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비앙카스타는 창백한 얼굴로 황궁을 가로질렀다.
품 안에 든 상자가 마치 가시라도 돋친 듯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그것을 몸에서 떼어 놓고 싶어 견딜 수 없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을 때였다.
“안녕하십니까. 바이스 후작 영애.”
돌아본 비앙카스타의 창백한 뺨이 살짝 붉어졌다.
연회 때 만나 함께 춤을 추었던 에이드리언 유니스였다.
악몽 같은 현실 속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그녀에게 위안이 되는 상대였다.
“황녀 전하를 만나러 가는 중입니까?”
“네. 유니스 님은……….”
“저는 아버님의 심부름으로 왔습니다.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 괜찮으시면 함께 갑시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함께 걷기 시작했다.
“내일도 연회에 참석하세요?”
“네. 저야 탄생제 참석을 위해 방문한 것이니까요.”
“그럼 곧 돌아가시나요?”
“그렇습니다.”
비앙카스타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것을 보고 에이드리언이 흰 이를 내보이며 웃었다.
“하지만 곧 돌아올 겁니다. 저는 제국 기사단에 지원할 생각이니까요.”
그 말을 듣자 자중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화색이 도는 것을 감출 수 없었다.
비앙카스타는 그와 대화를 나누는 게 무척 좋았다.
유니스는 친절하고 예의 바르며 비앙카스타의 안 좋은 평판을 몰랐다.
상대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지 않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물론 그의 껑충 큰 키와 소년다운 장난기가 남아 있는 매력적인 미소도 한몫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에이드리언 역시 비앙카스타가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조금 더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그는 헤어질 때가 되자 아쉬운 기색을 보이며 제안했다.
둘은 사절 일행의 숙소로 가는 길목을 한참 더 벗어난 곳까지 함께 걸었다.
동행이 아닌 배웅이 되자 얼굴이 더욱 뜨거워졌다.
한 걸음, 한 걸음 걸을 때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황녀 전하께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에이드리언은 더 함께할 수 없는 곳까지 바래다준 후에야 돌아섰다.
이 짧은 만남으로 마냥 무겁던 기분이 조금 밝아졌다.
‘만일 에이드리언과 맺어진다면.
겨우 만난 지 일주일 됐는데 너무 마음이 앞서 나갔다.
하지만 그는 비앙카스타에게 명백한 호의를 보내고 있고, 둘의 신분차도 적당하니 무리한 생각은 아니었다.
그와 결혼해 제국 남부로 간다면 다시는 더러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제국민이라면 누구나 수도에서 살길 원했으나 비앙카스타는 이 지옥같은 팰리시티를 떠나 먼 땅으로 떠날 수 있다면 모든 걸 포기해도 좋을 것 같았다.
이번 심부름이 마지막이라면 견딜 수 있다.
다소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비앙카스타는 황녀 궁으로 들어섰다.
“왔어?”
황녀가 반가운 얼굴로 비앙카스타에게 달려왔다.
“어떻게 됐어?”
“구해 왔어요.”
기뻐하는 황녀의 얼굴이 마치 봉제인형이라도 받은 듯 해맑아서 소름이 끼쳤다.
“여기 있어요.”
비앙카스타는 은빛으로 세공된 작은 상자를 품에서 꺼냈다.
얼핏 소녀다운 보석함으로 보였지만, 그 안에 든 것은 무색무취 맹독인 ‘피라네타륨’ 이었다.
그것을 황녀에게 내밀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어머! 그걸 왜 내게 주는 거야?”
“네? 하지만.….”
“그건 비앙카스타가 필요해서 받아 온 거잖아?”
조금 본래의 색을 찾았던 비앙카스타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분명 어제 황녀가 티파티에 온 비앙카스타에게 어떤 이를 찾아가 ‘물건’을 받아 올 것을 암시했다.
그러나 황녀는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해가 있었나 봐. 비앙카스타는 알잖아? 나는 절대 그런 사악한 짓못 하는 거.”
“그럼… 다시 가서 돌려드리고 올게요.”
비앙카스타는 독약 따위를 사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돌아서자 황녀가 불러 세웠다.
“왜 그렇게 서둘러? 그러지 말고 잠시 나랑 얘기나 나누자.”
어쩐지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나 오늘도 잠도 제대로 못 잤어.
너무 속상해서 말이야.”
비앙카스타는 천천히 다가오는 아일린에게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쳤다.
“나 말이지. 절대 그런 건 못 하지만, 상상해 봤어. 그 나쁜 여자가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계기가 있으면 좋겠다고.”
나쁜 여자.
엘레노어 남작 부인을 뜻하는 게 틀림없었다.
“계기요?”
“그래. 그런 사람은 혼이 나야 자기 행동을 돌아보는 법이니까.”
황녀가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상상만으로 말이야. 저게 우연히 그녀의 잔에 들어가 버리는 거야. 내가 모르는 곳에서 누군가 나를 기쁘게 하려고 그런 짓을 벌이는 거지.”
혼을 낸다지만, 이건 향수에 구정물을 섞거나 의자 다리를 잘라 놓는 정도의 괴롭힘이 아니었다.
‘살인’이었다.
그러나 황녀의 표정은 마치 짓궂은 장난을 꾸미는 소녀 같았다.
“그렇게 해 줄 진정한 친구가 내 곁에 있을까?”
황녀가 사랑스럽게 웃으며 비앙카스타를 바라보았다.
마음속에서 마구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싫어. 하기 싫어.”
분명 자발적으로 약을 타게 하고 만일의 경우에는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게 분명했다.
누명을 쓰기도 싫지만, 죄를 짓는 게 더 싫었다.
약을 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죄책감이 치밀어 올랐다.
설령 자신이 죽는다 해도 살인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비앙키는 좋은 친구가 새로 생긴 거 같더라.”
거절하려던 비앙카스타가 멈칫했다.
“저는 황녀님 외에 친구는 아무도 없어요.”
“글쎄. 어쩌면 아주 멀리서 온 사람과 새롭게 친구가 됐을 수도 있는 거잖아.”
점점 굳는 비앙카스타의 표정과 대조되게 황녀의 표정은 점점 밝아졌다.
“비앙키에게 나보다 더 좋은 친구가 생기면 난 속상할 거야.”
“…….”
“그런 사람 없어지길 바랄지도 몰라.”
황녀의 웃는 얼굴 너머로 끔찍한 시체가 된 에이드리언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녀를 거스르다 수도 외곽의 숲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이들은 수도 없었다.
“내 가장 좋은 친구로 있어 줄 거지?”
에이드리언을 죽게 둘 수는 없었다.
비앙카스타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턱이 벌벌 떨려서 마치 발작처럼 보였다.
아일린은 두려움으로 뻣뻣해진 비앙카스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리고 꼼짝도 못 하는 그녀의 소매를 스르륵 걷어 올렸다.
“웃.”
비앙카스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피부에는 상처 대신 선명한 붉은 각인이 있었다.
이것이 비앙카스타가 아일린에게 조금도 반항할 수 없는 이유였다.
침묵의 각인.
이것을 어루만지며 ‘비밀’이라고 말한 것에 대해 절대로 발설할 수 없는 서약이었다.
서약에는 상호 간의 동의가 필요했다.
비앙카스타는 황녀에게 돌아오던 날 이것에 동의하고 말았다.
황녀의 손길이 각인에 닿자 비앙카스타는 꿈틀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비앙카스타가 가진 약도, 비앙카스타가 앞으로 하게 될 일도 전부 비밀이야. 알고 있지?”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손길이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보다 훨씬 끔찍했다.
각인은 붉게 빛을 발하더니 사그라들었다.
이로써 비앙카스타는 오늘 황녀의 부정을 아무에게도 밝힐 수 없게 되었다.
의식을 마친 뒤 황녀는 몸을 뒤로 물렸다.
“고마워. 비앙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정말 진심으로 고마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더 끔찍했다.
비앙카스타는 도망치듯 황녀 궁을 나왔다.
비척비척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참고 있던 눈물이 흘렀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그러나 각인은 특별한 주술을 쓰지 않으면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밖에 없어.”
더는 나쁜 짓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에이 드리언이 죽는다.
비앙카스타에게는 그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전할 방법도 없었다.
이제는 부모조차 그녀를 믿지 않았다.
세상 모두가 그녀를 거짓말쟁이, 악녀라고 믿었으니까.
‘혼자 죽어서 끝낼 수 있을 때 끝냈어야만 했는데.’
아직 소녀인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슬프고 힘들었다.
누군가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비앙카스타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으나 쉽게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서글픈 울음소리를 감추기 위해 쿠션에 얼굴을 묻었다.
탄생제가 진행 중인 거리는 해가 채 지기도 전부터 들뜬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창가에 나른하게 기댄 채 바깥을 내려다보고 있던 스카이는 인기척에 입을 열었다.
“알아냈나?”
“네.”
제니트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칼라브리아 백작의 염문 상대는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라는 과부라고 합니다.”
스카이가 잘생긴 눈썹을 살짝 치켜들었다.
그 이름이라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외국까지 이름이 알려졌을 정도로 제국의 사교계를 주름잡는 여자다.
‘정말 의외의 상대로군.”
그런 여자에게 빠졌다면 정말 리안이 노련한 요부의 치마폭에 휩쓸려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둘은 아직도 함께 뒹굴고 있는 거야? 칼라브리아 공작은 그걸 좌시하고 있나?”
“그건 아닙니다. 남작 부인은 현재 칼라브리아 백작과의 관계가 끝났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고 합니다.”
“뭐? 그렇게 소란을 피워 놓고 벌써 끝났다고?”
“남작 부인의 주장은 그저 하룻밤의 일탈일 뿐이라고 합니다. 자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함구하겠다고 하더군요.”
별일이 없어서 함구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혹은 뭔가를 감추고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리안이라는 남자의 됨됨이를 볼 때 스카이는 후자에 훨씬 의심이 갔다.
“정말 헤어졌나?”
“정확히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확인할 수 없다니? 서로 밀회하는지는 뒤를 밟아 보면 금방 알아낼 수 있잖아?”
스카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미행 한 번 안 해 보고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적당히 모은 정보 따위를 보고하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접근 도중 남작부인을 주변에서 지키는 세력이 있는 것 같아 보고드리러 온 겁니다.”
“지키는 세력?”
“정체는 알 수 없지만, 아주 실력이 좋은 자들입니다. 더 접근하면 우리가 감시 중이라는 것을 알아챌까 봐 더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뒷공작에 익숙한 스카이의 밀정은 일개 남작 부인의 심복에게 잡힐 만큼 허술하지 않았다.
해치려는 것도 아니고 감시조차 못할 만큼 철저한 경호가 가능한 사람은 제국에도 얼마 없을 것이다.
“리안 칼라브리아로군.”
스카이의 추측에 제니트도 동조하는 기색이었다.
“헤어졌다면서 왜 그녀의 곁을 지키는 거지?”
“헤어진 것으로 위장한 게 아닐까요? 수도가 발칵 뒤집힌 것에 뒤늦게 겁을 먹고 거리를 두고 있겠지요.”
스카이는 제니트의 추측에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그가 아는 리안 칼라브리아는 그런 식으로 남의 눈치를 보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게 멍청하지도 않았다.
“수도가 발칵 뒤집힐 걸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있나? 인제 와 그럴 거라면 처음부터 몰래 만났겠지.”
“그렇다면 왜 두 사람이 관계를 부인하는 걸까요?”
제니트의 질문에 답하기엔 정보가 부족했다.
확실한 건 그들이 밝히는 것처럼 단순한 놀이나 일탈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스카이는 엘레노어 남작 부인에 더욱 흥미가 솟구쳤다.
그녀의 무엇이 그 무심한 남자를 움직이게 한 걸까.
“우리가 쫓고 있다는 사실을 칼라 브리아는 아직 모르는 거지?”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제니트가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밀정에 따르면 저희 말고도 그녀를 쫓는 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가까이 가지 않았으니 그들과 한패라고 생각할 겁니다.”
“다른 미행이 또 있었다고?”
“네. 다만 그쪽은 뒤를 밟는 게 목적이 아니라 암살이 목적인 것 같았습니다. 아직은 감히 시도하지 못하고 있지만요.”
“누군지는 알아냈나?”
“정확하지는 않지만, 특유의 몸놀림을 볼 때 칼라브리아 공작의 사병으로 추정됩니다.”
공작이 직접 나섰다면 더더욱 관계가 끊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하루 놀아난 상대를 죽이려고 암살자를 심지는 않을 테니까.
죽이려는 자와 지키려는 자.
그리고 그것을 남몰래 지켜보는 자라….….
“아무래도 틈새를 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스카이는 낮게 중얼거린 뒤 다시 물었다.
“지금 리안은 어디에 있지?”
“현재 리안 칼라브리아 백작은 캔터베리 자작의 저택에 머물고 있다.
고 합니다.”
“사람이 현재 만나고 있진 않은 거지?”
“네. 아직까지는.”
답을 들은 스카이는 바로 명령을 내렸다.
“최정예로 밀정을 조직해서 남작부인에게 다시 붙여 놔. 지키는 이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을 정도만 접근해서 감시해.”
“네. 공작님.”
제니트는 대답하고 곧 방을 떠났다.
‘뜻하지 않게 낚싯대를 드리운 셈이군.’
그의 머릿속에는 심술궂은 계획이 가득했다.
위험 부담 없이 리안 칼라브리아가 원하는 여자를 손에 넣을 절호의 기회였다.
일이 어그러져도 그는 자신의 공국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그럼 레이디를 모시러 가 볼까.”
스카이는 미소를 지으며 나른하게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