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2화 (2/120)

제2화

5년 전.

엘레노어 마리체 남작부인은 한다 현이라는 이름의 여성 패션 매거진 에디터였다.

어느 날 아침.

그녀는 갑자기 즐겨 읽던 로맨스판타지 소설 속에서 눈을 떴다.

몇 번이나 완독할 정도로 좋아하던 소설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정체를 알아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마리체 영지에서 잡아들인 악랄한 남작은 어떻게 됐지?”

“감옥에 가뒀는데 매독에 걸려 사망했다더군.”

“악인에게 딱 걸맞은 최후로군.”

“그건 그런데 부인은 가엾네. 아직 어린 데다 이제 갓 결혼식을 올렸다.

던데.”

원작에서 엘레노어와 약간의 관련이라도 있는 장면은 고작 저게 다였다.

등장 신도 없이 그저 풍문으로 죽은 엑스트라가 남편.

아예 이름조차 나오지 않는 ‘가엾은 부인’이 지금의 그녀였다.

어차피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라면 최소한 남편을 선택할 여지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가난한 평민의 딸인 그녀는 마리체 남작의 협박성 강요에 속수무책으로 팔려 갔다.

결혼 당시 그는 이미 수많은 죄목으로 투옥된 상태였으나 곧 풀려날거라 우기며 옥중 결혼을 강행했다.

‘저런 남자와 결혼이라니.’

처음 그녀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셀 수도 없는 추행과 희롱. 강요, 협박, 탈취, 횡령, 상습 폭력.

마리체 남작은 인간쓰레기의 표상같은 남자였다.

피해자 중에는 너무 어린 소녀도 많았다.

애초에 그와 결혼했을 때 엘레노어의 나이는 고작 열다섯 살이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을까.

남작은 그녀가 열여섯 살 생일을 맞기도 전에 감옥에서 옥사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은 엘레노어가 다시 일어서는 힘이 되었다.

‘더 불행할 수도 있었어.’

마리체 남작이 갇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주변에서는 옥중 결혼으로 머리조차 올리지 못했다고 수군거렸지만, 엘레노어에게는 도리어 천운이었다.

그녀는 아직 어렸고 부패한 귀족과 억지로 결혼한 아내가 흔히 그렇듯 대단한 미인이었다.

남작이 죽자마자 혼담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그러나 엘레노어는 모두 거절했다.

‘평민 신분으로 재혼해 봤자 앞으로의 인생은 뻔하지.’

이미 별 볼 일 없는 집안과 결혼했던 그녀에게 들어오는 혼담은 모두 뻔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남작 부인으로서의 위치를 포기하고 평민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았다.

제국의 평민은 아무런 특권도 없었다.

신전 소유의 숲에서 땔감이라도 주우려면 땔감 한 수레를 신전에 상납해야만 했다.

평생 거주지를 옮길 수도 없이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노동을 하며 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재혼을 포기하고 남작 부인으로 남으면 어쨌든 귀족이고, 마리 체 남작 가문의 가주였다.

비록 남작의 쓰레기 같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살아 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엘레노어 마리체 남작 부인으로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천박한 인내가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지.”

그녀가 집안의 전권을 잡았을 때 시어머니가 처음 한 말이었다.

마리체 남작 집안의 작위가 아들에게 상속된 뒤 엘레노어에게 흘러갔으므로 엘레노어가 포기하지 않으면 제국 법상 그녀는 공식적으로 아무 작위도 없었다.

그러나 엘레노어에게는 일방적인 부양의 의무가 있었다.

그것을 이용해 시어머니는 엘레노어를 갖은 방법으로 괴롭히며 내쫓으려 애썼다.

끔찍한 시집살이도 힘들었지만, 주변 상황 역시 가혹했다.

엘레노어는 죄가 없었지만, 마리체 남작의 피해자와 주변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마리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것만으로 고액의 배상 요구에 시달렸고, 어디를 가나 손가락질을 당하기 일쑤였다.

궁지에 몰렸으나 엘레노어는 울며 세상을 원망하는 대신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관능 소설과 연애 비법서의 집필이었다.

바깥 활동을 반대하는 시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단기간에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능력은 충분했다.

그녀는 유명 잡지사에서 장기간 일하며 수많은 특집 기사와 칼럼을 섭렵했다.

‘피서지에서 멋진 그이를 만드는법. ‘힙한 그녀들의 조금 야한 비밀’ 등 이곳 세계의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하는 수많은 소재가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것들은 현실에 맞게 각색되어 엘레노어 남작 부인의 저서들로 탈바꿈했고 하나같이 어마어마하게 팔려 나갔다.

돈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시가의 입을 틀어막기는 쉬웠다.

엘레노어는 시가의 반대를 무시하고 마리체 남작의 피해자들을 지원하는 사회사업을 벌였다.

손해를 감수하며, 책을 찍어 내는 인쇄소와 제본소를 영지에 개설하고 피해자들을 고용했다. 생활도 지원하고 복지 시설도 만들었다.

수년간 꾸준히 이어지는 그녀의 환원에 처음에는 비판적이던 시선들이 점점 동정으로 변해 갔다.

그리고 시선이 달라지자 선망의 대상이 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비극적인 이력을 지닌 젊고 아름다운 남작 부인.

많은 사람이 그녀를 직접 만나고 싶어 했다.

매일 밤 파티에 불려갔고, 독자들을 만나서 수 없는 낭독회를 열었다.

사교계에서는 글뿐만 아니라 그녀의 독특한 머리 모양과 화장술, 그리고 아름다운 감각의 드레스까지 화제가 되었다.

귀족 여자들은 모두 피부와 속눈썹을 강조하고 눈썹을 선명하게 그리는 엘레노어식 화장법을 따라 했다.

5년 후 스무 살이 된 그녀는 더는 사회의 밑바닥이 아니었다.

그녀는 제국 최고의 명사 중 하나였다.

*

“흠.”

엘레노어는 안락의자에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손에는 ‘칼라브리아’ 가문에서 온 편지가 들려 있었다.

그녀는 벌써 몇 번이나 읽어서 외울 지경이 된 편지의 내용을 곱씹었다.

‘리안 플로이드 칼라브리아. 그 남자는 분명히……….’

이 소설의 남주인공이다.

여주인공은 예쁘고 사이다에 직진까지 갖춘 황녀 아일린 하스카토르, 그녀는 일편단심 리안을 짝사랑하지만, 그는 요지부동.

원작에서는 애가 탄 공작이 각지의 전문가를 동원해 이성에 관한 관심을 심으려 노력했으나 소용이 없었다는 내용이 나왔다.

‘아무래도 내가 그 전문가 중 하나가 된 모양이네.

사실 공작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조금 있으면 아일린이 계략을 꾸며 그와 하룻밤을 보낸 것처럼 연기하고, 책임감이 강한 리안은 그녀에게 청혼하게 될 거다.

거절할까 하다가 엘레노어는 문득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잘 이용하면 이건 상당한 이득이 되겠는걸?’

가만히 놔둬도 어차피 그는 곧 황녀에게 청혼한다.

엘레노어는 둘이 적당히 맺어질 때까지 연애 기술을 전수하는 척 시간이나 때우다가 떨어지는 콩고물을 챙기면 그만이었다.

그 일이 끝나면 그녀는 무려 황녀와 제국 최고 귀족을 맺어 준 사랑의 오작교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쌓아 온 이력 중에 가장 막강한 타이틀이었다.

‘이렇게 좋은 돈벌이는 별로 없지.”

막대한 수입에도 불구하고 배상 책임과 시가의 사치 때문에 그녀의 재산은 명성에 비해 빈약했다.

둘의 이름을 슬쩍 바꿔 책을 쓰면 대륙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될지도 모른다.

벌써 불티나게 책 팔려 나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그리고 남주를 한 번쯤 만나 보는 것도 좋을 거야.’

기껏 소설에 빙의했는데 작가가 침이 마르게 극찬하던 주인공의 실물을 한 번쯤은 구경하고 싶었다.

아무리 잘나간다고 한들 남작 부인은 하위 귀족.

주인공 두 사람은 제국에서 둘째가라면 손꼽히는 특권 계층이다.

많은 파티에 초대받았지만 정말 제국을 움직이는 권력을 가진 거물은 만나기 어려웠다.

이대로는 평생 만나 볼 기회가 없을 것이다.

‘어차피 난 연애하기 글렀으니까..’

혼자가 되기로 삶을 결정했을 때부터 남자를 멀리해 왔다.

이제 와서 재혼을 받아들일 정도로 조건이 별로인 변두리 귀족이랑 결합하면 힘겹게 쌓아 온 모든 게 무너지고 마니까.

비극적인 남작 부인에서 무능한 기둥서방을 둔 궁상맞은 유부녀가 되면 아무도 그녀의 사랑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포기했지만, 그녀 역시 또래 여자들처럼 아름다운 사랑을 동경하는 마음이 전혀 없진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건조한 일상에서 벗어나 주인공의 사랑을 지켜보는 것도 기분 전환이 될 것이다.

마음을 결정한 엘레노어는 은은한 향수 향이 감도는 자신의 전용 편지 지를 꺼냈다.

그리고 유려한 필체로 단숨에 문장을 완성했다.

[불러 주셔서 영광입니다. 일자를 지정해 주시면 찾아뵙겠습니다. -E.

마리체]

그렇게 엘레노어는 자신의 운명을 바꿀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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