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한동안 잘 벼려진 예술 작품 같은 자태를 감상한 뒤 엘레노어는 용기를 내서 손을 뻗었다.
일단 일을 벌여 놓은 이상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순 없다.
셔츠 깃을 건드리자 리안이 놀란듯 몸을 움찔했다.
그 초식동물 같은 미약한 반응이 재미있어서 긴장이 조금 풀렸다.
손과 눈을 묶었으니 지금 주도권은 철저히 이쪽에 있는 것이다.
‘우선….’
엘레노어는 우선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 내렸다.
조금씩 리안의 육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흠잡을 곳 없는 명인의 조각상 같은 몸이었다.
반듯한 쇄골 아래로 이어진 잘 단련된 가슴.
탄탄한 복근은 선명하게 갈라져 있었으며 마치 최상급 대리석처럼 섬세한 몸의 피부에는 점은커녕 잡티조차도 없었다.
남자의 몸을 만지고 싶단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동했다.
떨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숨까지 죽이며 엘레노어는 조심스레 그의 몸을 손끝으로 꼭 찔렀다.
그녀의 손가락이 가슴에 닿자 리안이 놀란 듯 숨을 들이쉬었다.
복근이 수축하는 모양이 재미있었다.
조금 그 부근을 배회하다 엘레노어는 용기를 내서 가슴의 민감해 보이는 부근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다른 곳보다 훨씬 직관적인 반응이 나왔다.
리안이 붉은 입술을 깨물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남자도 여기로 느끼는구나.
신기하면서도 너무 야해서 기분이 고조되었다.
“기분 좋은가요?”
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흰 피부가 섬세한 턱 아래의 목 부근까지 살짝 붉은 기가 번졌다.
쑥스러워하는 모양이었다.
엘레노어는 쿡쿡 웃으며 이번엔 손바닥 전체를 사용해 그의 몸을 쓸었다.
시간이 갈수록 엘레노어는 대담해졌다.
그녀는 리안의 몸을 만지는 게 무척 기분 좋다는 걸 깨달았다.
탄력 있는 피부의 촉감도 보여 주는 반응도 나쁜 짓을 한다는 배덕감도 마음에 들었다.
지금 그녀는 마치 놀이에 능숙한 여자처럼 제국의 모든 여자가 선망하는 대상을 내키는 대로 희롱하고 있었다.
그것도 본인의 동의하에 말이다.
여태까지 해 본 모든 나쁜 짓 중에 가장 짜릿하고 자극적이었다.
엘레노어는 그의 옷을 벌려 피부를 매만지고 그리듯 손끝으로 뼈의 형태를 따라갔다.
모든 골격이 표본처럼 좋은 위치에 자리한 예쁜 몸이었다.
가끔 예민한 곳을 스쳐 그가 숨을 내뱉거나 근육을 수축시킬 때마다 엘레노어의 몸속에서도 묘한 감각이 일었다.
몸 안이 기묘하게 죄어들고 심장박동이 빨라지며 하체에 위화감이 느껴진다.
생경했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당신을 풀어줄 수는 없으니까요.”
“풀어주지 않아도 괜찮으니 이쪽으로 가까이 와요.”
이목구비 중 가장 아름다운 눈을 가렸는데도 리안의 아름다움은 여전히 파괴적이었다.
머릿속에서 안 된다는 경고음이 울렸지만, 엘레노어는 여기서 발을 빼고 싶지 않았다.
더 큰 자극은 아마도 더 큰 즐거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녀는 쭈뼛쭈뼛 그에게 다가갔다.
무릎이 포개질 정도로 가까워졌지만,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이번엔 리안이 먼저 움직였다.
그가 고개를 기울여 엘레노어의 어깨에 기댔다.
스카프를 풀어 훤히 드러난 목덜미에 그의 얼굴이 닿았다.
거리감을 확인한 그는 그대로 잠시 기대 있었다.
엘레노어가 따뜻한 체온이 기분 좋다고 느꼈을 때였다.
“앗.”
엘레노어의 입에서 낮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녀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기 때문이다.
“지금 무슨……….”
엘레노어는 항의를 이어가지 못했다.
부드럽게 입술을 댔다가 땐 리안이 이번엔 거기를 가볍게 빨아올렸다.
감전된 것 같은 짜릿함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다.
이게 뭐야.
이건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훨씬 야한 짓이다.
당장에라도 몸을 뒤로 빼야만 했지만…….
“나를 안아요.”
리안이 귓가에 속삭이자 최면이라도 걸린 듯 물러날 수 없었다.
엘레노어는 떨리는 팔을 들어 리안의 목을 감았다.
두 사람의 몸이 겹쳐지고 드러난 엘레노어의 어깨와 목덜미, 앙가슴과 뺨까지 리안의 키스가 쏟아졌다.
행위가 이어질수록 둘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어느덧 그녀는 리안의 무릎에 앉아 있었다.
밀착한 복부에서 그가 명백히 흥분했다는 증거를 느낄 수 있었다.
역시 고자는 아니구나.
문득 그가 얼마나 절륜한지에 대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소설 속 상대가 내지르던 교성과부끄러운 대사들이 떠오르기 전에 멈춰야만 했다.
“이… 이 정도면.”
그녀는 야릇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말했다.
“입증됐어요?”
그냥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이지만, 완전히 엉터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와 닿고 비벼진 부위에 이미 뜨거운 열기가 새겨져 있었다.
그 열기가 뭔진 모르겠지만, 그와 더욱 닿고 싶어지게 만드는 힘이 있라움으로 굳었다.
갑자기 리안의 오른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기 때문이다.
뒤로 묶여 있던 그의 손은 어느새 속박에서 풀려나 있었다.
그는 긴 손가락을 뻗어 유유히 눈을 가린 안대를 머리 위로 올렸다.
“그럼 지금까지 배운 걸 이용해 봐야겠군.”
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선정적인 미소를 지었다.
당황한 엘레노어는 몸을 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의 팔을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리안은 유유히 엘레노어를 뒤로 밀어 눕혔다.
“무서운 겁니까?”
리안은 엘레노어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뺨을 쓸었다.
상황이 역전됐다. 주인과 노리개의 위치가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품 안에 갇힌 상태에서도 그녀는 지고 싶지 않았다.
“그럴 리가요.”
말을 마친 엘레노어는 눈을 크게 떴다.
리안이 입술을 겹쳐 왔기 때문이다.
이미 그가 단단히 허리를 감고 있었기에 그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느낀 모든 것을 합친 만큼 거대한 쾌감의 파도가 그녀를 휩쓸었다.
처음 하는 키스는 상상과 전혀 달랐다.
뭉클하고, 간지럽고, 뜨겁고, 부드럽고, 달콤하며 미칠 정도로 야했다.
심장이 온몸을 지배한 것처럼 전신이 박동했다.
거칠게 휘감고 파고드는 리안을 밀어내지 못한 채 엘레노어는 숨만 몰아쉬었다.
한참 그렇게 엘레노어의 입술을 머금은 후 떨어져 아까부터 잔뜩 음미했던 엘레노어의 목덜미에 머리를 기댔다.
“하….”
리안의 숨결이 따뜻하게 그녀의 가슴을 간질였다.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단단히 조여진 코르셋이 지금만큼 갑갑한 적이 없었다.
얼굴을 뗀 리안은 엘레노어의 눈에 떠오른 갈망을 확인했다.
붉은 입꼬리가 비틀려 올라가고, 리안이 그녀의 등 쪽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가 드레스를 조인 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는 명백했다.
둘은 이미 어디라도 갈 데 없는 흥분에 온통 휩싸여 있었다.
엘레노어의 머릿속에는 이 애타는 갈망을 어떻게든 풀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런 데서……….”
하지만 서재에서 이 이상 하는 건 안 된다.
엘레노어는 말을 맺지 못했지만, 리안은 대강 짐작한 듯했다.
“저 문 건너.”
고개를 살짝 들며 그가 말했다.
“내 방입니다.”
절대 거기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이 선은 넘어가서는 안 되는 선이라고 머릿속에서 경고가 울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불안보다 눈앞에 있는 리안의 아름다움과 쾌감이 훨씬 더 생생하게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엘레노어는 거부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숙였다.
그게 허락처럼 보인 건지 리안이 몸을 일으켜 엘레노어를 안아 들었다.
두 사람은 우아한 조각이 새겨진 묵직한 목제 문을 지나 리안의 방으로 들어섰다.
리안은 엘레노어를 방 중앙의 거대한 침대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
‘내가 리안 백작의 침대에 누울 날이 오다니.’
감격스러운 건지 도망치고 싶은 건지 모호한 기분이 들었다.
엘레노어의 눈앞에서 리안이 반쯤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내일 아침까지.”
꽉 악문 잇새로 나직하지만 잘 울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방 앞을 얼씬거리는 자는 모두 베어 버리겠다.”
강렬한 협박에 방 밖에서 혼비백산해서 꽁무니 빼는 소리가 들렸다.
엘레노어조차도 제국 최고의 기사가 뿜어내는 살기에 깜짝 놀라 움츠러들었다.
그러나 그의 맹수처럼 변했던 표정은 엘레노어를 향하자 다시 부드러워졌다.
리안은 자리를 찾아가 그녀의 입술로 파고들었다.
정신없이 입술을 겹치며 엘레노어의 코르셋 끈을 쥐었다.
비단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가 부드럽게 방 안을 울렸다.
사르르.
구름 같은 옷자락은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이불 아래에서 정말로 두 사람의 살이 맞닿았다.
보라색 눈동자가 기대를 감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다 정말 마음이 생겨나면 어쩌지.’
불안해하는 엘레노어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엘레노어.”
내가 내 이름을 말했던가?
의문은 떠오른 즉시 하얗게 사라져갔다. 리안이 그녀의 입술을 다시 머금었기 때문이다.
이미 두 사람은 틈 없이 맞물려있었다.
아까부터 잔뜩 고조되어 있던 리안의 몸이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남은 건 결합뿐이었다.
이제 그를 받아들이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는 단단한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그리고 자신을 열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