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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16화 (16/120)

제16화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던 엘레노어는 아침 햇살에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해가 중천이었다.

어제도 해가 지기도 전에 잠들었으니 하루를 꼬박 잠들어 있던 셈이었다.

그렇게 자고도 아직 피곤했지만, 미뤄 둘 수 없는 일들이 잔뜩 있었다.

일어나서 초인종 끈을 당기자 하녀가 달려와 고개를 내밀었다.

“그레이엄 양을 불러 줘.”

“네, 남작 부인.”

어쩐지 하녀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 반짝거리는 듯했다.

엘레노어가 몸단장을 마쳤을 때쯤 조수인 그레이엄이 집에 도착했다.

“남작 부인!”

그녀는 거의 울 것 같은 얼굴로 방 안에 들어섰다.

그러고는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엘레노어를 보고는 와락 손을 붙잡았다.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어떻게 제게 말 한마디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 있으세요?”

“미안해. 사정이 있었어.”

그레이엄 양은 묻고 싶은 말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질문의 홍수가 쏟아지기 전에 엘레노어가 선수를 쳤다.

“그보다 우선 내가 없는 동안 벌어진 상황이나 좀 말해 줘.”

혹시나 리안과의 일들이 그냥 조용히 지나가진 않았을까 바라며 물었다.

그러나 엘레노어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팰리시티 전역이 백작님과 남작부인 이야기로 들썩거리고 있어요!”

그레이엄 양의 흥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백작님이 파티에 홀연히 나타나 남작 부인을 데리고 사라졌다며 사방이 난리예요! 두 분이 내연의 관계라거나 예전에 헤어진 연인이라거나 사실은 공작님의 숨겨 둔 사생아라거나 별 소문이 들끓고 있어요!”

있는 얘기만 퍼져도 큰일인데 헛소문까지 동시에 퍼지다니.

엘레노어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

“마리체 영지에도 알려졌어?”

“아직은 아니지만 이대로라면 시간 문제겠지요.”

제국 구석의 시골 영지인 만큼 시간 여유는 있었다.

하지만 알려지면 한바탕 난리가 일어날 테니 시어머니가 귀찮게 굴기 전에 빨리 일을 완전히 정리해 두어야만 했다.

“사람들의 여론은 어떻게 흐르고 있지?”

엘레노어의 질문에 그레이엄이 조심스레 답했다.

“우선 처음에는 황녀가 가엾게 됐다는 동정 여론이 일어났어요.”

온 제국이 리안과 황녀가 맺어질 거라 예상했을 테니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칼라브리아 공작께서 엄청나게 노해서 펄펄 뛰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뭔가 내게 제재를 했어?”

“이제 남작 부인을 파티에 초대하는 집안과는 교류하지 않겠다고 선 언했데요.”

예상 범위였지만, 기운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평생 쌓아 온 신용이 한순간에 와르르 무너져 버렸으니까.

허탈했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다잡으려 애썼다.

‘더 힘든 상황에도 일어섰는데 뭐.

아무 기반도 없는 범죄자의 아내 신세일 때도 견뎌 냈다.

당장은 어쩔 수 없어도 죽은 듯이 지내다 보면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한동안은 저택에 틀어박혀 집필에 집중해야겠네.”

엘레노어의 중얼거림에 그레이엄이 안타깝다는 듯 볼을 부풀렸다.

“역시 그러실 건가요?”

“뭐. 할 수 없잖아. 부르는 곳도 없는데.”

그레이엄 양의 동그란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부르는 곳이 없다니요?”

그녀는 팔을 휘휘 내젓더니 문 옆에 테이블로 갔다.

그리고 거기 쌓여 있는 한 무더기의 편지 묶음을 가리켰다.

“오늘 아침에 도착한 것만 이만큼 인데요?”

엘레노어의 입이 놀라서 벌어졌다.

원래 많이 오지만, 그건 평소에 받는 것의 가히 세 배는 되는 분량이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에요. 아직 더 있어요.”

엘레노어는 황망하게 편지들을 바라보다가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하지만 방금 그랬잖아? 내가 가면 칼라브리아 공작이 오지 않는다고…”

“에이, 그걸 누가 신경 써요? 그 검밖에 모르는 무가 사람들이 뭐 언제는 파티에 왔었나요? 가도 어차피 높으신 분들 모이는 자리밖에 가지도 않는데.”

그레이엄의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었으나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그럼 전부 공작의 말을 무시했다.

고?”

“처음엔 다들 눈치를 봤죠. 하지만 어떤 한 부인이 보내기 시작하니까 너도나도 보내기 시작하더라고요.

제아무리 공작가라도 그 많은 사람과 전부 다 원수질 순 없는 노릇아니겠냐면서요.”

“아무리 그렇다 해도…….”

“게다가 공작이 노버슈타인 후작부인 파티에 사병을 난입시켜 행패부리는 바람에 여론도 안 좋아요.

황녀님만 생각하고 다른 귀족들은 안중에도 없냐는 거죠.”

그거라면 이해할 만했다.

귀족이 하는 일에는 명분이 필요한데 공작의 행동은 지나친 무례였다.

“황녀 전하의 편을 드는 사람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아요.

물론 칼라브리아 백작님이 황녀 전하와 언젠간 결혼하겠지만, 아직 결혼은커녕 교제 중인 것도 아닌데 불륜인 것처럼 구는 것도 별로니까요.”

빠르게 말을 늘어놓은 뒤 그레이엄이 눈을 찡긋했다.

“사람들은 가십을 좋아한다. 이 말 기억하세요?”

그것은 엘레노어가 이 일을 시작할 무렵 성공할 자신감을 내보이며 그레이엄에게 했던 말이었다.

“이번 탄생제 축제의 주인공은 바로 남작 부인이에요. 모두 부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안달이 났답니다.”

비로소 엘레노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어차피 구경하는 사람으로서는 재미만 있으면 그만인 것이다.

제국 최고의 커플이 순탄한 거보다는 역시 험난한 편이 훨씬 재미있다.

“한번 파티에 가 보시면 어때요?”

엘레노어의 표정이 풀리자 그레이 엄이 은근슬쩍 권유를 던졌다.

“칼라브리아 백작님과의 연애 이야기를 조금만 풀면 사람들은 구름처럼 모여들어 돈을 지불할 거예요.”

그레이엄의 권유에 엘레노어가 고개를 저었다.

“유감이지만, 연애 이야기는 할 수 없어.”

“네? 어째서요?”

“칼라브리아 백작님과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네?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사실은 아예 없던 일로 해 버리고 싶었지만, 일이 너무 커져 버렸다.

이미 노버슈타인 후작 부인의 후원에서 나눈 이야기를 엿들은 이들이 꽤 많을 테니 관계 자체를 부정하기는 힘들 것이다.

엘레노어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부분적으로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이미 끝났어. 하룻밤의 일탈이었을 뿐이야.”

그레이엄은 눈을 크게 떴으나 이내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군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어째서인지 엘레노어보다 그레이엄 쪽이 훨씬 실망한 기색이었다.

“별로 신경 쓸 거 없어. 나는 괜찮으니까.”

침울해진 그레이엄의 어깨를 두드리자 그녀가 한숨을 내쉬고는 이내 미소 지었다.

“네. 애초에 하룻밤이라도 백작님의 눈에 들었다는 건 엄청난 거니까요.”

그레이엄은 엘레노어를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한 듯 밝은 목소리로 화제를 전환했다.

“자, 그럼 이제 어떻게 할까요? 집 필 준비를 도우면 될까요?”

엘레노어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

가 편지 더미로 다가갔다.

그녀가 초대장을 훑기 시작하자 그레이엄이 신난 어조로 편지 하나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이거 보세요. 이건 리트라엘 후작저택에서 온 거예요. 대단하지 않아요?”

리트라엘 후작 부인은 사교계의 대모였다.

그녀의 파티에는 큰손들이 잘 모이기로 유명해서 꼭 참석하고 싶었지만,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초대받지 못했었다.

“하. 정말 큰 기회인데. 저택에 있어야 한다는 게 너무 아쉽네요.”

그레이엄은 단순히 아쉬운 기색이었으나 엘레노어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이런 거물들까지 흥미를 보이다니.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차라리 다들 공작의 눈치를 보고 있는 편이 위기를 넘기기 편했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는데.”

“네? 뭐라고 하셨어요?”

엘레노어는 황녀와 공작의 화가 풀릴 때까지 조용히 은거하려던 계획을 변경하기로 했다.

이 정도로 뜨거워진 상황이라면 그녀가 조용히 있을수록 소문만 무성해질 것이다.

리안의 성격상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떠벌이진 않을 테니까.

‘이쪽에서 나서서 관계가 끝났다고 사방에 알려야해.’

그러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른다.

그런 위험한 상황을 그레이엄에게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으므로 엘레노어는 슬쩍 말을 바꾸었다.

“그래도 물 들어올 때 노는 저어야겠다고 했어.”

그레이엄의 표정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럼 가실 건가요?”

“그래. 이런 시기를 앉아서 놓칠 필요는 없겠지.”

엘레노어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마치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능숙하게 지시했다.

“제본소에 연락해서 오늘부터 초과 근무라고 전해. 수당은 두 배로 줄테니 책도 두 배로 찍으라고.”

“네!”

그레이엄 양은 신이 나서 뛰어나갔다.

그녀가 사라지자 엘레노어는 쿠션에 몸을 묻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 처신을 잘해야겠네.’

리안을 거절한 이상 이제 지켜 줄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황녀와 리안이 무사히 맺어질 때까지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 황녀의 화를 잠재워야만 했다.

그나마 황녀는 소설에서보다 훨씬 상냥하고 천사 같기로 유명한 게 다행이었다.

아직 약혼도 하기 전이고 젊은 귀족의 일탈은 흔한 일이니 잘 설명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다시는 못 만나겠지.’

스스로 결정한 일이고, 다시 돌아가도 똑같은 결정을 할 것이다.

하지만 리안을 떠올리면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은 그만하자.’

엘레노어는 현실적인 걱정을 먼저 하기로 했다.

조금 휘말리긴 했어도 모든 건 스스로 결정했으니 스스로 책임져야만 한다.

‘그래도 언제나 위기는 곧 기회인 법이지.’

남자 한번 잘못 만난 것 때문에 이렇게 법석인 건 슬프지만, 그래도 확실한 건 돈은 엄청 벌 거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리안과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얼마라도 돈을 낼 것이다.

물론 진실을 얘기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관심을 수익으로 연결하는 데에 빼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었다.

책을 팔고 낭독을 하면서 가십으로 소비해 버리는 거다.

조심해서 위험한 순간을 보내고 나면 결국 남는 건 돈뿐이다.

인기와 관심, 사랑과 남자는 있다.

가도 없는 것.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영원하다.

‘이제 다시는 남자하고 엮이는 일은 없을 거야.’

맺어지지 못할 사람과 줄타기하는 것은 한 번으로 충분했다.

일상이 건조해도 철벽을 치고 살면 피곤할 일도 없다.

예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일에나 집중하자.

그렇게 결심하며 엘레노어는 기운을 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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