인데…

와, 와인을…….”

제국에서는 동경하는 사람에게 와인 한 잔을 건네는 걸 영광으로 여겼다.

엘레노어 역시 수없이 와인을 받았으나 이토록 긴장해서 주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손이 어찌나 덜덜 떨리는지 와인이 쏟아질 지경이었다.

몰래 따라와서 혼자가 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차마 어린 소녀의 이런 정성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엘레노어는 잔을 받아 든 뒤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그녀가 한 모금 와인을 넘겼을 때였다.

“자, 잠깐.…!”

소녀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엘레노어를 멈췄다.

엘레노어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자 소녀가 설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엘레노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소녀의 입에서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기괴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괜찮아요? 무슨 문제라도…….”

걱정스러운 물음에 소녀는 고개를 마구 저으며 목을 부여잡았다.

마치 목소리를 짜내려 해도 도저히 나오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섬뜩한 모습에 엘레노어가 그녀를 부축하려는 때였다.

“어머나!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 나왔어요!”

하필 계단을 올라오던 영애 하나가 그녀를 발견해 버렸다.

그러자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그녀를 향해 몰려왔다.

사람들이 다가오자 소녀는 화들짝놀라더니 어쩔 줄을 몰랐다.

당장 도망가고 싶은 듯했으나 이내 인파에 둘러싸여 오도가도 할 수 없었다.

엘레노어는 수줍어하는 그녀를 등뒤로 감춰 주었다.

곧 인파 속에서 블레인과 사랑뜨자작 영애가 모습을 드러냈다.

“남작 부인. 페이드라 공작님이 왜 당신을 찾는 겁니까?”

블레인이 의심스러운 얼굴로 다그쳐 물었다.

“직접 물어보시지요.”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었다.

할 말이 없어 대답을 회피하자 곧장 사랑뜨 자작 영애의 비꼬는 목소리가 날아왔다.

“별일 없었으면 그냥 없었다고 하면 될 텐데. 또 이렇게 입을 꾹 다물어서 있어 보이게 만들고 알맹이 없이 책만 팔 모양이군요.”

사랑뜨 자작 영애는 엘레노어에게 시비를 거는 것만으로 부족한지 앞에 선 소녀에게도 비아냥거리는 말을 던졌다.

“여기 이 사람은 또 누구죠? 새로 숨겨 둔 친구신가요?”

“내 책의 팬이에요. 그분은 내버려 둬요.”

엘레노어가 딱 자르자 사랑뜨 자작영애는 더욱 비위가 상한 표정을 지었다.

“팬이라니. 이봐요, 아가씨. 그런 책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되니까 읽으려면 ..”

책을 빼앗아 들려던 사랑뜨 자작영애가 소녀를 보고 멈칫했다.

그녀의 당황한 표정은 곧 혐오의 빛으로 변하더니 이내 비웃음으로 번졌다.

“하하. 인제 보니 남작 부인에게 딱 어울리는 팬이었군요.”

이건 또 무슨 뜻이지?

의아해하고 있는 엘레노어의 앞에서 사랑뜨 자작 영애는 다른 사람에게도 잘 들리게 외쳤다.

“여러분. 바이스 후작 영애께서 엘레노어 남작 부인의 열렬한 팬이시랍니다!”

바이스 후작 영애란 말에 엘레노어는 입술을 깨물었다.

비앙카스타 바이스.

반년 후 황실모독으로 공개처형을 당하게 될 원작의 악녀였다.

그간 수많은 파티에 다녔지만, 비앙카스타는 황녀를 포함한 고위 귀족 가문의 영애 모임에만 참석할 뿐 집에서 나오지 않아 만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

‘이런 어린 소녀가 악녀라니.

엘레노어도 그녀의 악명을 많이 들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니 믿기가 무척 어려웠다.

너무나 가녀리고 또래보다 훨씬 작은, 그저 연약한 소녀로만 보일 뿐이었다.

겁이 나기보다는 오히려 이렇게 어린 소녀가 곧 죽을 운명이라니 어딘지 오싹했다.

섬뜩해 하고 있는데 사랑뜨 자작영애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와인은 팬이 주신 건가요? 깨끗이 비우셔야죠.”

그 말을 듣고서야 엘레노어는 비앙카스타가 준 와인을 마셨다는 걸 자각했다.

기분 탓인지 속이 역했다.

비앙카스타를 흘깃 보자 그녀는 것 같은 얼굴로 보일 듯 말듯 고개를 저었다.

의미는 모르겠지만, 마셔서는 안될 것 같았다.

“뭐 하세요? 그러다 팬이 울겠다고요.”

그러나 사랑뜨 자작 영애의 주동 때문에 마셔야만 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갑작스러운 악녀와의 만남으로 당황한 엘레노어를 구원한 것은 잘 울리는 저음의 목소리였다.

“시간이 맞으면 기꺼이 찾아뵙겠다고 했지?”

테라스 쪽에서 스카이가 걸어 나오며 말했다.

“그렇다면 오늘 밤 당신을 초대하고 싶은데.”

사랑뜨 영애의 입이 놀라움으로 벌어지는 게 보였다.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눈을 빛내고 있는 블레인의 모습이었다.

“설마 이후의 예정은 없겠지? 엘레노어 남작 부인.”

엘레노어를 바라보는 스카이의 바다색 눈동자가 처음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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