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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17화 (17/120)

제17화

찰칵.

날카로운 소리가 날 때마다 가지에 피어 있던 아름다운 꽃송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황녀궁 앞의 장미 정원은 아일린이 직접 손질해서 가꾸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황녀가 꽃을 향해 잔뜩 화풀이를 하고 있을 때 황녀 궁으로부터 시녀장이 걸어 나왔다.

“황녀 전하. 영애들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상냥하게 말하던 케이트 시녀장이 멈칫했다.

황녀의 뒤로 수북이 쌓인 장미들과 앙상한 가지만 남은 꽃나무가 솟아 있었기 때문이다.

“다음 파티에 오실 손님들께 직접 가꾼 장미들을 선물하고 싶어서요.”

황녀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하자 비로소 시녀장의 얼굴에도 미소가 돌아왔다.

“역시 황녀 전하께서는 천사 같으세요.”

황녀는 쑥스러운 듯 손을 내저은 뒤 들뜬 말투로 물었다.

“비앙키도 왔나요?”

“네. 바이스 공녀님께서도 기다리고 있어요.”

“곧 갈 테니 기다리라고 전해 주세요.”

시녀장이 물러나자 황녀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름답던 정원은 꽃 무더기만 남긴 채 황폐해져 있었다.

흉물스럽긴 해도 전부 뽑고 다시 심으면 되니까 상관없다.

사실 꽃 따위는 아무래도 좋지만, 피어 있어야 꺾을 수 있는 법이니까.

아직 쓸 수 있는 카드는 많다.

황녀는 가위를 집어 던진 뒤 궁전으로 들어섰다.

*

“리안!”

노크도 없이 방으로 들어서던 블레인은 멈칫했다.

리안이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듯 젖은 머리에 가운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벌어진 가운 사이로 잘 단련된 몸이 드러나 있었고, 머리카락은 아직 젖은 채였다.

‘진짜 사람 홀리게 생겨먹었군.’

매일 보는 얼굴이라 익숙한데도 이런 모습을 보니 왜 여자들이 저런 돌덩이 같은 녀석을 좋아하는지 좀 이해가 갔다.

“어디 나가려고?”

“가 볼 곳이 있어.”

리안은 짧게 답한 뒤 물었다.

“왜 나를 찾은 건데?”

블레인은 그 질문에 용건을 떠올려냈다.

“아, 맞다. 네 수하가 찾아왔어.”

수하가 찾아온 것은 별로 큰일은 아니었지만, 블레인은 좀 들뜬 목소리였다.

리안의 거의 유일한 친구라고 자부하는 그도 이 기사단의 갑옷은 본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어둠을 걷는 기사단 비하인드 나이 츠.

세계 최강대국인 하스카토르 제국에서 500년 넘게 최고의 무가 위치를 지켜 온 칼라브리아 공작가의 기사단이었다.

제국 기사단보다도 질이 높은 최정예만이 모인 곳으로 명성이 높지만, 대외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무를 수련하는 데에만 집중하는 터라 외부에 알려진 게 거의 없었다.

리안과 블레인이 응접실로 나가자리안의 수하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인사를 올렸다.

“기사단장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이지?”

“보고드릴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자리를 비켜 줘야 예의겠지만, 블레인은 내용이 궁금했으므로 집주인의 권한을 이용해 슬며시 리안의 뒤에 남았다.

리안은 신경 쓰지 않는 듯 그대로 보고를 진행시켰다.

“칼라브리아 공작님께서 비하인드나이츠에 영지의 훈련소와 타운 하우스 등에서 전부 퇴거할 것을 명령하셨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블레인은 놀라서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네. 당장이라도 기사단을 비우라고 하셨습니다.”

수하의 대답에 블레인이 입을 떡벌렸다.

“아니, 자기 가문 소속 기사단을 영지에서 쫓아내는 법이 어디 있어?”

“공식적으로 내가 물려받았으니 비하인드 나이츠의 소속은 칼라브리아공작가가 아니라 백작가겠지.”

리안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뜻밖에도 별로 놀란 기색이 없는 그를 보고 블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 외에 칼라브리아 공작가에서 뭐 미리 물려받은 거 있어?”

그러나 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리안은 아직 성인이 된 지 얼마 안 됐으니 어지간한 국가의 전력보다 강하다는 기사단을 물려받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 소수 정예라도 수백 명은 넘을 거 아냐. 당장 그 정도 기사단을 어디로 데려가?”

칼라브리아 백작령은 산맥 하나를 지나 며칠을 가야 하는 먼 장소.

리안은 수도에서 황궁 다음으로 큰 칼라브리아 공작가의 성을 물려받을 사람이었으므로 다른 저택이 없었다.

자작에 불과한 블레인의 저택 역시 그들을 수용할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라 플로이드로 이주를 준비할까요?”

수하의 말에 리안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엄연히 다른 가문 소속의 기사단을 전부 어머님의 공작령으로 데려가는 건 무례해.”

“그렇긴 하지만 달리 갈 곳이 없잖아.”

“아니, 비하인드 나이츠는 반드시 수도에 머물러야만 해.”

리안이 완고하게 구는 이유는 이해할 만했다.

비하인드 나이츠는 리안이 가진 가장 커다란 힘이었으니까.

라 플로이드가 가깝다고 해도 가는 데만 반나절이 걸리는 수도의 도성밖이었다.

그렇게 멀리 보내면 리안의 영향력은 확연히 줄어들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수도에 모두를 수용할 공간이 있을까.’

팰리시티는 인구 과밀로 골머리를 앓는 도시였다.

게다가 지가도 무척이나 높아 팰리 시티를 팔면 다른 국가 하나를 몽땅 살 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

설령 장소가 있다고 해도 그곳을 얻는 건 하늘의 별따기일 것이다.

“새로운 장소를 찾아 연락할 테니 일단 무시하고 훈련을 지속하게.”

“네. 단장님.”

리안의 답을 들은 수하는 대답하고 곧 물러 나갔다.

그가 사라지자 블레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즉시 퇴거하라는 명령인데. 공작님이 가만히 두고 보시려나.”

“머물고자 하는 한은 계속 그곳이 비하인드 나이츠의 주둔지야.”

리안의 목소리에서는 확신이 넘쳤다.

하긴 세계 최정예라 불리는 기사단이 버티면 전쟁을 하지 않고서야 몰아낼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버틸 수는 없잖아.

숙소나 훈련장은 점령한다 해도 식량도 급료 지원도 끊기면 어쩌려고?”

그만한 수준의 기사단을 유지하려면 막대한 돈이 필요한 법.

제국 기사단장이지만, 일개 백작인 리안의 영지에서 감당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다.

무력으로 빼앗을 수는 있어도 그래서야 강도단일 뿐이었다.

황실 정식 기사가 될 수 있는 실력자들이 비하인드 나이츠에 만족하는 것은 세계 최고의 대우도 있지만, 순수 무(武)만을 추가하는 제국 최고 정예라는 명예 때문이었다.

긍지를 잃고 전락하는 것은 기사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여태까지와 같은 대우를 받을 거야.”

리안은 침착하게 대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일어서?”

“외출하겠다고 했잖아.”

이런 비상 상황에 외출이라니.

블레인이 어안이 벙벙해진 사이 리안은 후드에 망토까지 뒤집어썼다.

“어디 가려고? 나도 같이 가.”

“길이 머니 혼자 다녀오지. 늦어질테니 기다릴 필요 없어.”

리안은 블레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딱 자르고 저택을 나가 버렸다.

‘대체 말도 안 하고 어딜 가는 거야?’

외출이야 자신이 참견할 바가 아니지만, 무척 마음에 걸렸다.

굳이 자신을 때어 놓고 갈 곳이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 과부를 만나러 가는 건가?’

이런 갑갑한 상황에서도 밀회를 즐기고 있는 거라면 정말 답답한 노릇이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블레인은 안절부절못하고 방안을 서성이다가 한 장의 초대장을 집어들었다.

[리트라엘 후작 부인]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 최근 이 제 택에 머물고 있다고 들은 기억이 났다.

탄생제 내내 매일 밤 파티가 있는 모양이었다.

‘설마 여기 나타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분별이 없어도 그러지는 않겠지만, 불안했다.

사랑에 눈이 먼 사람은 얼마든지 바보짓을 하는 법이다.

잠시 고민하던 블레인은 어차피 할 일도 없으니 밑져야 본전인 셈 치고리트라 후작 부인의 파티에 가 보기로 했다.

리안이 나타나지 않으면 엘레노어 남작 부인을 만나서 한마디 해 주고 싶었다.

‘리안을 확실히 정리하라고 해야지.’

그녀가 똑바로 거절만 하면 리안도 고집을 꺾고 집에 돌아갈지 모른다.

나중에 리안이 알게 되면 죽이려 들겠지만, 블레인은 그의 친구답게 한 번 결정한 것은 실행해야 직성이 풀렸다.

마음을 정한 그는 파티 준비를 위해 서재를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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