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3년 전,
제국 기사단은 노후화된 훈련 시설들에 대한 정비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당시 열일곱 살이던 리안은 제국 소년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었다.
공사 기간 내내 계속 훈련을 쉴수는 없었으므로 그들은 넓은 영지를 가진 귀족들의 후원을 받아 훈련장을 마련했다.
소년 기사단이 향한 곳은 거부인 콘브라운 후작의 영지였다.
사용할 수 있는 공간도 넓고 대접도 후했으나 수시로 열리는 파티가 문제였다.
“정말 파티에 참석하지 않으실 겁니까?”
살이 뒤룩뒤룩 찐 콘브라운 후작이 굽신거리며 리안에게 물었다.
“백작님께서 자리를 빛내 주시면 제 딸아이에게도 큰 추억이 될 것 같습니다만.”
“죄송합니다만, 저는 그런 자리가 불편합니다.”
한 치의 여지도 없는 말투로 딱 자른 뒤 리안은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그는 제국의 후지 기수들을 파티에 불러 재산에 비해 낮은 명예를 살리려는 모양이었다.
리안은 충분히 무시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가문이 별 볼일 없는 단원들은 거부하지 못하고 파티에 끌려갔다.
문제의 밤.
그날은 후작 영애의 생일이었다.
“백작님.”
반복된 거절에도 불구하고 후작의 고용인들이 수시로 찾아와 성가시게 했다.
이번에도 그런 건가 해서 대답조차 하지 않는데 문밖에 선 후작 영애를 보고 리안은 당황했다.
“내려오시지 않겠다고 하셔서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뒤에는 음식이 차려진 손수레가 있었다.
“제 생일이니 부디 함께 시간을 보내게 해 주세요. 그냥 식사만이라도…….”
“그럴 수 없습니다.”
리안은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딱 잘랐다.
“누가 보기 전에 파티장으로 돌아가십시오.”
차가운 말을 남긴 뒤 리안은 그녀를 내버려 두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또다시 찾아올 방해를 피해 넓은 성 구석에 구색만 갖춰 놓은 - 아마 몇 년간 아무도 이용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도서관으로 피신했다.
외진 곳에 있어서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시간을 보내기에 적합했다.
리안은 흐릿한 등불만 켠 채 독서에 몰두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고요한 창밖에 소음이 일었다.
고개를 든 순간 뭔가가 달려서 창밖을 휙 지나갔다.
혹시 수상한 자가 아닌가 싶어 리안은 창가 쪽으로 다가갔다.
밖을 내다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심장이 터질 정도로 슬픈 울음소리가 울렸다.
‘누구지?’
한 소녀가 나무 그늘에 선 채 울고 있었다.
어찌나 절절한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사연을 묻고 싶을 만큼 먹먹한 심정이 전해졌다.
리안은 그때까지 다른 사람의 감정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소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좋은 옷차림을 한 걸 보면 귀족여인 같은데.
무슨 이유로 이렇게 한적한 곳까지 찾아 들어와서 눈물을 흘리는 걸까.
묵묵히 바라보는 사이 소녀의 울음은 점점 잦아들어 갔다.
조금 안정되자 그녀는 그늘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달빛 아래에 소녀의 눈물 젖은 얼굴이 드러난 순간.
어떤 격한 훈련에도 끄떡없던 리안의 심장이 기묘할 정도로 쿵쿵 뛰었다.
그녀는 아름다웠으나 그를 사로잡은 것은 미모가 아니었다.
분명 앳된 얼굴인데 눈빛에는 달관한 듯한 빛이 서려 있었다.
울고 있었을 때는 금방 사라질 것처럼 여려 보였는데 그치고 나자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숨어 흐느끼던 가냘픈 소녀는 온데간데없고 도도하고 기품 있는 작은 숙녀만이 있었다.
그렇게 급격히 변모한 소녀는 왔을 때처럼 갑작스레 사라져 버렸다.
그녀가 머문 것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리안은 한동안 그곳에 멈춰 선 채 꼼짝하지 못했다.
도서관에 머물던 리안이 방으로 돌아간 것은 밤이 깊은 후였다.
그는 친우인 블레인의 방문을 받았다.
“아, 시시한 파티였어.”
포도주로 상기된 얼굴을 한 채 블레인이 지껄여 댔다.
“다들 어찌나 속물이던지. 저녁 내내 자기 자랑을 들었더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아.”
다행히 영애는 리안에게 거절당한 사실을 비밀에 부친 모양이었다.
리안은 평소라면 건성으로 들었을 블레인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리고 마구 쏟아져 나오는 말들 속에서 마음에 걸리는 대목을 찾아 낼 수 있었다.
“게다가 어린 여자를 일부러 불러내서 희롱하더군. 정말 저질이야.”
“희롱을 했다고?”
“그래.”
블레인은 리안이 관심을 보이자 신이 나서 설명했다.
“평민 출신 남작 부인인데 아직 10대에 꽤 예쁘더군. 옥사한 남편에게서 상당한 영지를 물려받았나 봐.
억지로 파티에 참석하라고 불러내서는 나이 세 배가 넘는 늙다리들이랑 재혼하라고 강권하고 있었어. 이미 부인도 있는 노인들까지 추근대는 게 어지나 추잡하던지.”
“.…그래서 어떻게 됐지?”
“침착하게 거절하다가…… 주변 귀부인들이 범죄자 과부 주제에 자기 처지도 모르고 분수에 안 맞는 자리를 거절한다며 타박하니까 입술을 깨물고 나가 버렸어.”
거기까지 들으니 그녀가 아까 숲속에서 울고 있던 여자임이 틀림없어 보였다.
“돌아왔을 땐 눈 주변이 빨갛더라.
그런데도 끝까지 자리를 지키다 돌아갔어. 정말 좋은 여자 같은데 왜 그런 쓰레기 같은 녀석과 결혼했을까. 안타까워.”
중얼거리는 블레인에게 리안은 그녀의 이름을 넌지시 물었다.
엘레노어 마리체 남작 부인.
그 어린 소녀의 이름은 그렇게 리안의 뇌리에 새겨졌다.
*
수도로 돌아온 후에도 엘레노어에 대한 기억은 잊히기는커녕 점점 또렷해졌다.
몇 번이고 그녀를 만나러 갈까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영지도 수도에서 먼 데다 남편을 잃은 지 얼마 안 되는 여인에게 설불리 접근하는 게 폐가 될 것 같았다.
마음만 가지고 망설이는 있는 사이 시간은 착실하게 흘렀다.
엘레노어는 점점 유명해졌다.
그녀는 수도에 정착했으나 더욱 다가가기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그날 밤의 소녀는 어느새 사교계를 주름잡는 농염한 여인으로 변모했다.
자신은 무뚝뚝하고, 울고 있는 여인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할 만큼 여자에 익숙하지 않았다.
둘 사이의 간극이 너무 커서 아무 명분도 없이 태연하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수밖에 없나.
리안은 반쯤 체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거기 있었던 거다.
그의 서재에.
그가 가장 좋아하는 책을 들고서 말이다.
‘이젠 놓치지 않아..’
스스로 품 안으로 걸어 들어온 이상 이젠 단념하려 해도 그럴 수 없다.
이미 그녀를 안는 극상의 쾌감을 경험해 버렸으니까.
그의 몸은 여전히 간밤의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살아 있는 엘레노어는 상상 속에서 보다 훨씬 사랑스러웠다.
그리고 끔찍할 정도로 그를 흥분시켰다.
그 깜찍한 얼굴 뒤에 남자를 묶고 마구 몸을 더듬는 대담함이 숨겨져 있었다니.
그런 음란한 모습이 싫긴커녕 미칠 정도로 좋았다.
손끝으로 매만지기만 해도 가 버릴 것 같았다.
닿아 있는 데도 더 닿고 싶은 갈망이 들었다.
게다가 그녀는 그렇게 요염하면서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처음이었다.
엘레노어를 안은 다른 남자를 질투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뻤다.
안고 있는 것으로 부족해 그녀의 안으로 들어가 하나가 되고 싶은 욕구가 끝없이 치솟았다.
리안은 엘레노어 역시 자신을 비슷하게 느껴 주길 바랐다.
‘그만큼 살을 비볐으니 마음이 좀 생겼을까?’
그녀에게 자신을 새기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더 소중하게 대하고 싶었는데.
처음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가지속되기 바란 것보다 조금 빨리 끝나 버렸다.
그 아쉬움 때문에 몇 번이고 그녀를 괴롭혀 버렸다.
마지막에 그녀는 무척 힘들어 보였는데, 멈출 수 없었다.
어쩌면 너무 심하게 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간밤을 떠올리고 있으려니 미숙했던 자신에 대한 후회와 함께 조급함이 올라왔다.
‘엘레노어를 다시 만나야 해.’
혹시 그녀가 실망해 버렸는지도 모른다.
미리 열심히 공부(?)해 두었다면 좋았을 것을.
‘한 번 더 하면 더 잘할 수 있는데.’
다시 만나 엘레노어를 어떻게든 설득해서 잡아 놓을 것이다.
그리고 뭐라고 하든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간밤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부위에서 다시 소식이 오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이런 음심이 숨겨져 있다는 건 처음 알았다.
당황스러워하고 있는데 문밖에 인기척이 있었다.
“백작님. 재단사가 도착했습니다.”
집사는 이상할 정도로 겁을 집어먹은 말투였다.
재단사는 공작이 리안에게 탄생제때 입을 예복을 맞추라고 억지로 부른 것이다.
외모에 관심이 없는 그는 평소 그런 간섭이 몹시 성가셨다.
하지만 오늘은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의 오지랖 덕에 엘레노어를 안았다고 생각하면 참을 만했다.
게다가 좋은 예복을 맞춰 잘 차린 모습으로 엘레노어에게 좋은 인상을 주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나가지.”
리안은 속으로 제국의 기사도 헌장을 몇 번 읊은 후 흥분이 가라앉자 침대 밖으로 나왔다.
가운 한 장 차림으로 복도로 나가자 문 앞에 있던 메이드의 얼굴에 홍조가 떠올랐다.
그런데 정작 눈이 마주치자 겁먹은 듯 움츠러든다.
집사에 이어 이상한 태도다.
어제 방문 앞을 얼씬거리면 베어버리겠다고 협박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좋은 아침이군.”
리안이 입을 열자 메이드가 놀란듯 눈을 깜빡였다.
아마 그가 이렇듯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넨 적이 없었기 때문이리라.
리안은 완전히 빨개져 폭발할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내버려 둔 채 재단실로 향했다.
*
“표정이 밝다?”
블레인이 기사단 휴게실에 앉아 있는 리안에게 말했다.
예쁜 얼굴에 걸맞지 않게 늘 찬바람을 쌩쌩 풍기고 있는 리안의 표정이 오늘따라 좀 부드러워 보였다.
“무슨 일 있어? 네가 입꼬리를 올리고 있으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피하잖아.”
“무서운가.”
리안이 진지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사실 무서워하는 사람보다 저 밖에 널 보며 얼굴 붉히는 남자가 더 마음에 걸리는데.”
리안은 블레인의 말을 농담이로 받아들인 듯 어깨를 으쓱했다.
얼굴 붉히며 쳐다보는 남자가 있다.
는 건 정말이었지만, 모르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아 내버려 두기로 했다.
“블레인.”
맞은편에 앉자 리안이 말을 걸었다.
“최근에도 파티에 자주 참석하나?”
“뭐, 평소대로지.”
블레인 켄터베리는 리안의 친우이자 제2 기사단 단장.
검밖에 모르는 리안과 달리 그는 사교적이어서 어지간한 파티에 전부 얼굴을 내밀었다.
“파티에 대해 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블레인은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파티에 관해 묻고 싶은 게 있다고 했어.”
리안이 딱딱하게 방금 한 말을 반복했다.
“네가 파티 얘기를 하다니. 오늘 밤에 달이 두 개 뜬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거야.”
리안은 실없는 블레인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의 질문을 들은 블레인의 얼굴이 괴물을 본 것처럼 황당해 보였다.
“엥? 그런 건 왜 묻는데?”
“좀 필요해서. 꼭 알아봐 주면 고맙겠어.”
이유가 무척 궁금했지만, 리안은 묵묵부답이었다.
“뭐, 좋아. 알아내서 연락할게.”
블레인이 수락하자 리안은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궁전 복도를 지나다 체펠린과 마주쳤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그에게 리안이 말했다.
“고맙네.”
체펠린은 난데없는 감사에 무척 설명이 필요한 표정이었으나 리안은 그냥 지나쳐 걸었다.
“뭐가 고맙다는 거야?”
이번에도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블레인은 그가 웃고 있다는 걸 알고 경악했다.
매일 보는 얼굴인데도 눈이 부신 미소였지만, 무척 당황스러웠다.
누가 리안에게 이상한 마법이라도건 걸까.
평소에 안 하던 짓을 너무 많이 한다.
블레인은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리안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