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과부와 결혼하겠다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공작은 부디 농담이라고 하길 바랐으나 리안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 게 용납될 리 없다! 황제 폐하께 대체 뭐라고 고한단 말이냐!
황녀 전하를 과부 때문에 버렸다고 할 셈이야?”
“버렸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저는 딱히 황녀 전하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만.”
“네가 황녀와 결혼할 거라는 건 세상 모두가 이미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 오해는 제가 알 바 아닙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여인과 결혼할 겁니다.”
리안의 목소리는 차분했으나 공작은 미칠 지경이었다.
“네 결혼은 너 혼자의 문제가 아니다. 네가 황녀 전하와 결혼하지 않으면 칼라브리아 공작가에 대한 견제가 시작될 거란 걸 모른단 말이야?”
“제게 정략결혼을 강요하시려는 겁니까?”
공작은 잠시 멈칫했다.
하스토리아 제국은 사회적으로 정략결혼이 드물었다.
신분제 사회이므로 어차피 비슷한 사람들끼리 교류하니 자연스럽게 같은 계층에서 연애와 결혼이 이루어졌다.
신분을 뛰어넘는 결혼은 터부시되었으나 딱히 금지는 아니었다.
그게 공작으로서는 무척 유감이었다.
강요할 수 있었다면 공작은 엘레노어 남작 부인 따위를 끌어들여 청혼을 유도하는 대신 진작에 약혼시켜버렸을 것이다.
“나 역시 그렇게 결혼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결혼을 후회한 적이 없어.”
줄곧 높던 공작의 언성이 낮아졌다.
무표정하던 리안은 처음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께서는 저를 낳자마자 플로 이드 공작령으로 돌아가시고, 한 번도 수도로 오신 적이 없습니다.”
“후계를 낳았고 가문을 번성시켰으니 결혼의 목적은 달성한 게 아니냐.”
공작의 항변에 리안의 표정은 더욱 싸늘해졌다.
“칼라브리아 공작가는 제국 최고의 기사들을 배출하는 전통 깊은 무(武)가입니다. 가문을 번성시키기 위해서 아내를 고르지 않아도 지금까지처럼 압도적인 무력을 유지하면 충분합니다.”
정론이었으나 공작은 뼈를 맞은 기분이었다.
그는 칼라브리아 공작 작위를 이은 이들 중 드물게 제국 기사단장에 오르지 못했다.
제국 최연소 기사단장이자 역사상 최고의 천재 기사라고 칭송받는 리안은 이 필사적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황제 폐하의 귀에 들어가면 그 과부가 무사할 것 같으냐? 곧장 지하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될 거다.”
“황제 폐하라도 함부로 죄 없는 귀족을 잡아 가둘 순 없습니다.”
“네게는 손 못 대도 그녀는 평민출신의 하찮은 존재다. 그 정도는 황제가 충분히 무마할 수 있어.”
그러나 리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제게는 제국에 봉사하는 기사단장으로서의 사면 특권이 있습니다. 황제라도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반역이라면 사면할 수 없다. 황녀를 끔찍하게 여기시니 불충을 반역의 죄로 물으실 수도 있지.”
“그런 짓을 한다면.”
리안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황제 폐하께서는 진짜 반역에 대비해야 할 겁니다.”
순간 붉은 입술 사이로 드러난 흰이가 맹수의 그것처럼 보였다.
제국을 수호해야 할 기사단의 단장이 그런 말을 입에 담다니.
그가 얼마나 제국에 충성을 바쳐 왔는지 알았기에 더욱 충격적이었다.
공작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리안은 그런 그를 내버려 둔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뭐라 하셔도 제 생각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딜 가는 거냐?”
“아버님의 마음이 변하시면 돌아오겠습니다.”
“뭐라고? 거기 서지 못해?”
불러도 그가 멈춰 서지 않자 공작이 고함을 쳐 사람을 불렀다.
“아무도 없느냐! 리안을 붙잡아!”
사병들이 몰려왔으나 아무도 감히 리안을 말리지 못했다.
제국 최고의 기사를 일개 사병이 다치지 않게 제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뭐하는 거냐! 그를 잡으라니까!”
그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리안은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유유히 걸어서 그곳을 벗어났다.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그를 놓친 공작은 분노해서 책상을 내려쳤다.
그 역시 리안 정도는 아니어도 상당한 무력을 지녔기에 당장 책상은 박살이 났다.
한동안 집기에 화풀이를 한 뒤 그는 안락의자에 앉아 머리를 싸맸다.
‘그런 광대를 집으로 부르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가 가득했다.
딱 하루 이틀만 더 기다리면 되는 건데 쓸데없는 짓을 해버렸다.
하필이면 그녀가 다녀간 뒤에 좋은 계획이 생긴 것이다.
그건 탄생제 전날 황녀와 대화하던 도중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그날 칼라브리아 공작은 황궁에서 일을 보고 돌아오던 길에 우연히 황녀와 마주쳤다.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공작에게 인사했고, 둘은 잠시 정원을 거닐며 담소를 나눴다.
처음엔 탄생제에 관한 대화였으나 화제는 자연스럽게 리안에 관한 것으로 흘러갔다.
리안 이야기를 듣는 그녀의 표정은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녀 그 자체였다.
그래서 흐뭇해진 공작은 대담한 말까지 흘려 버렸다.
[두 사람이 맺어지는 걸 보는 게 내 인생에 남은 유일한 낙입니다.]
그 말에 그녀는 리안이 자신과 맺어질 리 없다며 쓸쓸하게 웃었다.
[저와 결혼하게 된다면 그건 아마 가문이나 제국의 기대에 대한 의무감 때문이겠죠.]
공작은 아닐 거라 부정했지만, 황녀는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리안 백작님께서는 제게 그런 의무감을 강하게 느끼진 않을 거예요. 뭐 같이 밤이라도 보냈다면 모를까. 그럴 이유가 없지요.]
황녀의 말을 듣자 뭔가 길이 떠오른 기분이었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아들을 설득할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하하. 그러다 리안 녀석이 몰래 황녀 전하의 방에 침입하면 어쩌실 생각입니까?]
농담을 빙자해서 속내를 캐자 황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어떻게 그런 일을 바랄 수 있겠어요.]
그녀가 거절하지 않을 거란 걸 알게 된 공작은 그 시점에서 마음을 굳혔다.
‘아들을 재워서 황녀의 방으로 몰래 들여보낸다.’
리안은 강직한 데다 무척 책임감이 강했다.
그가 황녀와 밤을 보낸다면 결코 그녀를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황녀가 묵인만 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다.
‘리안을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만 했는데.’
그런데 그런 여자 하나 때문에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쳐 버린 것이다.
황녀보다 나은 신부는 없다.
대체 왜 이 답답한 아들 녀석은 그걸 모르는 걸까.
‘천사 같은 황녀의 어디가 싫어서 그렇게 가엾게 만드는 거야.’
아련하던 황녀의 표정을 떠올리니 무척 안쓰러웠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그 괘씸한 여자를 찾아가 요절을 내고 싶었다.
하지만 리안은 분명히 그것을 예상하고 방비 중일 것이다. 그의 호위는 온 힘을 쏟아도 뚫기 어렵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
뚫을 수 없으면 쫓아 버리면 된다.
백작에 불과한 데다 영지도 멀리 있는 리안이 현재 거느리고 있는 대규모 기사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칼라브리아 공작가의 힘이 필요했다.
그는 명을 거역한 아들에 대한 지원을 전부 끊어 버릴 작정이었다.
기다리다 보면 결국 백기를 들게 될 것이다.
‘그사이 여자를 사교계에 발도 못붙이게 해야겠다.’
가십을 파는 여자 따위 사교계에서 쫓겨나면 아무것도 아닌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화려한 환상이 깨지면 리안도 정신을 차릴지 모른다.
“오늘 리안과의 대화가 결코 저택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하게 해! 이야기가 떠돌면 오늘 안에 있던 녀석들은 모두 목을 치겠다!”
“네, 공작님.”
“그리고 앞으로 마리체의 과부가 참석하는 파티에 칼라브리아 공작가는 절대로 참가하지 않는다! 그렇게 알려라!”
분노에 찬 공작의 외침이 저택을 울렸다.
*
서재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블레인은 손님이 왔다는 말에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런 야심한 시간에 그를 찾을 이는 단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다.
“리안!”
벌떡 일어나는 블레인에게 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시 신세 좀 질 수 있을까?”
친우를 재워 주는 것 따위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팰리시티 전역에서 쏟아지는 초대에도 결코 바깥 잠을 자지 않는 기사단장의 말이었다.
“너희 가문의 그 수많은 타운 하우스는 어쩌고?”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곳을 이용하지 못할 이유라면 하나뿐이었다. 블레인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너 정말 공작님께 말한 거야?”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칼라브리아 공작가에서 칼부림이 일어났다는 말을 못 들은 게 신기하군.”
심각하게 말한 건데 리안은 픽 웃었다.
뭐, 공작이 칼을 들고 덤벼들어도 리안이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테니 유혈 사태까진 가지 않을 것이다.
“하. 대체 무슨 생각이냐.”
블레인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결혼은 장난이 아니야. 한순간의 충동으로 결정할 게 아니라고.”
“충동으로 결정하지 않았어.”
리안의 목소리는 자신의 말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며칠 전부터 마음은 먹고 있었어. 미리 말하면 데네브의 밤을 방해받을 우려가 있어서 말하지 않았을 뿐이야.”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리안의 눈을 보자 쏙 들어가 버렸다.
‘무슨 말을 해도 소용 없겠군.’
리안이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땐 결코 고집을 꺾는 법이 없었다.
그는 괜한 심력을 낭비하는 대신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섰다.
“얼마나 머물 건데?”
“일단 며칠간은 부탁하고 싶군.”
블레인도 평민 출신의 하위귀족과 결혼하기엔 자신의 친구가 너무나 아깝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서는 돌아가서 아버지의 말을 들으라고 내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리안이 어딘가로 잠적해 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함께 있는 게 나을 듯싶었다.
“객실로 안내해 주지.”
앞장서서 걷는 블레인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대체 어쩌다 그 여자에게 저렇게나 빠진 거야.’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나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곧 두 사람은 객실에 도착했다.
“이 방을 써.”
“고마워.”
블레인은 방 안으로 들어가는 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가기 전에 하나만 묻자.”
리안이 뭐냐는 듯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너… 어제 그녀와 함께 밤을 보냈지?”
“어제?”
리안은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나.
“그런 거로 결혼을 결정하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르는 거냐?”
“뭐?”
“잠자리에 홀려서 요부랑 결혼한 사람들의 말로를 역사 속에서 못 봤냐고!”
“이상한 말 하지 마.”
리안이 블레인의 말을 딱 잘랐다.
“딱히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곁에서 잤을 뿐이야.”
“곁에서 자면서 아무것도 안 했다고? 그걸 믿으란 거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어.”
그렇게 인기가 많으면서도 여자 보기를 돌같이 한 건 생각 문제가 아니라 하체 문제였나?
블레인은 실례되는 상상을 했다.
리안이 마치 그의 머릿속에서 훼손되고 있는 자신의 명예를 눈치챈 것처럼 다시 입을 열었다.
“난 묶여 있었거든.”
뭐?
블레인이 입을 떡 벌렸다.
말을 마친 리안은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지만, 블레인은 여전히 경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무슨 플레이를 하는 거야. 저 녀석! 원래부터 그런 쪽 취향이라 갑자기 넘어간 건가?’
역시 사교계를 주름잡는 아름다운 여인은 노는 물이 다르다.
그렇게 블레인의 마음속에 오해가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