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반드시 우연을 가장하셔야 합니다.”
자신을 체펠린이라 소개한 중년 남자가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반복했다.
엘레노어는 짜증 내지 않고 참을성있게 미소 지었다.
“우려하시는 마음 이해합니다, 백작님.”
“저희가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걸 들키면 큰일입니다. 여기서 경계심까지 강화되면 일이 더 어려워질 테니 무척 염려됩니다.”
“최악의 상황에도 정체는 들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도 체펠린은 도무지 안심하지 못했다.
소설 초반에 비친 리안의 성품을 고려하면 무리도 아니었다.
“전문가이신 부인께 참견할 생각은 없지만, 어떻게 할 예정인지 물어도 됩니까?”
“저는 여기서 책을 읽고 있겠어요.”
두 사람은 현재 칼라브리아 공작저택 3층에 있는 리안 백작의 개인 서재에 있었다.
체펠린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왜 여기에 있냐고 물으실 텐데요?”
“볼일이 있어 저택에 방문했다가 길을 잃었다고 답할 겁니다.”
엘레노어의 느긋한 말에 체펠린은 당황한 듯했다.
“그러면 아마 내보내실 겁니다. 칼라브리아 백작께서 워낙 냉정하신 분이라서요.”
“일단은 어떻게 흘러갈지 믿고 기다려 주심이 어떨는지요?”
걱정하는 마음은 이해했지만, 엘레노어는 반복되는 문답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인께서는 그분에 대해 잘 모르십니다. 그분은 부인의 아름다운 외모에 혹해 대화를 섞길 바라는 청년들과 무척 다를 겁니다. 어쩌면 제대로 말 한마디 못 해 보고 매몰차게 쫓겨나실지도 모릅니다.”
“한마디도 섞지 않으면 정체는 들키지 않겠네요.”
엘레노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여유는 철저한 계획덕이 아니라 어차피 내버려 둬도 이 일이 잘 풀릴 거란 걸 알고 있다는 데서 나오는 것이었다.
게다가 체펠린은 틀렸다.
엘레노어는 리안 칼라브리아를 잘 알고 있었다.
성격과 호불호, 그리고 미래까지도.
“생각 외로 대화가 이어질 수도 있어요.”
“부인의 화술에 대해 의심할 여지는 없지만, 처음 만나는 사이에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시겠습니까?”
“여긴 그분의 개인 서재니 화제는 얼마든지 있죠. 칼라브리아 백작님의 취향의 표본 같은 곳 아닌가요?”
“백작께서는 격무로 바쁘신 데다 검술을 즐기는 활달한 분이시라 책은 딱히…….”
“그래도 좋아하는 책은 있을 거예요. 예를 들면……….”
엘레노어는 책장으로 손을 뻗어 한 권을 뽑아 들었다.
“이 책처럼요.”
표지를 본 체펠린 백작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냥 짐작하신 겁니까?”
서재에는 수천 권의 책이 있었다.
그녀가 뽑아 든 책은 리안의 깔끔한 성품을 내비치 새것처럼 말끔해서 자주 읽는 책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저는 제 의뢰인에 대한 조사는 철저합니다.”
실상은 이런 날로 먹을 수 있는 일에 굳이 조사하는 수고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 책을 좋아한다고 원작에 나와 있을 뿐,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무슨 책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엘레노어의 그 말은 체펠린의 입을 다물게 하는 데는 성공했다.
신뢰를 줬으니 앞으로 일어날 일에 발을 얻기 쉬워졌다.
‘이제 리안 백작이 황녀와 맺어지게 되면 내 덕인 척 연기하면 돼.’
일확천금이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엘레노어는 흐뭇한 기분으로 서재중앙에 있는 붉은 안락의자로 가 앉았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인사를 나누었으나 체펠린은 나가지 않고 잠시 그녀를 주시했다.
‘왜 안 가지?’
잠시 뭔가를 심각하게 생각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부인은 생각보다 훨씬 젊으시군요. 듣던 대로 무척 아름답고.”
고심하는 표정을 짓더니 갑자기 웬칭찬?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엘레노어는 의례적인 감사의 말을 전했다.
체펠린은 뭔가 마음에 걸리는 표정이었으나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서재를 떠났다.
‘음. 그럼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지.’
백작이 언제 돌아올지는 기약이 없었다.
혼자 남은 엘레노어는 적당히 손에 들고 있던 책을 읽는 시늉이라도 하기로 했다.
지루해 보이는 제목에 표지를 넘기는 손이 무거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생각보단 재미있네.’
무거운 주제를 다루는 교양서적이지만, 적당히 유머를 섞어 가며 알기 쉽게 풀어낸 덕에 몰입도가 좋았다. 심오한 문장이 주는 무게감도 꽤 마음에 들었다.
푹 빠져서 읽고 있던 엘레노어는 어느 순간 인기척을 느꼈다.
천천히 고개를 든 그녀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묻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리안 플로이드 칼라브리아가 거기서 있었다.
별로 빚은 듯한 플래티넘 블론드, 자기 같은 흰 피부에 붉은 입술.
선이 가는 섬세한 얼굴은 또렷한 콧날과 잘빠진 턱선, 반듯한 눈썹으로 남자답게 완성되었고, 선명한 보라색 눈동자가 몽환적인 신비감을 부여했다.
수많은 사교계 명사나 모델, 연예인을 만났으나 저런 남자는 처음이었다.
다소 지나치다 싶은 미사여구로 치장된 원작은 과장이 아니었다.
잘생긴 걸 넘어 현실감이 없고 아우라가 풍겨 바라보는 것조차 황송할 지경이었다.
엘레노어가 홀린 것처럼 바라보는 동안 리안은 아무 말도 없었다.
‘왜 저렇게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걸까?’
그는 ‘여기서 뭐 하는 거냐’ 라든가, ‘나가’ 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거기 무표정하게 서서 그녀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조금 정신이 돌아온 엘레노어는 먼저 말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뭐라고 하지..’
묻지도 않았는데 길을 잃었다고 변명하는 건 내보내 달라는 말이나 다름없이 구차하다.
할 말을 더듬던 그녀는 문득 손에 든 책의 무게감을 느꼈다.
좋은 생각이 번득였다.
“공간은 무한하며 영원하다. 사람들은 그곳을 벽으로 갈라 자신의 자리를 만들고 역사를 새긴다.”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엘레노어의 나직한 말에 리안의 눈썹이 살짝 움직였다.
“크리스토퍼 한젠데일 경의 ‘공간의 역사’를 읽어 보셨나요?”
조각처럼 견고하던 단정한 얼굴이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아주 좋아합니다.”
목소리는 꿀이 떨어질 듯 낮고 달콤했다.
책을 향한 말인데도 마치 고백을 받은 것처럼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엘레노어는 콩닥대는 마음을 감추려 애쓰며 또렷한 목소리로 제안했다.
“같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잠시 얘기를 나눠 보지 않겠어요?”
얼굴에 내비치진 않았지만, 그가 반응을 보이기까지 짧은 시간 동안 그녀는 무척 긴장했다.
엘레노어는 초조한 기분으로 이쪽으로 다가오는 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긴 다리를 뻗으며 엘레노어가 앉아 있는 안락의자에 같이 앉았다.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겁니까?”
건조한 질문에 엘레노어는 자신이 바로 쫓겨나는 망신은 면했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여전히 난관은 남아 있었다.
그녀는 이제부터 그에게 여자에게 관심을 가지라는 둥,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둥 떠들어야만 했다.
마치 그에게 이론이란 게 필요한 거처럼 말이다.
이런 외모에 이런 권력.
저러면 솔직히 그냥 뭘 해도 된다.
첫 데이트에서 로이타 페이지 부인 이 여러 명 모이면 로이타 북 부인 이 된다는 답 없는 개그나, 검날을 세우는 데는 483번 사포를 사용하는 게 가장 좋다는 안 궁금한 정보를 30분간 설명해도 넘어오는 여자들이 줄을 설 것이다.
외모가 권력이라면 이 남자는 대륙을 통일했다는 전설로 유명한 플라 티나 대왕일 테니까.
엘레노어는 민망함을 억지로 밀어 내려 애쓰며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선 얼굴이 두꺼워지는 수밖에 없다.
‘어차피 다시 볼 사람 아니니까.’
그와 잘될 가망이 있는 처녀면 모를까 나는 지금 이미 한번 결혼했던 몸.
잠깐 민망하면 앞으로 다시는 그와 마주칠 일 없을 것이다.
그녀는 생존을 위해 아무도 듣지 않는 시장 바닥에서 노인들을 상대로 관능 소설을 낭독한 적도 있는 몸이다.
“책에 이런 문구가 나오더군요.”
‘저택이란 공을 들인 만큼 인간의 마음에 보답해야만 한다. 어떤 기대라도 충족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저택이라 부를 만하다.”
엘레노어의 문장을 리안이 맺었다.
그녀는 설레는 가슴을 누르며 은근하게 본론으로 들어갔다.
“백작님께서도 어떤 간절한 기대에 응해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기대라면?”
“당신을 연모하는 수많은 여인의 기대 말이죠.”
리안이 한쪽 눈썹을 살짝 들었다.
그가 화를 낼 것 같아 엘레노어는 빠르게 덧붙였다.
“관심을 가져 보면 여인들이 참으로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걸 깨달을 겁니다.”
이번엔 리안이 들었던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금방이라도 나가라고 할 것 같아 움츠러들었는데 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나는 딱히 여인에게 관심이 없는 건 아닙니다.”
이 시점에서 리안이 원래 아일린 황녀에게 관심이 있었던가?
알 수 없었다. 소설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뭐 아무려면 어때..’
여인에게 관심이 있다면 잘됐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순조롭게 진행될 테니까.
뭐라 말하려던 엘레노어는 흠칫했다.
어느새 리안의 얼굴이 그녀 바로 근처에 다가와 있었다.
“관심이 가는 여인 외에 눈길을 주지 않는 거지요.”
속삭이듯 나직한 목소리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엘레노어는 그의 말이 진실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반복해서 읽을 정도로 좋아했던 소설의 남자 주인공.
단순히 재밌어서가 아니라 취향에 딱 맞는 그의 캐릭터에 푹 빠졌었다.
차갑지만, 자신의 여인에게는 한없이 다정하고 반듯하며 섹시한 남자.
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거지?’
기분 탓인지 제비꽃 색의 눈동자가야릇한 빛을 띤 것 같다.
쳐다보고 있으려니 몇 년째 미동도 없던 심장이 빠르게 박동했다.
리안이 설령 원작에서 나쁜 남자라도 저런 눈으로 바라보면 열녀문의 소유자이자 금욕주의 학파의 신봉자인 여인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 사람은 곧 결혼할 건데.’
엘레노어는 몸을 살짝 뒤로 빼서 그에게서 멀어지려 했다.
그러나 적당히 거리를 벌리기 전에 그가 더욱 다가왔다.
곧 등받이에 등이 닿았다.
더 물러날 데가 없었다.
리안이 어쩔 줄 모르는 그녀에게 몸을 기울여 뒤에 있는 팔걸이를 짚었다.
엘레노어는 이제 그의 팔 안에 갇힌 자세가 되었다.
‘왜 이렇게 된 거지?’
그녀는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런 흐름이 될 만한 일이 있었나?
오기 전에 했던 어떤 상상도 지금과 비슷하지조차 않았다.
당황하고 있는데 알싸하면서도 달콤한 사내의 체향이 끼쳐 왔다.
몸 안이 뜨거워졌다. 계속 눈길을 잡아끌던 석류 같은 입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당신이 여기 온 건.
낮은 목소리가 그녀에게 물었다.
“내 아버님이 보낸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