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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9화 (9/120)

말하면서 공작은 블레인을 흘깃 보았다.

황궁과 훈련장, 저택을 제외하면 리안의 유일한 행선지는 블레인의 집뿐이다.

그가 여기에 와 있으니 조금은 안심한 모양이었다.

블레인은 일단 입을 열기 전에 사

“아니, 예복을 입고 대체 어디로 사라졌다는 거야!”

“납치라도 당한 걸까요?”

체펠린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공작과 블레인은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대체 누가 그 괴물 같은 녀석을 납치할 수 있단 말이오?”

늘 검을 소지하는 데다가 방심하는 법도 없는 제국 최강의 기사를 축제로 북적대는 수도 한복판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할 수는 없었다.

성공해도 최소한 그 주변은 초토화가 돼서 난리가 났어야 정상이다.

“아무래도 이 근방에 있을 것 같습니다.”

사병의 말에 공작도 고개를 끄덕이고 명령했다.

“흩어져서 황궁 구석구석 샅샅이 찾아봐!”

그러나 황궁에서도 리안을 찾아냈다는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쯤 되자 블레인도 계속 입을 다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공작님.”

공작이 잔뜩 찌푸린 얼굴을 블레인에게로 돌렸다.

“제가 리안이 어디 있는지 알지도 모릅니다.”

“뭐?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그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장소라…….”

리안은 며칠 전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 참석하는 파티가 있다면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 달라고 부탁했다.

블레인은 뭔가 공무와 관련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오늘 낮에 그녀가 노버슈타인 후작부인 파티에 참석 의사를 밝혔다는 사실을 듣고 공작가로 사람을 보내 알려 주었다.

그 사실을 전달하자 공작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런 공무가 있었나? 왜 그 여자가 있는 곳에……..”

“그런 얘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빨리 찾아가 봅시다.”

체펠린은 어째 몹시 불안해 보였다.

재촉을 받은 공작은 그런 걸 유추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듯 바로 명령했다.

“당장 노버슈타인 후작가에 가서 리안이 있는지 확인해 봐!”

“계시면 어떻게 할까요?”

“반드시 데려와. 말을 듣지 않으면 억지로 데려와도 상관없다!”

제국 최고의 기사를 억지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받은 사병들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달려 나갔다.

“저도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황녀가 누구와 춤을 추든 알 바는 아니지만, 따라가는 게 10대 소녀의 파티에 잡혀 있는 것 보다는 훨씬 재밌을 거란 예감이 들었다.

블레인이 나서자 공작이 간곡히 부탁했다.

“그래, 황녀께서 기다리고 계시니 부디 잘 부탁하네.”

블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사병들과 함께 연회장을 떠났다.

엘레노어는 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볼 일로 온 거겠지.’

후작 부인의 파티에 초대된 김에 들렀을 뿐일 수도 있다.

‘어쩌면 후작 부인과 먼 친척일지도 몰라.

엘레노어는 머릿속에서 필사적으로 희망 회로를 돌렸다.

리안은 뭔가를 찾듯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고개가 한 지점에서 멈췄다.

엘레노어와 리안의 시선이 마주쳤다.

리안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물길처럼 갈라졌다.

뒤에서 영애들이 탄성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엘레노어는 리안이 사람들 사이를 지나 다가오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혼자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 같았다.

평상복을 입었을 때도 파괴적이던 사람이 예복을 차려입으니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모두 홀린 듯 그를 보고 있어 장내는 파티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엘레노어.”

리안의 목소리가 고요한 홀에 또렷이 울렸다.

“함께 춤을 추시겠습니까?”

당신이 춤을 청해야 할 상대는 내가 아닐 텐데.

거짓말 같은 현실에 눈앞이 캄캄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무마해야 하지.

홀 안의 모든 시선이 여기 쏠려있었다.

여기서 싫다고 뿌리치면 더욱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모두의 앞에서 춤을 추고 있을 순 없었다.

“몸이 좋지 않은데..….”

엘레노어는 의자에서 일어서며 미소를 지었다.

“춤 추기 전에 잠시 바깥에서 얘기를 나눌까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한 뒤 그녀는 먼저 돌아서서 걷기 시작했다.

침착하려 애썼지만, 머릿속에 온통 의문 부호만 가득했다.

‘대체 왜 여기 있지? 황녀는 어떻게 하고?’

사람들이 없는 정원 구석에 도착하자마자 엘레노어는 리안을 휙 돌아보며 물었다.

“왜 이런 시간에 여기 온 거예요?”

리안은 엘레노어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당신이 어느 파티에 있는지 알아보느라 좀 늦었습니다.”

아니, 늦게 왔다고 탓하는 게 아닌데!

“내 말은 왜 여기 왔냐는 거예요. 지금 황궁의 파티에 있어야 하잖아요!”

“나는 내가 참석하고 싶은 파티에 참석했을 뿐입니다.”

이 파티에 참석하고 싶었다니.

황궁에 비하면 초라한 데다 조용히 있고 싶어 택했을 뿐 솔직히 그리 재미있는 파티도 아니었다.

“혹시 제가 여기 있는 거 알고 오신 거예요?”

“물론입니다.”

리안의 즉답에 엘레노어는 무척 당황스러웠다.

“제가 누군지는 어떻게 알았어요?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요?”

“어떨 거 같습니까?”

리안은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다.

대답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여기서 그와 문답을 주고받을 시간이 없었다.

엘레노어는 캐어묻는 대신 빠르게 말했다.

“당신은 여기 있으면 안 돼요. 빨리 황궁으로 돌아가세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왜라니요? 이러다가 사람들이 눈치채면 어쩌려고 그래요?”

“눈치?”

리안은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래요, 눈치. 지금 나는 비밀을 지키려고 당신 때문에 내가 유행시킨 드레스조차 못 입고 이렇게 수녀처럼 싸매고 있다고요.”

“왜 입을 수 없는 겁니까?”

“당신 때문에 가려야…….”

엘레노어는 민망해져 말끝을 삼켰다.

빨개진 그녀를 보고 리안이 단정한 눈썹 끝을 올렸다.

“거기에 내가 남긴 흔적들이 있는 겁니까?”

“그럼 목이라도 매달다 온 줄 아세요?”

퉁명스레 답했는데 리안은 어째 기뻐 보였다.

어째 자꾸 대화가 겉도는 거 같았다.

엘레노어는 뿌듯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안에게 쏘아붙였다.

“사람들이 우리 둘 사이에 있던 일을 눈치채기 전에 빨리 돌아가란 말이에요!”

그 말을 듣자 리안이 살짝 미간을 모았다.

“사람들이 우리 사이에 있던 일을 눈치챌까 봐 걱정하는 거였습니까?”

“그래요. 지금이라면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으니 서둘러요.”

아직 늦지 않았다.

어떻게든 탄생제 파티로 돌려보내 여주와 만나게 해야 한다.

그렇게만 되면 지금 일은 해프닝으로 넘길 수 있다.

그러나.

“난 사람들이 알게 돼도 상관없습니다.”

리안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얽히면 당신의 입장이 곤란해질 텐데요.”

“난 상관없습니다.”

너무나 태연한 리안의 말에 엘레노어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당신이 내게 화내는 건 우리에게 있었던 일을 사람들이 아는 게 싫어서입니까?”

당연한 거잖아?

엘레노어가 고개를 끄덕이자 리안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런 문제였군요.”

내내 입가에 띠고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리안은 입술을 깨물더니 딱딱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아마 이 말을 하면 더 화를 낼 것 같습니다만.”

어쩐지 그렇게 말하는 리안이 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차피 당신은 이미 화를 내고 있으니까.”

말끝을 흘리며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엘레노어에게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내 생각에 당신의 가장 큰 문제는….”

쑥스러운 듯한 리안의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내가 그날 밤 당신에게 반했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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