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하스카토르 제국의 별궁의 동선은 탄생제를 맞아 몰려든 외국 사절들로 북적였다.
각각의 궁은 국력과 신분 고하에 따라 철저하게 차등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 정점인 별궁의 중앙.
가장 화려하고 장엄한 궁전을 차지한 페이드라 공국의 주인 로베르 페이드라 대공은 아들의 방을 방문 중이었다.
“아무래도 귀국을 미루는 게 좋겠다.”
책을 읽고 있던 스카이 페이드라 공작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이유로 말입니까?”
황녀의 탄생제를 핑계로 팰리시티에 왔지만, 스카이의 목적은 공국의 이권을 위한 거래였다.
회합이 정리되는 대로 보수적이고 따분한 제국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네게 제법 좋은 기회가 생긴 것 같아서 말이다.”
“좋은 기회라니요?”
또 이권 관련해서 좋은 건수가 생긴 줄 알았으나 로베르 대공의 입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말이 나왔다.
“아무래도 황녀가 약혼을 취소할 모양이야.”
세계의 정세가 흔들릴 엄청난 소식에 스카이의 눈빛이 조금 빛났다.
작위를 받아 공국으로서 독립했다.
겉보기로는 굉장한 것 같지만, 사실 공적을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제국에서 떼어 낸 것에 가까웠다.
빛의 제국 하스카토르의 그림자 페이드라 공국.
천혜의 경관을 가진 해변과 그에 대비되는 척박하고 광활한 국토.
공국 전체가 오락과 유흥, 문화 시설로 채워진 환락의 도시이자 대륙중앙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지하 경제의 중심지였다.
“황녀는 제가 안중에도 없을 것입니다.”
하스카토르 제국은 거대 왕국들과도 급을 맞추지 못해 자국 최상위귀족과 결혼하는 게 이득일 정도인 압도적 최강대국이다.
스카이 페이드라 역시 막대한 부와 적지 않은 영향력을 지닌 지하 세계의 왕자지만, 다루는 산업의 특성상기피 대상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제국의 다섯 공작은 작위상 더 윗급인 대공인 로베르에게 조금도 경의를 표하지 않고 오히려 멸시할 정도였다.
당연히 그와 황녀의 차이는 아득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페이드라 대공은 물러나지 않았다.
“리안 칼라브리아에 대해 알고 있겠지?”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스카이는 당연한 거 아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황녀나 황제의 이름은 몰라도 동화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기사단장 리안 칼라브리아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스카이는 왕족들이 흔히 하듯 소년 시절 하스카토르 제국에서 유학했으므로 리안을 본 적이 몇 번 있었다.
“듣자 하니 녀석을 택한 건 순전히 황녀 자신의 의사라고 하던데. 얼굴에 혹하는 소녀라면 네게도 가능성이 있지 않겠느냐?”
로베르 대공이 그런 말을 꺼낼 정도로 스카이는 좋은 외모를 가진 남자였다.
매끄러운 검은 머리에 보기 좋게 그을린 피부.
선명한 바다색 눈동자의 또렷한 이 목구비는 다소 연약해 보이는 경우가 많은 남성 왕족들 사이에서 우월한 남성미를 풍겼다.
그가 악명 높은 공국의 후계자인데도 그나마 왕국 등지에서의 혼담이 심심치 않은 것은 이렇듯 수려한 외모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스카이는 코웃음을 쳤다.
“리안 칼라브리아 같은 남자를 좋아하던 여자라면 제게는 눈길도 주지 않을 겁니다.”
“음. 그럴까?”
“그리고 전 그런 어린애에게 딱히 관심 없습니다.”
천사같이 상냥한 소녀 따위는 전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단지 나이 차이 때문이 아니라 스카이는 그런 타입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똑똑하고, 우아하며, 기품 있고, 그러면서도 밤에는 한없이 요염해질 수 있는 반전 매력을 지닌 여자가 취향이었다.
관능적으로 보이는 외모에 걸맞게 호색한까지는 아니어도 관계를 좋아하고 즐겼다.
여럿의 첩을 두고 치정에 휩싸이는 건 질색이었으므로 자신의 부인도 비슷한 성향을 지녔기를 원했다.
지나치게 높은 신분 때문에 얽매여자랐을 황녀에게 그런 방면은 영 기대하기 어렵다.
굳이 정략적으로 부인을 선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배경이 약해도 공국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 똑똑하고 사리분별이 되는 여자가 훨씬 나을 것이다.
“그 어린애를 차지한다면 세계의 정점이 될 수 있을 텐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스카이는 딱 잘라 말했다.
“페이드라 출신인 제가 황녀와 결혼한다 해도 꼭두각시 황제가 될 뿐입니다.”
“그게 뭐가 어때서 그러냐? 정점에 앉아 귀찮은 일은 공작들에게 맡겨두면 되는데.”
“하지만 연회는 무척 침울했어. 리안 칼라브리아가 신분이 낮은 여자와 눈이 맞아 황녀를 거절했다는 소문이 파다하거든.”
건성으로 듣고 있던 스카이가 자세를 바로하며 물었다.
“신분이 낮은 여자와 눈이 맞아요?
리안 칼라브리아가?”
“그래. 아름다운 과부에게 푹 빠졌다더군.”
당연히 정략적인 이유일 거라 짐작했는데.
상당히 늦은 편이다.
로베르 대공은 스카이가 하는 일에 참견하는 법이 없었으나 그가 결혼에 전혀 흥미가 없는 점은 신경 쓰고 있었다.
아마 진심으로 황녀를 유혹하기를 바랐다기보다는 빨리 결혼하라고 압박할 목적에서 말을 꺼냈을 것이다.
“그렇게 할 테니 잔소리는 그만두십시오.”
스카이가 수락하자 대공은 곧 방을 나섰다.
홀로 남은 스카이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 포도를 만지작거렸다.
보통이라면 황녀의 약혼이 무산된 일로 인한 국제 정세의 흐름에 집중할 타이밍이었으나 그의 관심은 엉뚱한 방향에 쏠려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리안을 처음 보던 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스카이는 14세가 되던 해.
한창 제국에서 유학 중이던 때였다.
제국의 귀족 학교는 느슨하고 여유로운 편이었기에 타고난 두뇌와 기질을 가졌던 그는 손쉽게 모든 것에서 최고가 되었다.
가는 곳마다 사람들은 그를 반겼고 떠받들어 주었으나 모든 것은 시시했고, 따분했다.
그는 자신만만하고 냉소적인 사춘기를 보내고 있었다.
아름다운 세계 최강대국의 수도도 그의 흥미를 끄는 곳이 없었다.
슬슬 공부는 그만두고 공국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정치를 배울까 고민하던 참이었다.
‘그때 녀석이 나타났지.’
당시 11세이던 리안이 그가 다니던 귀족 학교에 입학했다.
스카이가 입학한 후 리안은 줄곧 플로이드 영지에서 머물고 있었기에 초대면이었다.
그를 처음 보던 순간을 스카이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보자마자 그는 스카이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다.
아직 어린 소년에 불과한데도 당당히 서려 있는 강인한 기품.
대신 그가 별로 흥미를 보이지 않는 약초학과 주술을 비롯해 각종 학문에서 그를 제치긴 했다.
그러나 리안은 별로 분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분해하긴커녕 그는 스카이에게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스카이뿐만 아니라 검을 제외한 무엇도 그의 눈길을 끌지 못했다.
누구도 안중에 없던 남자.
그런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흥미를 보인 것이다.
‘아름다운 과부에게 빠졌다고?’
그가 본 리안 칼라브리아는 여자가 옷을 벗고 달려들어도 꿈쩍하지 않을 것처럼 무심한 검귀였다.
아무리 소년 시절과 달라졌다 해도 그런 남자가 사교계 꽃의 치마폭에 빠져 놀고 있다니 상상이 가질 않는다.
‘대체 어떤 여자지?’
누군지 몰라도 범상치는 않을 것이다.
한발 빼고 있기보다는 직접 눈으로확인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정한 스카이는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아무도 없는 것 같던 방 안에 어느 순간 인영이 나타났다.
“제니트.”
스카이는 놀라는 기색 없이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스카이의 심복이었다.
치안이 좋은 제국의 귀족은 이러한 심복을 두지 않지만, 지하 경제에 깊이 관여해서 암살이 빈번한 페이 드라 공국에서는 제법 흔했다.
“부르셨습니까.”
“좀 알아보고 싶은 게 있어.”
제니트는 듣고 있다는 듯 고개를 살짝 움직였다.
“칼라브리아 백작이 빠졌다는 여자를 조사해 와. 최대한 자세하게.”
제국의 핵심 인사인 리안 칼라브리 아의 동향을 관찰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이것은 개인적인 흥미가 더 컸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제니트는 대답하고 사라지듯 방을 떠났다.
스카이는 앉아 있던 안락의자에 깊이 몸을 묻었다.
모처럼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같은 시각.
수도 중심에 우뚝 솟은 칼라브리아공작가에서는 일대 소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칼라브리아 공작이 벌떡 일어선 채 호통 쳤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점잖은 공작의 얼굴이 분노로 핏대가 올라 있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시퍼런 서슬은 보기만 해도 살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정작 고함을 받은 리안의 얼굴은 태연했다.
그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다시 한번 공작의 고함이 서재를 쩌렁쩌렁 울렸다.
“과부와 결혼하겠다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