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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12화 (12/120)

제12화

“하필 백작님께서 오늘 부상을 당하시다니. 이게 무슨 일이래요.”

“그러게요. 황녀 전하께서 오늘을 얼마나 기대하셨는데.”

비앙카스타는 한숨을 내쉬는 영애들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연회 내내 자리를 비우고 있던 칼라브리아 공작은 저녁 무렵 파리한 얼굴로 다가와 리안이 급한 부상으로 연회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황녀는 그대로 혼자 있고 싶다며 방에 틀어박혔다.

비앙카스타는 이 일이 미칠 여파가 무척 걱정됐다.

오늘 일로 리안의 불참과 관련된 이들은 모습을 감추게 될 게 뻔했다.

그녀의 걱정과 상관없이 초상집 같던 파티 분위기도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애들께서 계속 이러고 계시면 황녀 전하께서 더 슬퍼하실 겁니다.”

“같이 춤을 추시지 않겠습니까?”

가벼워 보이는 청년 귀족들이 다가와 춤을 신청했다.

모처럼 차려입고 들뜬 기분으로 온 연회에서 아무 수확도 없이 돌아가기 싫은 것이다.

영애들도 마찬가지인지라 다들 못이기는 척 은근슬쩍 일어섰다.

곧 하나둘씩 테이블을 떠나 비앙카스타는 홀로 남겨졌다.

악녀로 소문난 그녀에게는 춤을 신청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춤을 추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아직 사춘기 소녀인 비앙카스타는 혼자 테이블에 앉아 있는 모습이 창피했다.

다들 자신을 쳐다보며 비웃는 것만 같아서 양 뺨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당장 집에 가고 싶었지만 탄생제가 끝나기 전에 갔다는 말을 나중에라도 황녀가 들으면 좋지 않을 게 뻔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비참하게 앉아 있은 지 한참이 지났을 때였다.

“혼자입니까?”

독특한 억양에 비앙카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선명한 붉은 머리에 초록색 눈동자와 마주쳤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에이드리 언 유니스라고 합니다.”

유니스라면 남쪽 지방의 영지를 다스리는 백작 가문이다.

휴양지로 이름이 높지만, 수도에서 거리가 멀어 비앙카스타는 한 번도가 본 적이 없었다.

“괜찮으시면 한 곡 함께 추시겠습니까?”

에이드리언은 이제 막 소년을 벗어난 듯한 장난기 넘치는 얼굴과 껑충큰 키가 무척 느낌 좋은 호청년이었다.

그러나 비앙카스타는 당황해서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죄송하지만, 저는 춤은 좀……….”

그는 먼 지방에서 와서 비앙카스타의 평판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자신과 춤을 추면 나쁜 소문에 휘말릴 게 뻔했다. 남에게 폐를 끼치고 싶진 않았다.

“저는 잠시 바람을 좀 쐐야겠어요.

실례합니다.”

거절하고 자리를 피하려는데 에이 드리언이 씩 웃었다.

“그거 잘됐군요.”

“네?”

“저도 사실 춤은 질색입니다. 바람을 쓰고 싶은데 지리를 몰라서요.

같이 가도 됩니까?”

싹싹한 태도에 차마 안 된다고수 없었다.

둘은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그와 나란히 걸으려니 이상하게 기분이 들떴다.

“레이디의 이름을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비앙카스타 바이스입니다.”

“비앙카스타. 아주 예쁜 이름이군요.”

다정한 말씨와 웃을 때마다 가늘어지는 눈매가 무척 매력적이었다.

항상 의기소침한 심장이 쿵쿵 뛰며 존재감을 알렸다.

인적이 드문 곳까지 왔을 때 에이 드리언이 붙임성 있게 물었다.

“나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괜찮으면 잠시 얘기를 좀 나눠도 될까요?”

자신을 싫어하지 않는 사람을 본것이 너무 오랜만이라 눈물 나게 반가웠다.

비앙카스타는 주변을 살폈으나 아무도 없었다.

잠시 얘기를 나누는 정도라면 괜찮겠지.

“네. 좋아요.”

비앙카스타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성의 테라스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싸늘한 시선은 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

“이쪽입니다.”

리안은 엘레노어의 손을 잡은 채 계단을 올라가 2층으로 이끌었다.

그가 금빛 조각으로 장식된 거대한 문을 밀어 연 순간, 엘레노어는 벌어지려는 입술을 지그시 물어야만 했다.

방 안은 부의 극치를 넘어 하나의 예술이었다.

테라스 너머로 별이 쏟아지는 하늘아래로 탁 트인 벌판과 장엄한 산이 펼쳐져 있었고, 하나하나 장인의 솜씨로 만든 듯한 방 안의 가구들은 보는 것만으로도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여기 묵으면 됩니다.”

이런 꿈에서나 볼 것 같은 방에 묵게 되다니.

기분 좋게 안으로 들어서려던 엘레노어가 문득 발걸음을 멈췄다.

먼지 하나 없이 정리된 방이었으나, 묘하게 누군가에게 맞춰져 있다.

는 인상이 느껴졌다.

객실이 아니라 분명 주인이 있는 방이다.

“이 방은…….”

돌아보며 묻자 리안이 어깨에 가볍게 손을 얹으며 속삭였다.

“내 방입니다.”

엘레노어는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봐도 중앙에 거대한 침대가 하나 있을 뿐이었다.

“그냥 같이 밤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니었어요?”

엘레노어는 문 앞에 선 채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굳이 한 침대를 써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음.”

리안은 잠시 이유를 짜내려는 듯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적당한 사유를 찾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와 한 침대를 쓰는 건 싫습니까?”

데려올 때와 비슷한 수법이었다.

리안의 예쁜 눈동자를 보니 거절의

“…물론 그러고 싶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만.”

리안이 속내를 털어놓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당신이 정말 싫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리안은 아쉬운 듯한 눈길로 엘레노어를 바라보았다.

그 은근한 기색에 몸이 욱신거리면서 방금 단호하게 굳힌 마음이 흔들렸다.

‘위험한데.’

그녀는 바로 오늘까지도 리안의 손길 때문에 민감해진 몸 때문에 잠을 설친 차였다.

아직은 이성이 버티고 있어도 과연 그가 손을 뻗어 오면 거부할 수 있을까.

힘들 거다.

하지만 솔직히 따로 자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거 못 믿겠어요.”

갈등 속에 엘레노어가 자신 없는 어조로 말하자 리안이 설득하려 했다.

“정말입니다. 못 믿겠다면 묶어도 좋습니다.”

그 말에 엘레노어는 뭔가 묘안이 떠올랐다.

“좋아요. 그럼 묶을게요.”

리안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내가 자유자재로 끈을 풀거나 끊을 수 있다는 건 아실 텐데요.”

“괜찮으니까 양손을 뒤로 모으고 돌아서세요.”

리안은 즐거운 듯한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뭔가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눈으로 물었다.

“혹시 결박하는 걸 좋아합니까?”

“전혀 아니거든요?”

엘레노어는 까칠하게 받아쳤지만 내심 평소 리안이 10점이라면 묶여있는 리안은 10.5점 줘도 될 거 같다고 생각했다.

“정말 묶을 겁니까?”

“먼저 말 꺼내신 거잖아요.”

엘레노어는 그의 손을 뒤로 모으게 한 뒤 스카프로 아주 깜찍한 리본 모양을 만들었다.

“리본은 표식입니다.”

손거울로 리본을 보여 주며 리안에게 확인시켰다.

“아침이 될 때까지 이 매듭 그대로 안 묶여 있으면 다신 안 볼 거예요.”

아무리 힘이 세도 자기 팔에 리본을 묶을 순 없겠지.

그제야 리안은 조금 후회하는 표정이 되었다.

“자, 이제 잘까요?”

엘레노어는 냉큼 이불로 뛰어 들어간 뒤 아주 넓은 침대의 한쪽 구석으로 붙었다.

리안이 불을 끈 뒤 침대로 들어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등을 돌리고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어쩐지 긴장돼서 침이 꿀꺽 넘어갔다.

‘뭐. 묶어 뒀으니까.’

그 정도면 내면의 갈등 없이 하루 정도는 보낼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등에 뭔가 따뜻하고 단단한 것이 닿았다.

침대는 가로로 누워도 남을 만큼 넓은데 리안이 그녀의 등에 밀착한 것이다.

리안은 놀란 엘레노어의 귓가에 속삭였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안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리안이 달래듯 얼굴을 가볍게 엘레노어의 머리카락에 비볐다.

“약속할게요. 그냥 이렇게만 있겠습니다.”

리안의 목소리는 사심 없이 다정했다.

하지만….

“……뭔가 닿는데요.”

“그건 불가항력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

불가항력이라니.

이런 선정적인 상황을 만들어 놓고도 리안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그는 잔뜩 힘이 들어간 엘레노어를 달래듯 속삭였다.

“이렇게 해서 빨리 내게 마음이 생기도록 하려는 겁니다.”

아직도 살을 비비면 마음이 생긴다.

는 말을 믿고 있는 걸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한편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조금 머리를 들었다.

밀착한 리안의 몸은 전에 만졌을 때도 느꼈듯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커다란 몸에 보호받는 느낌도 들고, 그가 조금 움찔할 때마다 느껴지는 야릇한 감각도 나쁘지 않았다.

‘하루 정도는 괜찮겠지.’

이미 여기까지 온 이상 엘레노어는 지금을 즐기기로 했다.

걱정을 지금 하나 내일로 미뤄 두나 어차피 결과는 달라질 것도 없었다.

‘오늘은 데네브의 밤이니까.

평생 필사적으로 살아왔으니 하루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이 밤이 지나고 날이 밝아 데네브가 사라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다.

엘레노어는 설령 사라지지 않아도 제 발로 걸어 나갈 마음을 굳혔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허리께에 닿는 조금 미묘한 감각은 그냥 리안이 기사라 검을 차고 자는 거라 여기면 될 것이다.

리안의 가슴에 얼굴을 묻자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며칠간 제대로 잠을 못 잤는데 리안에게 닿아 있으니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엘레노어는 드물게 빠른 속도로 잠에 빠져들었다.

“엘레노어?”

엘레노어가 잠들고 난 지 10분쯤 지났을 무렵. 리안이 그녀를 불렀다.

엘레노어는 이미 완전히 숙면에 들어가 평화로운 호흡 소리를 내고 있었다.

“정말 자는 겁니까.…….….”

이쪽은 닿고 싶어 미칠 지경인데..

리안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계속 망설이다가 살짝 고개를 기울여 엘레노어의 뺨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오늘은 이것으로 참는 수밖에 없는 듯했다.

자꾸 솟아오르는 충동을 누르며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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