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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6화 (6/120)

제6화

하스카토르 제국의 수도 팰리시티.

세계 최고 강대국의 위용을 뽐내듯 거대한 규모만큼이나 훌륭한 경관으로 유명하다.

잘 설계된 도시는 구획이 정갈하고, 1,000년간 적들의 침공을 받지 않는 철옹성답게 역사적 유물이 잘보존되어 있었다.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와 팰리시티의 명소를 보고 찬사를 자아낸다.

제국이 생기기 전부터 존재했다는 팰리시티 대학, 세계의 유행을 선도 하는 장인의 거리 팜블리코 에비뉴, 천 년의 성지 몬테리네 대성당.

그 유수의 관광지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은 역시 황제가 기거하는 황거였다.

3만 명의 인부가 10년에 걸쳐 건축한 하스카토르 팰리스.

17만 제곱미터가 넘는 대정원 중앙의 새하얀 궁전은 제국의 영화 그 자체였다.

그 장엄한 경관을 영유하는 것은 황족 및 고위 귀족의 특권.

출입은 물론이고 황거가 내려다보이는 주변 주택지는 어지간한 신분과 재산으로는 넘볼 수조차 없다.

비앙카스타 바이스는 궁정 부근 저택에 기거하는 행운아 중 하나였다.

그러나 저택의 자랑인 그 경관을 볼 수 있는 창문은 커튼으로 꼼꼼히 가려져 있었다.

“아가씨.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비앙카스타는 무거운 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현관에 준비된 마차를 타고 그녀는 황궁으로 향하는 광장을 가로질렀다.

‘벌써 모레인가.’

팰리시티는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인파로 북적대고 있었다.

사흘 후에 있을 축제 때문이다.

황녀의 생일을 맞아 수도에는 일주일 동안 탄생제가 개최된다.

황거의 두 번째 문이 개방되고 빵과 술, 고기가 하사되며 밤마다 각지에서 무도회와 연회가 열리는 것이다.

수도는 이미 탄생제 준비로 한창이었다.

비앙카스타 역시 그 연회의 준비를 위해 황궁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비앙키!”

궁전의 금빛 문을 지나치자마자 해맑은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

비앙카스타는 얼굴에 미소를 쥐어 상만 선택하면 돼. 보면 너무 예뻐서 깜짝 놀랄 거야.”

“네. 벌써 기대가 되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기대는 커녕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뿐이었다.

아일린을 따라 의상실로 들어가자 이미 도착한 열 명 남짓의 여자들이 의상을 재단하고 있었다.

모두 아는 얼굴이었으나 그녀들은 들어선 비앙카스타에게 알은척은커녕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돌렸다.

비앙카스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생일인데 친구들에게 훨씬 화려하고 아름다운 고급 드레스를 선물한다는 건 정말 후한 행동처럼 보인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면 허울만 좋을 뿐이다.

황녀가 선물한 옷이니 연회에 입고 갈 옷이 강제된 것이나 다름없다.

아무리 화려한들 한 파티에서 여기 있는 모두가 다 똑같은 디자인에 색 깔만 다른 드레스를 입고 있으면 디자인이 어떻건 무슨 결혼식의 들러리나 라인 무용수처럼 보일 것이다.

또래 여자애들이 전부 그런 모습이라면 혼자서 모든 주목을 가져갈 것이 뻔하다.

하지만 비앙카스타는 그런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황녀님께 딱 맞는 디자인이네요.

눈에 잘 띄겠어요.”

칭찬하긴 했지만, 말투가 조금 삐뚜름했다.

주변에서도 그걸 느낀 듯 비앙카스타에게 눈을 흘겼다.

오직 아일린만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해맑게 웃었다.

“그러면 좋겠다. 정말 예쁘게 보이고 싶어. 이번 파티에는…… 그러니까.”

아일린이 수줍어서 말을 맺지 못하자 옆에 있던 마이스터 백작가의 헬렌이 대신 문장을 채워 넣었다.

“리안 백작님도 오시니까요.”

그 말을 듣자 다들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꺄아!‘라고 고성을 내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오셔도 말이나 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무척 걱정 섞인 표정을 짓는 아일린에게 비앙카스타가 툭 말을 던졌다.

“걱정할 거 없어요. 말 굳이 안 걸어도 어차피 리안 백작님은 황녀님 이랑 결혼할 텐데요, 뭐.”

순간 물을 끼얹은 듯 방 안의 분위기가 쏴해졌다.

또 나쁜 버릇이 나오고 말았다.

아무리 고치려 해도 그녀는 사실을그건 제국의 젊은 처녀라면 누구나 꿈꾸는 일이니까.

그러나 황녀의 입에서 그 말을 들은 이상, 최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더는 그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아무리 다정하게 대해도 황녀는 황녀.

장차 부마가 될지도 모르는 상대를 짝사랑한다고 밝힐 수 있는 간 큰 귀족 영애는 없다.

그 수줍은 고백 한마디로 아일린은 리안과 결혼할 가능성이 있는 경쟁상대는 전부 제거해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리안의 신분상 거기 모인 고위 귀족 영애들 외에는 결혼 상대로 거론조차 될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당시 열네 살이던 비앙카스타는 그런 생각을 가장 친한 영애에게 몰래 얘기했다.

둘만의 비밀이었으나 사방에 소문이 나고 말았다.

그 영애는 아일린과 서로 모든 비밀을 털어놓는 소녀 그룹에 소속되어 있다며 어쩔 수 없다고 했다.

모두 비앙카스타가 리안을 짝사랑한 나머지 질투 때문에 황녀를 매도 한다고 손가락질했다.

원래 겉돌던 비앙카스타는 비호감이 되었고, 얼마가 지나자 ‘악녀’가 되었다.

‘차라리 그대로 배척당했다면 좋았을 텐데.’

황녀의 눈 밖에 나서 출입을 거절당했다면 외로울지언정 지금처럼 비참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비앙카스타의 집에는 계속해서 싫은 모임의 초대장이 날아들었다.

아일린이 그녀를 끝없이 감쌌기 때문이다.

황녀님은 왜 저런 못된 애를 계속 옆에 두는 거야. 이해가 안 가.’

모두 그렇게 말했지만, 아일린은 비앙카스타가 가장 소중한 친구라고 말했다.

‘비앙카스타가 실수했어도 나쁜 뜻은 아닐 거야.’

‘나는 괜찮으니 신경 쓰지 마라.’

아일린이 그렇게 말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녀를 칭송했다.

예쁘고 아름다운 아일린.

다정하고 상냥하고 황녀답지 않게 소탈한 아일린.

그러나 비앙카스타는 그녀가 무서웠다.

황녀는 분명히 태생부터 사랑스럽다.

천진한 태도와 애교는 계산된 행동은 아니다.

화를 내는 법도 없고 하는 말마다 옳으며 상냥하다.

그런데 어째서 모든 일이 그렇게 순조로울까?

왜 항상 그녀와 대적한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습을 감추게 되는 걸까.

처음 황녀의 초대를 몇 번 거절하자 비앙카스타의 주변에는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아끼던 드레스가 사라져 시궁창 속에서 발견되었다.

잠깐 들른 만찬회에서 없어졌다고 난리가 난 목걸이는 비앙카스타의 보석함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집 앞 나무에 이웃이 기르던 개의 사체가 매달려 있었다.

가장 큰 불행은 비앙카스타가 그 모든 일의 범인으로 지목되었다는 것이다.

억울함을 호소하며 집 안에 틀어박혀 눈물로 보내던 어느 날.

그녀는 문득 그 사실을 깨달았다.

아일린 주변에 머물다 자신처럼 불행해진 사람이 많다는 것을.

사교계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는 건 약과고, 부모가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행방불명되거나 투옥되거나 처형되기도 했다.

그들 중에는 최고위 귀족이나 황족도 있었다. 남녀노소도 가리지 않았다.

물론 아일린은 표면적으로 어느 것에도 관련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에게 해를 끼친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얼마 버티지 못했다.

[힘든 일이 많다고 들었어. 부디 만나서 내가 널 위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

그때까지도 황녀는 비앙카스타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비앙카스타는 결국 제 발로 다시 황궁에 나왔다.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한다면 너를 지켜 줄게.”

황녀는 다정하게 말했고 비앙카스타는 응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약속은 거부할 수 없는 서약이 되었고, 결국 족쇄가 되어 버렸다.

비앙카스타는 저지르지 않은 일에 대한 악명을 묵묵히 감내하며 황녀의 곁을 지켰다.

아일린 하스카토르는 무서운 여자다.

원하는 건 어떤 방식으로든 손에 넣는다.

아일린의 행동을 볼 때 이번 탄생제의 목표는 ‘리안 칼라브리아 백작’임이 틀림없었다.

그녀는 모두가 가지고 싶어 하는 건 자신의 손에 넣어야만 직성이 풀리니까.

누구든 탄생제에서 리안에게 관심을 보이면 얼마 안 있어 슬그머니 사라져 버리고 말 것이다.

절대로,

나라면 감히 그녀가 원하는 것을 탐내지 않을 것이다.

비앙카스타는 마음을 다잡은 뒤 화장실을 나섰다.

*

이른 새벽.

잠에서 깨어난 리안은 정신이 들자마자 침대 곁을 확인했다.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해서 방 안을 둘러보았으나 엘레노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허전한 기분으로 리안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가 버린 건가.

어쩐지 확인하기 전부터 그럴 거라 예감했다.

엘레노어는 왔을 때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렸다.

현실감이 없었지만, 간밤은 꿈이 아니었을 것이다.

몸이 노곤하고 온몸에 뿌듯한 만족감이 감돌았다.

그녀를 꿈에서 수도 없이 안았지만, 이런 감각은 느낀 적이 없었다.

‘결코,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일이 풀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리안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엘레노어를 처음 본 밤을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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