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엘레노어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억지로 화장대 앞에 앉은 지 수시간이 지났지만, 준비는 조금도 진척되지 않았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머리가 복잡한 탓이었다.
테니 기억 못 하는 게 낫다.
그러나 그녀의 기억은 지나칠 정도로 또렷했다.
시도 때도 없이 미소 짓던 리안의 얼굴이 어른거렸고, 이불이 다리만 스쳐도 그의 손길이 떠올라 흠칫했다.
눈을 감으면 아예 그때의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었다.
억지로 잊으려 해도 소용없었다.
그녀의 몸에는 여전히 그의 흔적이 남아 있었으니까.
‘이건 일주일은 가겠네.”
금욕적으로 보이는 곱상한 얼굴과 달리 리안은 대단히 노골적인 남자였다.
격렬했던 관계의 자국이 여전히 엘레노어의 몸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목덜미에서 어깨, 가슴, 그리고 허벅지 안쪽까지 야한 빛깔들로 울긋불긋했다.
이러니 잠깐 잊었다가도 생각나 버리고 만다.
게다가 그렇게 강렬하게 탐해진 탓인지 온몸도 몹시 예민해졌다.
자꾸 몸이 뜨거워지거나 이상한 소리가 나서 그녀는 외출도 하지 못하고 최대한 움직임도 자중해야만 했다.
‘그 사람 홀리게 생겨 먹은 남자가 내 몸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남자와 밤을 보내고 이렇게 변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됐을까.
번 결혼한 몸.
그쪽은 제국의 총아이자 대륙 최고의 신랑감.
둘은 절대로 맺어질 수 없는 사이였다.
엘레노어가 주변을 맴돈다는 말조차도 돌아서는 안 된다.
‘뭐 이제 알려질 걱정은 없겠지만.’
이쪽만 입을 다물면 리안으로부터 새어 나갈 염려는 없을 것이다.
과묵하기로 유명한 장래 공작이 신분이 낮은 여자와 우연히 맺은 관계에 대해 떠들 리가 없으니까.
그는 잠시 성욕과 호기심이 동해 자 버렸을 뿐, 얼마 안 가서 그녀와 가볍게 관계를 맺은 걸 후회할 것이다.
‘뭔가 연락이 온다면 아마 입을 막으려는 의도겠지.’
알려지기를 원치 않는 건 마찬가지지만, 조금 씁쓸한 기분도 들었다.
‘다신 만날 수도 없는 남자와 처음을 보내 버렸네.’
딱히 처음 따위에 집착할 생각은 없지만,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난 후회 안 해.’
이 생각은 진심이었다.
솔직히 처음엔 아팠지만, 나중엔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았다.
어차피 누군가와 맺어질 수 없는 이상 첫 상대가 리안 플로이드 칼라 브리아라면 최상이다.
그와 단 하룻밤만이라도 보내고 싶어 하는 여인은 수도 없이 많다.
추억으로 남기자.
뭐 리안에게 좋은 추억으로 남진 않겠지만, 그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다.
다정하던 손길과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 뇌리에 남는 나직한 목소리.
‘엘레노어.’
그는 분명히 그녀를 불렀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았을까.
궁금했지만, 엘레노어는 의식적으로 의문을 지워 내려 했다.
알든 모르는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평생 그 답은 찾지 못할 것이다.
‘오늘만 지나면 다 과거의 일이 되는 거야.’
오늘은 바로 리안이 소설 속에서 황녀와 같이 밤을 보내는 날.
내일 아침에 깨어나면 그는 황녀에게 청혼하게 될 것이다.
“자, 그럼 내 머릿속에서도 지워버려야지.”
엘레노어는 마음을 다잡듯 소리 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심기일전한 것처럼 거울을 향해 똑바로 앉았다.
황녀 탄생제 첫날인 오늘은 수도 전체가 파티의 물결이다.
황궁에서는 탄신 파티가 있지만, 당연히 하위 귀족들은 초대받지 못한다.
황궁에 갈 수 없는 사람들은 축제기간 내내 곳곳에서 개최되는 파티에 참석했다.
황가를 향한 충성심을 보이는 한편, 축제의 한 축을 담당해 귀족으로서 권위를 세우고 싶은 것이다.
동시에 여러 파티가 열리는 만큼 인기 있는 귀족을 참석시키려는 눈치 싸움이 극심했다.
엘레노어는 그중 단연 인기였다.
젊은 여자 귀족을 몰고 다니는 그녀가 등장하면 남자 귀족들도 자연히 몰려들 테니까.
몇몇 귀족가에서는 탄생제 중 아무 날이라도 좋으니 꼭 참석해 달라며 값진 선물을 보내기까지 했다.
엘레노어로서도 많은 사람이 파티에 참석하는 지금이 책을 홍보하고 이름값을 올릴 절호의 기회였다.
파티에 참석할 기분은 아니었지만, 억지로라도 나가야만 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올라온 건데. 이런 일 하나에 흔들리면 안 되지.’
엘레노어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책상 쪽을 돌아보았다.
수많은 초대장 사이에 사방에서 몰려든 청구서와 독촉, 그리고 마리체 영지에서 온 편지들이 놓여 있었다.
수도에서 잘해 나가지 못하면 그녀의 시어머니는 다시 마리체 영지로 돌아오라고 길길이 날뛸 것이다.
빠르게 일상에 복귀하는 게 평온을 되찾는 지름길이다.
그렇게 믿으며 엘레노어는 화장을 시작했다.
*
엘레노어는 노버슈타인 후작 부인의 장엄한 홀로 들어섰다.
이곳의 파티는 젊은 사람들에겐 다소 지루하다는 평판이었지만, 고급스럽고 차분해서 오늘의 기분에는 최적이었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 시선이 단번에 쏠렸다.
금방 수많은 사람이 다가와 엘레노어에게 인사말을 건넸다.
“어머, 부인. 오늘도 정말 아름답네요. 그건 새로운 트렌드인가요?”
한 부인의 말에 엘레노어는 뜨끔했다.
그녀는 자신이 유행시킨 드레스 대신 색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깃을 세운 레이스 블라우스를 목끝까지 여민 후 브로치를 차고 풍성한 자락의 드레스에 팔을 완전히 가리는 긴 장갑을 꼈다.
물론 패션이라기보단 리안이 남긴 흔적을 가리기 위한 호구지책이었다.
하지만 엘레노어의 늘씬한 몸과 세련된 스타일링과 어우러지니 그럴싸하게 보였는지 부인들은 지금껏 본적 없는 아름다움이라며 입이 침이마르도록 칭찬을 늘어놓았다.
“자자, 부인들, 남작 부인을 독점하지 말고 다 함께 중앙으로 갑시다.
댄스가 시작됩니다.”
홀에 음악이 흐르자 귀족 신사들이 다가와 여자들에게 댄스를 청했다.
엘레노어 역시 수많은 신청을 받았지만,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죄송합니다. 곧 낭독이 있어서.”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는 말을 하는 게 편했으므로 엘레노어는 춤 대신 독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하나하나 상대하는 것이 힘들고 머리가 아팠지만, 서서히 견딜 만해졌다.
파티를 누비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서서히 현실감이 돌아왔다.
“그렇게 됐답니다. 이러다 남작 부인 때문에 제가 세 번째 결혼을 하겠다고요. 호호.”
엘레노어는 열성 팬인 크로슈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음을 지었다.
평소보다 와인을 많이 마신 탓인지 기분도 많이 좋아졌다.
이제 그녀는 예의상 응대하는 것만이 아니라 제법 분위기에 녹아들고 있었다.
‘다음 댄스 타임엔 나도 나가 볼까.’
엘레노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장내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졌다.
‘뭐지?’
물론 파티에 일순 정적이 감돌 때도 있지만, 금방 지나가곤 한다.
이렇게 길어진다는 건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었다.
원인을 찾아 주변을 살짝 살핀 엘레노어는 회장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입구 쪽에 꽂혀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구 대단한 사람이라도 온 건가요?”
“그러게 말이에요.”
엘레노어 주변에 앉아 있던 여인들도 호기심이 돋는지 몸을 일으켜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모여 있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에잇. 제가 올라가서 볼게요.”
호기심 많은 어린 영애 하나가 취기를 빌려 과감히 의자 위로 올라갔다.
잠시 뒤 그녀가 낮은 비명을 질렀다.
“어머나, 어떻게 해!”
“왜 그래요?”
영애는 신을 만난 신도처럼 어찌나 생겨난 틈으로 엘레노어도 입구 쪽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주변 사람들 위로 쭉 나와 있는 큰 키.
찬연한 플레티넘 블론드와 제국 기사단을 상징하는 붉은 휘장.
그가 왜.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걸까.
황궁에 있어야 할 리안 플로이드칼라브리아가 거기 있었다.
은 빈티지 포도주를 마치 물처럼 마시고 있었다.
그러나 회장 중앙에 선 블레인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정말 따분한 파티야.’
고급스러운 음식도 좋지만, 한창 때 청년 귀족에게는 역시 이성 귀족을 만날 수 있느냐가 파티의 재미를 좌우할 것이다.
블레인은 작위가 높지는 않았지만, 제국 기사단 소속의 촉망받는 귀족인 데다 외모가 좋기 때문에 제법 인기가 있었다.
할 것 같습니다만.”
제국의 파티에서 댄스는 누군가가 파티의 주인공에게 춤을 신청함으로써 시작된다.
“황녀님께서는 생일인 만큼 연모하는 분이 그 상대가 되어 주길 원하십니다.”
올해의 주인공은 황녀.
굳이 감출 것도 없이 춤을 신청하는 것은 당연히 리안일 것이다.
“당연히 그렇겠지요.”
적당히 대답했는데도 체펠린은 가지 않고 뭔가 기다리듯 가만히 서 있었다.
블레인이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자 결국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다른 사람의 행방을 묻는 게 실례인 거 같아 돌려 말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블레인은 이미 익숙한 일이라 불쾌하지도 않았다.
리안이 평소 파티에 얼굴만 비치고 몰래 숨어 버리는 일이 흔했기 때문이다.
블레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작은 뒤에 서 있는 남자들에게 호통을 쳤다.
“또 집에 틀어박혀 있는 모양이군.
황녀 전하께서 눈치채기 전에 당장가서 데려와!”
복장을 보니 칼라브리아 공작가의사병이었다.
그들은 공작의 재촉을 받고 황급히 저택을 향해 떠났다.
체펠린이 걱정스레 말했다.
“찾을 수 있을까요?”
“그럴 거요. 근무 시간 외에는 밖으로 나가는 법이 거의 없는 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