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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10화 (10/120)

제10화

“표정 좀 풀지?”

딱딱한 얼굴로 와인을 마시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앞에서 웃고 있는 육감적인 여성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연회장이라고, 로우앤 공작.”

여인의 지적대로 남자의 표정은 연회라는 배경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단정하고 짧은 은빛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귀족적이고 준수했지만, 미간에는 나이에 걸맞지 않은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그러고 있으니까 이 주변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잖아.”

누구도 감히 주변에 다가오지 못하는 것은 그가 이 고위 귀족들만 모인 연회에서도 범접하기 어려운 최고위 귀족이기 때문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클로드 로우앤.

제국의 법률을 수호하는 젊은 대법관이자 제국 5대 공작가의 새로운 가주였다.

“굳이 아무도 다가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만.”

클로드는 당신도 저리 가주었으면 좋겠다는 눈빛을 발사했지만, 여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 그녀를 보고도 클로드는 불평하지 못했다.

완숙한 미모를 뽐내는 그녀 역시 제국의 다섯 공작 중 하나.

제국의 외교를 이끄는 에이브로트공작 가의 수장이자 동부의 지배자인 미나즈 에이브로트였다.

“그렇게 싫어할 거면 서쪽에나 박혀 있지 왜 여기까지 온 거야?”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내 의무니까요.”

클로드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의무가 아니었다면 중앙에 발을 들이지도 않을 겁니다.”

그의 덧붙임에 미나즈는 쿡쿡 웃었다.

제국 전체는 황제의 권역이었으나 세부적으로는 황가를 모시는 다섯공작가의 세력권으로 나뉘었다.

북부의 플로이드, 서부의 로우앤, 동부의 에이브로트, 남부의 보르미아, 그리고 중앙의 칼라브리아.

클로드는 칼라브리아 공작을 무척 싫어했다.

서부는 중앙을 지나지 않으면 해로를 이용하지 않는 이상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어지간한 일이 없으면 절대로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렇다면 네가 꽤 재미있어 할 이야기를 가져왔는데.”

“언제나처럼 시시한 농담 따먹기라면 미리 사양하겠습니다.”

“그런 거 아냐.”

고개를 저은 뒤 미나즈가 손을 척치켜들었다.

“지금 칼라브리아 공작이 왜 저렇게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는지 알아?”

클로드는 시선을 돌려 그녀가 가리 킨 방향을 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칼라브리아 공작이 언제나처럼 거들먹거리고 있는 대신 어수선하게 사방을 서성이고 있었다.

“왜 저러는 겁니까?”

그가 묻는 것과 동시에 옆에서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으면 그 이유를 나도 들을 수 있습니까?”

다가온 노인은 행정관, 아서 보르미아 공작이었다.

흰 수염이 지긋한 나이임에도 자신의 자식뻘인 공작들에게 태도가 무척 정중했다.

미나즈는 앉으라는 듯 자리를 손짓한 뒤 신나게 말했다.

“듣자 하니 우리 기사단장 나리께서 연회에 안 왔다는 모양이야.”

잔뜩 들뜬 그녀와 달리 두 남자의 반응은 시들했다.

“공무라도 있나 보죠. 곧 올 겁니다.”

아첨꾼 귀족들이 황녀의 생일 선물외에도 미리 약혼 선물을 준비하는 바람에 이번 탄생제 시작 전 희귀보석류의 가격이 폭등하기까지 했다.

“내 생각엔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해.”

“뭐 근거라도 있습니까?”

“여자의 직감이야!”

미나즈는 자신만만한 어조가 무색하게 클로드는 바로 흥미를 잃은 표정을 지었다.

“뭐, 에이브로트 공작님의 직감은 잘 맞으니 그렇다고 해 둘까요.”

보르미아 공작 역시 예의 바르게 말을 받았지만, 전혀 믿는 기색은 아니었다.

“정말 그렇게 될 거라니까요? 두고 보세요.”

놀랍게도 그녀의 장담대로 시간이 흐를수록 리안의 부재는 명백해졌다.

진작 시작했어야 할 댄스가 한참이나 미뤄졌으며 애써 웃고 있던 황녀의 표정도 슬슬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 말이 맞지?”

“그렇게 웃을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의기양양하게 말하는 미나즈에게 클로드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의 말대로 웃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 누구라도 댄스를 신청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미 상대가 정해져 있던거나 마찬가지라 아무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술렁이는 파티장을 보고 있던 미나 즈가 클로드를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너라도 황녀 전하께 댄스를 신청하는 게 낫지 않겠어?”

댄스를 혐오하는 클로드가 당장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나입니까?”

“그래도 황녀 탄생제인데 급을 맞춰야 할 거 아냐? 지금 젊은 고위 귀족 중 미혼이라면 너밖에 없잖아?”

미나즈가 파티장을 둘러보며 아쉽다는 듯 덧붙였다.

“이럴 때 페이드라 공작이 있었다.

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수도에 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참석하지 않았나 봐.”

‘페이드라’ 라는 이름이 나오자 클로드는 더욱 표정을 굳혔다.

“그런 불결한 가문의 남자와 나를 함께 묶는 겁니까?”

“오히려 페이드라 공작 쪽이 너보다 훨씬 낫지. 댄스 실력도 훌륭하고 엄청나게 잘생겼잖아?”

클로드도 사실 어디가서 빠지는 외모는 아니었다.

그러나 줄곧 무시당한 미나즈는 일부러 더 부아를 돋우듯 말을 늘어놓았다.

“게다가 페이드라 공작은 제국 최고의 주술사이자 약제사이기도 하지. 아아. 그 남자라면 분명히 분위기를 읽어서 황녀를 무안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을 거야.”

미나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클로 드가 쾅 소리가 나게 식탁을 내려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깟 외국의 방탕한 가짜 공작 따위가 연회에 왔어도 감히 황녀 전하를 모시게 하진 않을 겁니다.”

옷매무시를 가다듬은 클로드는 꼿꼿한 태도로 황녀 쪽으로 걸어갔다.

그걸 보고 히죽대는 미나즈에게 아서 보르미아 공작이 말했다.

“역시 외교관답게 사람을 조종하는데 능하시군요.”

“저 녀석은 페이드라 공작 이름만 가져다 대면 강아지라도 조종할 수 있을 걸요.”

두 사람이 빙그레 웃는 사이 로우앤 공작의 신청으로 파티의 댄스가 시작되었다.

분위기가 조금이나마 살아나기 시작했지만, 아서는 우려하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부디 연회가 끝날 때까지는 칼라 브리아 백작이 돌아와야 할 텐데.”

미나즈는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녀의 이런 감은 절대 틀리는 법이 없었다.

‘부디 재미있게 흘러가면 좋겠네.”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며 미나즈는 황녀를 위한 축배를 입으로 가져갔다.

*

엘레노어는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반했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평생 다시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체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

“그, 그게……… 대체…”

엘레노어는 황망한 기분으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갑자기 무슨… 어째서….”

너무 당황해서 좀처럼 문장이 완성되지 않았다.

혹시 놀리는 건가?

그녀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장면이 떠올랐다.

“나한테 반할지도 모른다고 했을 때 비웃었잖아요?”

엘레노어의 물음에 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비웃은 게 아니라 스스로 말해 놓고 쑥스러워서 빨개진 모습이 귀여워서 웃은 겁니다.”

리안은 그때 생각이 되살아난 듯 미소 지었다.

차가운 얼굴이 부드럽게 변하자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녀를 바라보는 리안의 선명한 보랏빛 눈동자가 지나치게 다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아무래도 농담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걸 엘레노어는 부정하려 애썼다.

‘아냐. 이건 말도 안 돼. 반할 만한 계기는 딱히 없었잖아.’

둘은 그냥 서재에서 처음 만났고, 시답지 않은 대화를 하다가 서로 눈이 맞아 밤을 보낸 것뿐이다.

짚이는 거라고는…….

“나 사실 크리스토퍼 한젠데일 경책 안 좋아해요.”

느닷없는 말에 리안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때는…….”

“그냥 당신 취향 조사해서 화제로 삼으려고 했던 거뿐이에요.”

이건 거짓말이었다.

그 와중에도 재미있던 게 생각나 집에 틀어박힌 동안 그것만 꼬박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

너무 푹 빠진 나머지 엄청나게 두꺼운 데도 날 세워 전부 다 읽어버렸다.

리안은 약간 시무룩해 보였지만, 담담하게 대답했다.

“싫다면 읽도록 강요할 생각 없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책 때문이 아니었나?

그렇다면 설마 몸이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건가?

처음 여자와 관계한 충격 때문에 각인 같은 게 새겨진 건지도 모른다.

“그러면 같이 잤던 거 때문에 그러시는 거예요?”

직설적인 엘레노어의 물음에 리안이 얼굴을 붉혔다.

“물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좋았습니다만.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닙니다.”

목소리가 쑥스러운 듯 잦아들었지만,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뺨을 붉힌 그의 모습은 치명에 가까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싫은 건가?

솔직히 모르겠다.

어차피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반해서…”

엘레노어는 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그런 말을 해서 대체 뭘 어쩌자는 거죠?”

이 질문에 말문이 막힐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리안으로부터 무척 깔끔한 답변이 나왔다.

“정식으로 교제하고 싶습니다.”

엘레노어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왜 안 됩니까?”

“잘 아시겠지만, 저는 남편을 잃고 홀로 된 여인입니다.”

리안이 잠시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깜빡이더니 조심스레 말했다.

“그러니까…… 만나도 괜찮은 거 아닙니까?”

아니 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야.

나는 이미 결혼했던 하위 귀족이고 당신은 이 나라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엘레노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둘이 교제를 하는 건 말도 안 된다.

그녀는 평민 출신의 남작 후처고 그는 제국 최고위 귀족이었다.

서로 신분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심지어 같은 파티에 초대받을 수도 없지 않은가.

하룻밤을 보낸 거로 엮여서 뭘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레벨이 아니었다.

주변에서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황녀까지 얽혀 있잖아.”

황제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는 황녀가 그를 엄청나게 좋아한다.

소설 속 그녀는 어떤 방해에도 굴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녀 앞에서 평민 출신 남작부인과 교제 중이라 마음을 받아 줄수 없다고 말하는 리안을 떠올리니 등골이 오싹했다.

‘황제가 나를 단두대로 보낼지도 몰라.’

그녀는 황녀 앞에 한 줌의 위협도 되지 않는 하위 귀족일 뿐이다.

풍기 문란죄든 뭐든 죄목은 뭐라도 붙일 수 있을 거다.

미래도 없는 관계 때문에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빨리 돌려보내야 해.’

드디어 혼란스럽던 머릿속에 또렷한 생각이 떠올랐다.

목숨을 부지하려면 그 방법뿐이었다.

빠른 속도로 정을 떨어지게 해서 돌려보내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떻게 하지..’

초조한 듯 엘레노어를 바라보는 리안의 표정은 아무리 봐도 진심이었다.

어지간한 충격으로는 포기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최후의 방법뿐이다.

“정말 저와 교제하고 싶으시면….….”

엘레노어는 빠르게 정을 떼는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마법의 말을 사용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리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돈…?”

놀란 듯한 말투를 보니 효과가 있어 보였다.

엘레노어는 손을 내밀며 적극적으로 나섰다.

“네. 돈이요. 가지고 싶은 드레스가 있는데 돈이 좀 필요해서요.”

내친김에 말투도 거칠게 바꾸고 메소드 연기를 했다.

“제가 평소에 생각 없이 돈을 아무렇게나 막 쓰거든요. 그래서 그냥 확 훔칠까 고민하다가 마침 돈 될 거리가 있다길래 공작 저택 간 거거든요.”

“…..”

“대충 시간만 떼우다 돈만 받고 도망치려고 했는데. 평소 남자에게 막 추파를 던지던 버릇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돈도 못 받고 내뺐네요.”

그래. 나는 한 떨기 파리지옥 같은 저속하고 낭비가 심한 데다 말투도 사나운 요부.

이 정도면 제아무리 자비의 신 가운데 토막을 삶아 먹었더라도 정이 딱 떨어졌겠지.

리안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지금 가진 돈이 없습니다만.”

얼마 후 입을 연 리안은 무척 딱딱한 표정을 지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제가 돌아가는 게 낫겠습니까?”

이제 좀 정신이 들었는가 보군.

뭔가 안도가 되면서도 섭섭한 것 같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잘된 일이다.

그래, 잘 가요.

다음에는 이상한 여자에게 홀리지 말고, 엘레노어가 마음속으로 작별 인사를 하고 있을 때였다.

“돌아가서 돈을 가져오면 되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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