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탄생제 다섯 번째 밤의 황궁 연회장은 을씨년스러울 정도로 휑했다.
작년보다 훨씬 많은 선물이 사방에 쌓여 있었지만, 사람이 없으니 막대한 제물을 뿌려 만든 화려한 연회장과 수북이 쌓인 진상품이 도리어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애초에 주인공인 황녀가 몸이 좋지 않다며 참석하지 않은 파티였으니까 당연했다.
체면치레와 성의 표시를 위해 참석한 이들조차 적당히 자리를 지키다 도망치듯 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렇다고 귀족들이 갑자기 파티를 싫어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
팰리시티의 밤은 여전히 들썩였고, 그 중심에는 리트라엘 후작 부인의 저택이 있었다.
챙!
“어머, 저기.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 내려오고 있네요.”
드디어 기다리던 장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블레인과 모든 사람의 시선이 홀중앙의 계단으로 쏠렸다.
블레인은 엘레노어와 몇 번 파티에서 스쳐 지나간 적이 있으므로 금방 알아보았다.
‘예쁘긴 정말 예쁘군.’
한마디 해 주러 온 건데 얼굴을 보니까 날이 서 있던 마음이 누그러기의 루비가 박힌 우아한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리트라엘 후작 부인이 그녀를 잡아 두기 위해 과감하게 투자한 모양이었다.
‘하룻밤 보낸 것으로 꽤 많은 걸 챙겼군.’
블레인은 의식적으로 남작 부인을 미워하려 했다.
우아한 겉모습과 달리 속은 시커멓지 않은가.
리안은 아버지와 다투고 영지에서 엘레노어가 한순간에 분위기를 바꿔 버리자 사랑뜨 영애가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는 게 얼마나 갈지 두고 보자고.”
아무래도 두고두고 엘레노어를 공격할 심산인 듯했다.
곧 댄스가 시작되고 파티의 분위기가 왁자지껄하게 분산되었다.
‘똑똑한 여자인 건 확실하네.’
명성답게 리안을 이용하지 않고도 간단히 좌중을 휘어잡을 카리스마가있어 보였다.
블레인은 계속 그녀를 관찰하다가 혼자 2층 테라스로 통하는 계단에 오르는 모습을 포착했다.
따로 대화를 나눌 기회였다.
그는 눈치를 봐서 슬쩍 그녀를 따라갔다.
“이봐요.”
홀로 선 엘레노어에게 거칠게 말을 걸던 블레인은 움찔했다.
달빛에 비친 엘레노어 남작 부인의 모습은 홀에서와 무척 달랐다.
당당하고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 같은 도도한 면모 대신 무척 아련한 소녀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모습은 아주 짧은 순간 뿐이었다.
블레인의 존재를 확인한 엘레노어는 곧 표정을 바꾸었고, 금방 원래의 우아하고 도도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이시죠?”
엘레노어의 물음에 블레인은 잠시 멈칫했다.
마음을 굳히고 왔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하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위 귀족일 뿐인데 이상할 정도로 기품이 있었다.
“왜 리안이 당신에게 진심이란 말을 안 하는 겁니까?”
미리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질문이 블레인의 입에서 나왔다.
“의미를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들은 바에 따르면 분명히 당신에게 정식 교제를 신청했을 텐데요.”
엘레노어가 수상히 여기는 얼굴을 하자 블레인은 뒤늦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나는 블레인 켄터베리 자작이라고 합니다.”
그는 제국에 리안의 하나뿐인 친구로 무척 유명했다.
엘레노어는 잠시 굳은 표정을 짓더니 질문으로 답을 돌려주었다.
“굳이 그런 말을 해야만 하나요?”
“했다면 하룻밤의 인연을 억지로 붙잡고 있다는 모욕은 당하지 않았을 겁니다.”
블레인의 지적에 엘레노어는 침착하게 답했다.
“잠깐 체면을 세우기 위해 황녀 전하의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겠지요.”
리안에게 버려진 연기를 해서 황녀의 체면을 세워 주는 건가.
과연 사교계에서 어린 나이부터 살아남아 온 여인다운 처신이었다.
“그래서 리안을 당신과 하룻밤 보내고 버린 파렴치한으로 만들고 있는 겁니까?”
“아무도 백작님을 파렴치한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거절했다는 말이 도는 게 백작님께는 더 누가 되겠지요.”
“그럼 리안을 위해서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겁니까?”
엘레노어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대답했다.
“백작님의 진심에 대해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건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리안에게 예의를 지키고 싶다면 이런 곳에 오지 않는 게 나을 거 같습니다만.”
“이런 곳에 오는 게 제 직업입니다만.”
블레인이 탓하는 어조로 말했다.
“부인은 한동안 자중하기에 충분한 재산이 있을 텐데요.”
“나를 지키기에는 충분하지 않아요.”
“리안이 당신을 지켜 줄 겁니다.”
“백작님과의 관계는 전부 정리했는 걸요. 마음을 거절하고 호의만 받을 수는 없겠지요.”
트집을 잡으러 왔는데 대화를 나눌수록 할 말이 사라졌다.
그녀의 생각과 처신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리안이 청혼하려는 걸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혹시 내가 뭔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걸까.’
블레인이 다시 뭔가 입을 열려는 때였다.
갑자기 연회장이 떠들썩해졌다.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요.”
엘레노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더니 커튼 틈으로 홀을 살폈다.
“입구 쪽에 사람이 몰려 있네요.
누가 들어오고 있는 것 같은데.”
이미 초대한 손님 이상으로 몰려들어 연회장은 초만원이었다.
이 상황에서 들어올 수 있는 건 파티의 격을 높여 줄 수 있는 수준의 초고위 귀족뿐이었다.
홀 안쪽에서는 환호성까지 울리고 있었다.
이만한 반응을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블레인의 머릿속에 가장 유력한 후보가 곧바로 떠올랐다.
‘리안!’
블레인은 황급히 문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