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이미 들켰는데 잡아떼는 건 구차하다.
엘레노어는 에둘러 인정했다.
“제가 너무 어설펐나요?”
애교 있게 말했지만, 사실 등에는 진땀이 흐르고 있었다.
이득을 보려면 최소한 조용히 제발로 걸어 나가야 했다.
공작가에 무단 침입했다가 쫓겨났다는 소문이 퍼지면 평판이 크게 훼손될 것이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행히 리안은 그녀를 바로 끌어내진 않았다.
“화많이 나셨어요?”
“안 났습니다.”
왜 화를 안 내는 걸까.
그것도 의문이지만 더 의문스러운건 지금의 자세다.
그의 자수정 같은 눈동자는 여전히 지척에 있었다.
똑바로 바라보기 부담스러워 계속 눈동자를 돌리느라 평정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저기….”
엘레노어는 조심스레 제안했다.
“대화하기에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면 어떨까요?”
순간 리안은 인상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실수한 건가 긴장했으나 이윽고 그는 다시 무표정으로 돌아간 채 순순히 몸을 뒤로 물렸다.
“말해 보십시오.”
그는 처음 앉았던 대로 나른히 등받이에 기대며 물었다.
“내게 무슨 말을 할 예정이었습니까?”
소설에서 그는 지금 시점에 아직 황녀의 마음을 모른다.
여기서 섣부르게 황녀에게 청혼하라고 했다가 공연히 경계하게 만들면 일을 그르칠 것이다.
그는 방심하고 있다가 여주의 계략에 걸려 본의 아니게 같은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짐작하실 텐데요.”
그래서 엘레노어는 그냥 얼버무리기로 했다.
리안이 잘생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결혼인가.”
지긋지긋한 반응을 보니 그간 공작이 꽤 잔소리를 늘어놓은 모양이었다.
“나는 마음이 가지 않는 여인과 결혼할 마음이 없습니다.”
무척 단호한 목소리였다.
너무 생각이 완고해져도 곤란하므로 엘레노어는 넌지시 말을 던졌다.
“한 집에서 살을 비비고 살다 보면 마음이 가게 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 말에 리안이 반듯한 눈썹을 한쪽만 슥 올렸다.
“이 저택에는 많은 여인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들 중 누구에게도 청혼하고 싶지 않습니다.”
물론 이런 규모라면 고용인이 최소 50명은 있을 것이다.
바로 논박당한 엘레노어가 말꼬리를 잡았다.
“……살을 안 비비셨잖아요.”
엘레노어는 말해 놓고 좀 구차하다.
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리안의 눈동자에 흥미가 떠올랐다.
“그러면 마음이 열리는 겁니까?”
“네?”
“서로 살을 비비면 마음이 가게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럴 남자가 아닌 거 같은데 묘하게 같이 말꼬리를 잡는다.
자기가 말해 놓고 1분도 되지 않아 부정하기는 좀 그랬다.
“네. 그렇죠.”
정말 아무 말 대잔치로군.
“나는 군인입니다. 실전에 적용되지 않는 이론은 신봉하지 않습니다.”
말이 안 된다는 건 알았지만, 막상 리안이 삐딱하게 반응하자 오기가 생겼다.
“그럼 한번 실전에 적용해 보시죠.
살을 비비면 애정이 생기는지 안 생기는지.”
별 뜻 없는 말이었다. 어차피 황녀랑 결혼하면 그렇게 될 거니까.
엘레노어는 리안이 다시 부정할 거라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그런데 리안은 뜻밖에 선뜻 말했다.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요.”
경험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니.
정말 여자와 살을 비벼 애정이 생기는 실험을 하겠다는 건가.
그가 얼마나 금욕적이고 무심한지 알았기에 경악했지만, 엘레노어는 간신히 표정을 관리했다.
어차피 그냥 해 보는 말일 테지.
“안타깝군요. 적당한 상대가 있었다면 바로 제 말이 옳다는 걸 아셨을 텐데.”
“상대라면 있지 않습니까.”
상대가 있다니?
매춘부를 부르겠다는 건 아니겠지?
멍해졌던 엘레노어는 곧 상황이 뭔가 묘하다는 걸 파악했다.
이 방 안에는 그와 자신, 둘뿐.
게다가 리안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엘레노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설마… 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론은 제안한 이에 의해 증명될 때가 가장 흥미로운 법입니다.”
리안의 도발적인 눈빛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항상 화려한 연애담을 풀어놓았으므로 다들 모르는 사실이지만, 엘레노어는 15세에 남편을 잃게 된 후 어떤 남자도 가까이 한 적 없었다.
그 전의 생도 일에 몰두한 나머지 이론만 빠삭할 뿐 실전 경험치는 약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 하는 게 낫겠죠.”
엘레노어는 발 빼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애쓰며 말했다.
“그러다 백작님이 저한테…… 반하면 곤란… 하니까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리안이 쿡쿡 웃었다.
무안해진 엘레노어가 발끈했다.
“그럴 일이 없다는 건가요?”
“글쎄요. 저는 그런 방면에 문외한이라 알 수 없습니다.”
“확인할 길도 없고.”
마지막 말이 무척이나 의미심장했다.
이쪽을 보는 그의 표정이 오만하게 보였다.
‘네가 감히 나를?’ 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숙맥인 데다 철벽이라 들었으니 조금 접근하면 당황해서 엉덩이를 빼겠지.’
자고로 허세 싸움은 먼저 발을 빼는 쪽이 지게 되는 법이다.
엘레노어는 지고 싶지 않았다.
“확인시켜 드려도 전 상관없습니다. 백작님만 괜찮다면 말이죠.”
리안의 얼굴에서 웃음이 가셨다.
“좋습니다.”
뭐라고?
뭔가 이상하게 휘말렸다.
그는 분명히 여자에게 눈길조차 준 적 없는 차가운 남자일 텐데.
왜 이렇게 가벼운 말을 던지는 걸까.
자의식 과잉인지 모르겠지만, 처음부터 이상하게 리안으로부터 성적 긴장감이 느껴졌다.
몇 번이나 부딪친 시선이 길게 이어졌다.
계속 보고 있으려니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묘한 충동이 솟는다.
아까부터 느꼈지만, 너무 아름다운 남자다.
잠시만이라도 가까이하고 싶은 욕망이 들 정도로 말이다.
어차피 여긴 아무도 없다.
아무도 모르게 그처럼 완벽한 이상의 남자와 조금 살을 비빈다고 한들 문제가 될 게 있을까?
마음이 계속 빠른 속도로 기울었다.
멈출 수 없음을 깨달은 엘레노어는 순응하는 대신 안전장치를 마련하기로 했다.
스륵.
엘레노어가 목에 감고 있던 스카프를 풀었다.
가늘고 긴 목선이 드러나자 리안의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두 손을 뒤로 모아 주세요.”
리안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너무 능란해서 백작님이 절 제를 잃어버리면 곤란하니까 묶겠습니다.”
엘레노어는 리안이 순순히 손을 등뒤로 가져가는 걸 보고 놀랐다.
그에게로 다가가 손목을 단단히 묶었다.
리안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혹시 다른 곳에서도 자주 이렇게 합니까?”
이런 수지 안 맞는 짓을 할 리가.
상대가 리안이 아니라면 30cm 안으로만 접근해도 불쾌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아뇨. 이렇게 까다롭고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 의심 많은 상대는 흔치 않으니까요.”
까다롭고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 의심 많은 상대’로 치부당했지만, 리안은 재미있다는 듯 쿡쿡 웃었다.
손목을 묶은 그녀는 리안의 정면에 앉았다.
그녀가 몸을 기울이자 리안이 입술을 조금 깨물었다.
엘레노어는 그의 빨개진 귀를 보고 그 역시 긴장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소년 같아서 머리 하나 큰 남자가 묘하게 귀여워 보였다.
조금 여유를 찾은 엘레노어는 천천히 그의 넓은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쓸 듯이 움직여 단정하게 매여 있는 크라바트(프랑스식 타이)를 쥐었다.
천천히 그것을 풀어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비단이 목을 스치자 리안이 고개를 들며 침을 꿀꺽 넘겼다.
흰 목울대가 움직이는 모양이 무척 선정적이었다.
“보는 것도 안 되는 겁니까?”
크라바트로 두 눈을 감싸자 리안이 물었다.
그가 입을 열자 크라바트를 묶느라 그의 얼굴 바로 앞에 있는 가슴에 숨결이 닿았다.
몹시 야릇해서 하마터면 몸을 가볍게 떨 뻔했다.
“내 규칙이에요.”
사실 가린 이유는 그의 눈을 보면 너무 긴장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일을 마친 엘레노어는 원래 앉아 있던 위치로 돌아와 자신이 만든 상황을 잠시 감상했다.
일단 저지르긴 했는데.
어떻게 하지.
엘레노어는 난감한 시선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제국 최고의 미남이 두 눈이 가려지고 두 손을 결박당한 채 눈앞에 앉아 있었다.
크라바트가 풀려 느슨해진 셔츠 사이로 단단한 목선이 보인다.
이제 뭘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