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리안의 말에 엘레노어는 입을 떡벌렸다.
“뭐… 라고요?”
“돈이 필요하면 마련하겠습니다.
저택에 가면 드레스를 살 정도의 재물은 있을 겁니다.”
리안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엘레노어는 너무나 당황스러워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제국의 총아라면서 왜 이렇게 호구야!’
생각해 보니 계략에 넘어가 청혼까지 하지 않았나?
순정과 책임감이 지나쳐 큰일 날 남자다.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진짜!”
어쩐지 화가 나서 저절로 말이 나왔다.
“그러다 내가 돈 홀랑 털어 가면 어쩌려고 그래요?”
방금까지 돈을 달래 놓고 화를 내기 시작한 엘레노어를 보며 리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돈이 떨어지면 강도짓을 해서라도 먹여 살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차 대공이 될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순간 엘레노어의 머릿속에는 100년 뒤 제국의 역사 수업 시간이 자동 재생되었다.
[헨리 군 제국력 549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보세요.]
[네. 선생님.]
헨리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제국 최고의 기사가 애인의 사치 때문에 강도단으로 전락한 해입니다.]
아니다. 이건 절대 아니다.
물론 예습을 철저히 한 헨리 군은 무척 대견하지만, 어린아이에게 이 따위 역사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
그런 역사의 한 획 따위는 전혀 긋고 싶지 않았다.
암담하게 고개를 젓는 엘레노어에게 리안이 한 발짝 더 다가섰다.
“그런 건 얼마든지 사 줄 수 있습니다. 나도 당신이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걸 보고 싶으니까.”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에요?”
“음. 사실 솔직한 마음은.…….”
리안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걸 내 눈앞에서 벗는 모습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만.”
엉큼한 말을 하는데 너무나 달콤하다.
순간 심장이 뛰어서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그… 런 흉악한 목적의 선물은 필요 없어요.”
자신의 동요가 들키지 않도록 고개를 숙이며 말을 얼버무렸다.
자꾸 실룩실룩 입꼬리가 올라가 뭐라 말이 잘 나오지도 않았다.
“엘레노어.”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흠칫했다.
리안이 돈 달라고 내밀던 손을 가만히 쥐었기 때문이다.
“난 당신이 그런 여자가 아니란 걸 압니다.”
손이 무척 컸다.
맞닿은 손에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주변에서 다들 보고 있는데.
뿌리쳐야 하는데 왜인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를 떼어 버리려고 괴롭힌다 해도 나는 전부 감내할 겁니다.”
저음의 목소리가 마치 최면이라도 걸고 있는 것만 같다.
“그 끝에 당신이 마침내 마음을 열고 본래의 당신으로 돌아오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알고 있으니까요.”
리안이 손으로 엘레노어의 턱 끝을 부드럽게 올렸다.
고개가 힘없이 올라가 리안과 마주보게 되었다.
“그러니 아무 말이나 해 보십시오.
나는 준비가 돼 있습니다.”
아름다운 얼굴이 진중하고 너무나 뜨겁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을 보고 있으려니 닫아야만 하는 마음이 자꾸 움직이려 든다.
어쩌면 좋지.
머릿속에는 온통 그 말밖에 떠다니질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숨죽이고 있던 저택 안쪽이 소란스러워졌다.
“엇? 뭐야?”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안에서 뭔가 고함치는 소리 같은 것도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놀라 주변을 둘러보는 엘레노어의 귀에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칼라브리아 공작가의 사병이다!”
공작가의 사병?
리안을 찾으러 온 게 틀림없었다.
어떻게 하지?
안 그래도 과부하가 걸린 머리가 펑 터져 나갈 것 같다.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당황하고 있는데 리안이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당겼다.
“이리로 와요.”
마음은 정하지 못했지만,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그가 이끄는 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구불구불 미로처럼 심겨있는 정원수 사이를 가로질러 빠르게 걸었다.
“어딜 가는 거예요?”
“일단 자리를 피하려고 합니다.”
엘레노어는 무척 당황했다.
“자리를 피해서 어쩌려고요? 지금이라도 빨리 돌아가요!”
“난 가지 않을 겁니다.”
리안은 한 치도 타협의 여지가 없는 목소리로 딱 잘랐다.
“사람들이 우릴 주시하고 있었잖아요. 어느 쪽으로 갔는지 다 말해 줄 거라고요.”
“그러니까 잡혀서 귀찮아지지 않으려면 조금 더 빨리 걷는 게 좋겠군요.”
왜 이 남자가 내리는 결론은 공감이 안 가는 걸까.
엘레노어가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리안이 갑자기 그녀를 품으로 끌어당겼다.
“꺅!”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아주 가볍게 엘레노어를 안아들더니 속력을 높였다.
그냥 걷는 것처럼 보이는데, 축지 법을 쓰듯 달리는 것보다 빨랐다.
그녀는 문득 리안이 일반인 천 명을 상대할 수 있다는 제국 기사단의 일원이란 걸 상기했다. 심지어 그는 제국 역사상 최연소 기사단장이다.
마치 와 봤던 것처럼 망설이지도 않고 엄청난 속도로 정원을 주파한 그는 마지막으로 거의 어깨높이의 담장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 밖에는 어째서인지 이미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미리 준비해 둔 거예요?”
“맞습니다.”
“이걸 나보고 타라고요? 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억지 맞습니다. 미안합니다.”
리안이 솔직하게 인정하며 목까지 숙여 사과하는 바람에 엘레노어는 도리어 당황했다.
“하지만 난 오늘 당신과 꼭 함께 있고 싶습니다.”
리안의 목소리는 거절하기 힘든 힘이 서려 있었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입장에서는 선뜻 수락할 수도 없었다.
“왜 하필 오늘이에요? 다른 날도 많은데.”
오늘은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날인데.
“오늘은 나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니까요.”
엘레노어는 마음을 읽은 것 같은 리안의 말에 깜짝 놀랐다.
멀리 정원에서는 리안을 찾아 헤매는 칼라브리아 사병의 외침이 여전히 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리안은 엘레노어를 억지로 태우는 대신 설득하려 했다.
“엘레노어.”
진지한 얼굴로 리안이 그녀를 불렀다.
가까이에 둘이 있으니 또 그 용모 때문에 똑바로 바라보기가 민망했다.
“나에게 정말 아무런 마음도 없습니까?”
보랏빛 눈동자는 무척이나 진지했다.
“동침하고 나서도 전혀 아무 감정이 생기지 않았나요?”
그렇다고 말해야 하는데.
입을 움직이려 해도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엘레노어가 아무 말하지 못하자 리안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다면 됐습니다.”
리안은 엘레노어를 번쩍 안아 마차에 앉혔다.
그리고 그대로 고삐를 잡았다.
“꽉 잡아요.”
“앗, 하지만!”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엘레노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마차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미친 듯이 흔들렸으므로 엘레노어는 혀를 깨물지 않기 위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마차는 도심을 빠져나올 때까지 그 속도를 유지했다.
진동을 참다못한 엘레노어가 차라리 뛰어내릴까 고민하게 됐을 무렵 그들은 인적 없는 숲길에 접어들었다.
마차의 속도가 조금 잦아들자 조금 살 것 같았다.
엘레노어가 슬슬 어디로 가는 건지 물어보려는데 리안이 손을 들었다.
“데네브가 떠 있군요.”
“데네브?”
“제국에서 1년에 단 하루만 보인다.
는 별입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황녀가 데네브의 날에 태어나 ‘별의 소녀’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리안이 손가락으로 그 위치를 가르를 시작했다.
“내가 여섯 살 때 부모님이 집으로 유명한 점술가를 불러들여 앞날을 점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꽤 많이 했는데, 그중 오직 한 가지 점괘만 여전히 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점 같은 걸 믿을 거 같지 않은 리안이 그런 말을 꺼내자 무척 의외였다.
하지만 엘레노어는 점성술을 좋아했으므로 흥미를 보였다.
“무슨 점괘였나요?”
“내가 20세가 되는 해의 데네브가 뜨는 밤. 함께 밤을 보내는 사람이 내 평생 인연이라고요.”
엘레노어는 하마터면 소리를 내 감탄할 뻔했다.
‘그 점술가 한번 엄청 용하네.’
바로 오늘 그는 황녀와 맺어지게 되어 있었으니 딱 맞는 셈이다.
리안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다.
“그냥 점술가가 한 말일 뿐인데 왠지 정말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우연히든 필연이든 그날 함마디 그녀의 안으로 파고 들어와 심장을 흔들어 놓는다.
“그러니 오늘 밤 황궁에는 안 갑니다. 아마 지금 당신과 함께 가 아니라면 집에 틀어박혀 있었을 겁니다.”
리안의 말투는 확고했다.
그는 이제 무슨 말을 해도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만약에….”
엘레노어는 시선을 올려 데네브를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3일 전 그날 밤이 없었다면 당신은 황궁에 가지 않았을까요?”
“처음부터 당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요.”
리안이 엘레노어를 지긋이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당신이 내게 왔습니다.”
마음이 설레고 욱신거렸다.
“엘레노어.”
그가 부르는 자신의 이름은 마치 다른 언어처럼 들리는 기묘한 울림을 담고 있었다.
“나는 당신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그건 당신 말대로 천천히 해도 될 겁니다.”
“그저 하나만 부탁하고 싶습니다.”
리안은 고삐를 쥐고 있던 손 하나를 뻗어 엘레노어의 무릎에 얹혀 있는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커다란 손은 딱 기분 좋은 온도인데 열기에 데여 버릴 것만 같았다.
“오늘 밤 나와 함께 있어 줘요.”
담백한 말투였으나 악마가 유혹해 엘레노어가 잠잠히 있자 리안이 채 근하듯 손에 힘을 살짝 주었다.
여기서 거절하면 다시 돌려보내 줄까?
묻는 듯하지만 리안의 눈빛은 절대 물러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엘레노어는 붉어진 얼굴을 숙인 채 새침하게 답했다.
“이미 가는 수밖에 없잖아요.”
마지못해 수락하는 것 같은 답변에도 리안은 무척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디로 가는 거예요?”
“라 플로이드를 아십니까?”
엘레노어의 입술이 벌어졌다.
라 플로이드.
부의 상징.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
제국의 다섯 공작 중 유일하게 건국 무공이 아닌 재력만으로 공작 위를 샀다는 플로이드 공작가의 성이었다.
원작에서 황녀와 결합한 후 제국 최강의 무(武)가인 칼라브리아 공작가의 덕을 보는 내용은 많이 나오지만, 모계인 플로이드 공작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그저 제국 최강의 부(富)라는 명성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이었다.
황가가 지닌 부도 어마어마했으므로 나올 이유가 없었다.
“그곳은 플로이드의 혈통을 이은 사람과 함께, 혹은 초대를 받지 않으면 출입이 엄금됩니다. 그러니 사병 때문에 귀찮아질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하지만 거기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