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어떻게 됐나?”
블레인이 들어서자마자 칼라브리아공작이 덤벼들 듯 물었다.
“마차 자국을 추적했는데 리안은 플로이드 공작령으로 진입했습니다.”
“공작령이라고? 라 플로이드 말인가?”
공작의 표정이 구겨졌다.
제국의 다섯 공가에는 위기 때 황실을 구원한 공로에 대한 경의 표시로 황제가 내려 준 작은 영토가 있었다.
황제에게서 봉신이 빌려 쓰는 개념의 일반적인 영지와 달리 이 공작령은 공작의 소유물이었다.
철저한 치외 법권으로 그 안에서 공작의 권력은 무소불위.
황제조차도 각 공가의 허락을 받아야만 진입할 수 있었다.
‘표정을 보니 출입 허가를 받은 적이 없나 보군.’
블레인은 칼라브리아 공작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플로이드 공가의 피를 이은 리안과다르게 칼라브리아 공작에게는 그곳을 출입할 권한이 없었다. 아무리 남편이라 해도 공작령에 무단으로 방문하는 것은 상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금기였다.
‘꽤 머리를 썼는데.’
블레인이 속으로 감탄하는 사이 공작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같이 있었다는 여자는?”
“행방이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공작의 얼굴에 짙은 분노가 어렸다.
“제길. 그런 사교계 광대를 내 집에 들이는 게 절대 아니었는데!”
블레인은 체펠린 궁정백으로부터 엘레노어와 리안이 만나게 된 경위를 들은 참이었다.
아마 체펠린 궁정백은 칼라브리아공작을 한동안 피해 다니는 게 좋을 것이다.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당장 녀석을 끌고 와야지!”
“하지만 거기로 숨었다면 끌어낼 방법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수를 내야 해! 이야기가 밖으로 새기 전에!”
공작은 가문의 수치가 밖으로 알려질까 봐 무척 초조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블레인은 이미 막는 건 무리라고 여겼다.
사병들의 입은 간신히 막았지만, 리안이 사람들 앞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상 스캔들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제가 가서 설득해 볼까요?”
블레인의 말에 공작이 반색했다.
“정말 그렇게 해 주겠는가?”
지금 리안을 찾아갔을 때 그나마 들여보내 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라면 수도에서는 블레인뿐일 것이다. 모친인 플로이드 공작 부인은 플로이드 영지에서 요양 중이었으니까.
“잘 좀 부탁하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블레인은 리안을 설득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리안은 한 번 결정한 일을 결코 무르는 법이 없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으로 이런 일을 벌였는지 정도는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블레인은 발걸음을 재촉해 칼라브리아 공작가를 떠났다.
*
아침을 맞은 라 플로이드는 햇살만큼이나 찬연하게 빛났다.
그 방 안에서 엘레노어는 손목을 만지작거리는 리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나요?”
“아마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리안의 깊은 눈매는 평소보다 좀 더 그늘이 져 있었다.
“잠은 …… 좀 주무셨어요?”
“거의 못 잤습니다.”
“전 아주 잘 잤는데…….”
“그렇게 보이더군요.”
리안의 말에 엘레노어의 얼굴이 빨개졌다.
남의 집인데 어찌나 편했는지 꿈조차 꾸지 않고 해가 중천이 뜰 때까지 푹 잤다.
그녀가 늦잠을 잔 덕택에 리안은 이 시간까지 묶인 채 기다린 것이다.
“제가 너무 세게 묶었나요?”
엘레노어는 저린 듯 손목을 주무르는 리안을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아뇨. 힘주면 끊어질 것 같아서 신경을 쓰느라 굳었을 뿐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늦잠을 잔 게 좀 더 미안해졌다.
팔은 묶여 있고, 조금 힘주면 끊어질 것 같아서 움직이지도 못하니 무척 고역이었을 것이다.
“제가 본의 아니게 고문한 셈이네요.”
“고문이 심하긴 했습니다.”
엘레노어는 찔끔했으나 리안은 오히려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움직일 때마다 어찌나 미칠 지경이던지.”
담담한 목소리로 난데없이 나온 낯뜨거운 말에 엘레노어는 얼굴이 빨개졌다.
“품으로 파고들면서 아주 귀여운 소리를 내더군요.”
“……..”
“내가 포로였다면 손을 풀어주는 대가로 즉시 모든 기밀을 불었을 겁니다.”
농담하는 걸 보니 화가 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얼굴은 확실히 피로한지 눈주변이 살짝 어두웠다.
다크서클도 얼굴을 가리는 건지 욕정에 몸부림치느라 잠 못 들었을 뿐인데 마치 우수에 젖은 것처럼 보였다.
“난 괜찮으니까 그런 표정 할 거 없습니다.”
리안은 엘레노어의 걱정에 잠긴 뺨을 쿡 찌르며 말했다.
“당신과 운명의 밤을 함께 보낸 대가라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리안이 가까이 다가와 웃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눈이 마주친 순간 둘 사이에 야릇 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두 사람은 아직 침대.
리안은 이제 막 속박된 두 손이 풀려난 상태였다.
그가 촉촉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어깨에 손을 올렸다.
눈빛이 그가 원하는 욕망을 내비치고 있었다.
홀려 버릴 것 같았으나 엘레노어는 잠들기 전 했던 다짐을 떠올리며 몸을 뒤로 물렸다.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때가 됐네요.”
“조금 더 머무를 수 없습니까?”
“분명히 하룻밤만이라고 하셨죠.”
엘레노어가 몸을 일으키자 리안이 따라 일어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가기 전에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리안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진지했다.
그에게서 나올 말이 무엇일지 대강짐작이 갔다.
교
“엘레노어. 나와 정식으로 제…….”
“거절합니다.”
엘레노어의 딱 부러지는 목소리가방 안에 울렸다.
그리고 그녀는 짧은 순간 동안 리안의 얼굴에 놀랍도록 많은 감정이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아마 그에게서 이렇게 다채로운 표정을 본 건 그녀뿐일 것이다.
“엘레노어. 하지만…..….”
“뭐라고 말씀하셔도 어쩔 수 없어요.”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으나 현실의 벽은 너무 깊었다.
남편과 대면한 적도 없다고 해도 그녀는 마리체 남작 부인.
공작가에서 둘의 정식 교제를 허락하지도 않을 거고 황녀까지 얽혀 있는 마당이다.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고서야 결코 맺어질 수 없을 것이다.
만나면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게 될 관계였다.
“감정이 조금은 생긴 거 아니었습니까?”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현실적으로 생각해야 한다고요.”
이런 진부한 통속극에서나 나올 말을 하게 되다니.
하지만 엘레노어로서 살아온 5년간 온갖 차별과 굴욕을 당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다시 만나지 못해도 괜찮은 겁니까?”
차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아무 말 못 하는 그녀의 귓가에 리안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로.”
마음을 굳게 먹었는데도 리안의 아름다운 눈을 보니 흔들렸다.
엘레노어는 시선을 돌리며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그런 말은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들고 나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움찔하는 리안을 향해 엘레노어가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당신과 교제하면 나는 남작 부인이라는 지위도 잃고 평민으로 돌아가게 될 거예요. 귀족가에 출입할 수도 없고, 내가 하던 모든 일을 잃게 될 거라고요.”
사실 재혼하지 않는 이상 그녀가 바로 남작 부인의 지위를 잃게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빼앗긴 남작 부인으로서의 작위를 되찾으려고 늘 벼르고 있는 그녀의 시어머니가 그냥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작위를 포기하지 않으면 불륜으로 몰아가 리안에게도 빌붙으려 들 게 틀림없었다.
그런 추한 수렁에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