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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1화 (1/120)

남주를 꼬시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제1화

“찾으셨습니까, 공작 전하.”

비토 체펠린은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당당한 체구의 노 공작이 근엄한 얼굴을 까닥여 그를 맞았다.

“와 줘서 고맙소. 체펠린 백작. 그쪽에 앉으시오.”

체펠린은 하스카토르 제국의 궁정백(宮廷伯)으로서 다방면에 걸쳐 지식이 깊고 발이 넓은 중년 귀족이었다.

그 연륜만큼 조언자로 이름이 높아 그를 찾는 이는 저 나름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도 딱 그런 상황으로 보였다.

공작의 깊고 또렷한 눈매에 그늘이 짙게 서려 있었다.

“표정이 어두우시군요. 무슨 근심거리라도 있으십니까?”

체펠린은 예의 바르게 물었다.

“아들 녀석이 골치를 썩이는군.”

한숨 섞인 공작의 고민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최근 들은 고민 중 가장 공감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공작은 제국에서 손꼽히는 권력자인 동시에 가장 부러움을 사는 아버지였다.

리안 플로이드 칼라브리아.

하스카토르 역사상 최연소 기사단장.

무용과 지성을 인정받아 약관의 나이에 중임을 맡은 그는 탁월한 천재 성만큼이나 신의 축복을 받았다 일컬어지는 용모로도 유명했다.

게다가 부계 칼라브리아 공작가와 모계 플로이드 공작가의 유일한 후 계자로서 장차 대공의 작위에 오를 것이 확실했다.

문과 무, 미와 혈통까지 대륙 최고로 꼽히는 남자인 것이다.

‘혹시 반어법인가.’

체펠린 백작은 합리적인 의심을 품었다.

고슴도치 같은 부모가 걱정을 빙자한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공작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했다.

“그 애는 올해로 스물을 넘겼소.

그런데 여태까지 여인에게 조금도 관심이 없으니 어쩌면 좋겠소?”

그제야 체펠린은 조금 수긍했다.

수 없는 처녀들이 리안을 연모했지만, 그가 눈길 한 번 주었다는 이가 없어 세간에서는 그를 ‘스텔라리아’라고 불렀다.

체펠린은 그 별명을 처음 들었을 때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스텔라리아는 별에 가까운 절벽 위에만 핀다는 환상 속의 꽃이다.

아무도 꺾지 못하는 절벽 위의 아름다운 꽃.

무심한 그에게 너무나 잘 어울리는 수식어였다.

“섬망이 들었거나, 어디가 불편하기라도 하면 몰라도 허우대 멀쩡한 사내가 그 흔한 염문조차 없다니.

요즘 세간에는 그 애가 동성에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고 하오.”

공작은 혀를 찼다.

확실히 궁정에 은근히 그런 말이 돌고 있긴 했지만, 퇴짜 맞은 여인들의 앙심과 다른 귀족 남성들의 질투가 뒤섞인 것뿐이다.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공작이 걱정할 일은 아니었다.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그저 아직 마음에 맞는 짝을 만나지 못한 거겠지요.”

“내 생각에 슬슬 곁에 있는 여인을 알아봐야 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눈치가 빠른 체펠린은 공작의 행간을 놓치지 않았다.

“아드님의 짝으로 마음에 두고 계신 여인이 있습니까?”

“그거야 뭐.”

공작이 한쪽 눈썹을 올리며 턱을 들었다.

“굳이 내 입 밖으로 낼 필요도 없겠지.”

그의 의도를 깨달은 체펠린은 쓴웃음을 지었다.

리안 칼라브리아와 급이 맞는 여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제국의 황녀. 아일린 하스카토르말이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조만간 말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아일린 황녀가 리안을 사모한다는 건 이미 파다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쪽이 먼저 말을 꺼내면 안 되오. 반드시 이쪽에서 청혼해야 하는 거요.”

두 공작가의 결합으로 태어난 리안의 존재는 이미 황권에 위협적이었다.

체면을 중시하는 황제는 황녀가 먼저 몸 달아 접근하는 그림을 수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절대 놓칠 수 없는 혼담인데 녀석은 결혼할 마음이 전혀 없다며 꼿꼿하게 굴고 있소.”

“황녀를 만나게 되면 리안 백작님의 생각도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럴 거요. 황녀께서는 아주 똑똑한 데다 아름답고 기품 있는 분이시니까.”

공작은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그 애는 황녀와의 개인적인 만남조차 거부하고 있지.”

공작의 입에서 재차 한숨이 흘러나왔다.

“어떻게 하면 그 완고한 녀석이 뜻을 굽혀 황녀께 청혼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제야 공작의 고민이 확실해졌다.

체펠린 백작은 조금 생각한 뒤 언제나처럼 진중하게 조언했다.

“저도 무척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만, 유감스럽게도 저는 이런 분야에 대해 어둡습니다.”

그는 40대를 훌쩍 남긴 지금까지 독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도움이 될 만한 이를 소개할 수 있겠나?”

도중부터 이런 흐름이 될 것을 예상했다.

체펠린은 마치 준비한 것처럼 유려하게 말을 쏟아 냈다.

“세간에서는 정치적 조언을 얻고 싶다면 웰링턴 자작, 경제 문제라면 욘센 백작, 집안에 저주가 들었다면 미하일 신관이 최고라고 합니다만.”

공작은 왜 상관없는 이야기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 부분은 다른 전문가도 많으므로 취향에 따라 인선이 갈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녀 간의 문제라면 단연코 엘레노어 남작 부인입니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

공작의 반문에는 의아함보다 꺼림칙함이 가득했다.

반응을 보니 이 무뚝뚝한 공작마저도 일개 남작 부인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과연 리안이 그런 가십이나 뿌리고 다니는 사교계 광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겠소?”

“기울이게 하는 건 그녀의 역량에 달렸지요.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니겠습니까.”

공작은 한동안 침묵했다.

“그 말이 옳군.”

탐탁지 않은 투였으나 까다로운 공작의 말로써는 상당한 긍정인 셈이었다.

“명함을 구해 집사께 보내겠습니다.”

체펠린은 들어왔을 때처럼 정중히 인사한 뒤 공작의 서재를 떠났다.

*

“….…그렇게 맺은 둘의 사랑은 영원의 날개를 달고 날아오를 것입니다.”

사랑뜨 자작 영애가 낭독을 맺자 넓은 홀에 박수 소리가 울렸다.

“멋진 사랑 얘기네요.”

“영애께서는 정말 이야기가 마르지 않는 샘물 같습니다.”

사랑뜨 영애는 추종자들이 찬사를 받으며 홀을 가로질렀다.

그녀의 발걸음 끝에는 한 젊은 여인이 있었다.

날씬한 몸에 백옥 같은 하얀 피부.

탐스러운 갈색 머리에 잘 어울리는 색이 옅은 푸른 눈.

이제 막 소녀를 벗어난 스무 살남짓의 아름다운 여인이 깃펜을 들어 뭔가를 적고 있었다.

“이제 당신 차례군요. 엘레노어 남작 부인.”

사랑뜨 영애의 오만한 목소리가 울렸다.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 천천히 예쁜 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뭘 그렇게 열심히 적고 있죠?”

엘레노어 남작 부인은 대답 대신 테이블에 놓인 세 장의 종이를 보이지 않게 말아 손에 쥐었다. 사랑뜨영애가 높다고 자부하는 코를 더욱 위로 올렸다.

“설마 제 이야기를 듣고 낭독 내용을 수정하고 있는 건 아니겠…… 꺄앗!”

찻잔이 부서지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랑뜨 자작 영애의 비명이 울렸다.

그녀와 엘레노어 남작 부인 사이에 있던 차 테이블이 쓰러진 것이다.

영애는 찻물이 튀어 엉망이 된 드레스를 보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무슨 짓이에요! 이게 얼마짜리 드레스인 줄 알아요?”

찢어지는 듯한 영애의 호통에 하인 이 달려와 고개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영애님. 제가 얼른 치우겠습니다.”

눈썰미가 좋은 사람이라면 엘레노어 남작 부인의 드레스 자락이 움직여 테이블을 밀어내는 걸 봤을 것이다.

그러나 홀의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사랑뜨 영애는 자신을 탓하는 시선들을 느꼈는지 신경질을 내며 가 버렸다.

그녀가 멀어지자 엘레노어 남작 부인이 늘씬한 몸을 일으켰다.

“카펫이 더러워졌군요. 저도 돕겠습니다.”

하인의 곁에 쪼그리고 앉자 허둥지 등 주변에 있던 청년 귀족들이 앞다.

투어 몰려들었다.

“도자기 조각은 날카로워 무척 위험합니다.”

“제가 대신 할 테니 남작 부인께서는 앉아 계십시오.”

좀 전까지 멀뚱히 서 있기만 하던 이들의 태도가 명확히 변했다.

“정말 친절한 신사분들이시군요.”

엘레노어는 우아하게 미소 지은 뒤 연단으로 올라섰다.

그리고 참을성 있게 바닥이 다 치워질 때까지 기다린 뒤 조용히 말했다.

“몹시 죄송하지만, 제 낭독은 여자들만의 내밀한 내용입니다. 신사분들과는 저녁 연회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자리를 비켜 달란 엘레노어의 말에 남자들은 반쯤 아쉬워하고 반쯤은 반기며 자리를 떠났다.

여자들은 기대감이 고조되어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가뜩이나 관능적인 내용으로 유명한 남작 부인이 남자들을 물릴 정도라면 얼마나 대단할까.

엘레노어는 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한 실내를 둘러보며 손을 높이 들었다.

“낭독을 시작하기 전에 사랑뜨 영애께서 궁금해 하시던 종이의 내용을 보여 드리지요.”

손에 쥐고 있던 종이가 차례로 하나하나 펼쳐졌다.

[실수로 찻잔을 깨뜨렸을 때]

[손수건을 들고 다가오는 사람이 하인뿐이라면]

[당신은 대중 앞에서 연애를 논할 자격이 없는 겁니다.]

마지막 장까지 펼쳐지자 장내에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졌다.

웃음거리가 된 사랑뜨 자작 영애의 얼굴이 화르르 타올랐다.

“역시 당신이 쓰러뜨렸던 거지! 이건 함정이야!”

그러나 웃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게 함정인지 아닌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때로는 단순한 것이 전달되기 쉬운 법이죠.”

남작 부인은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영애는 입술을 질끈 깨문 뒤 일어 서서 홀을 떠났다.

“그럼 제가 이제부터 여기 모인 분들에게 진짜 사랑 이야기를 들려드리죠.”

감정이 풍부한 목소리가 홀을 가득 메웠다.

남작 부인을 바라보는 모든 여자의 눈길에는 오로지 선망만이 가득했다.

“오늘도 멋지게 끝내셨군요.”

우레와 같은 박수를 뒤로하고 홀을 나온 엘레노어 남작 부인에게 조수인 그레이엄 양이 말을 걸었다.

들어가기 전에 그녀 곁에 산더미처 럼 쌓여 있던 책은 흔적도 없었다.

“저쪽은 파리만 날리더군요.”

그레이엄 양은 반대쪽을 턱짓했다.

거기에는 여전히 사랑뜨 자작 영애의 저서 [사랑은 영원하다]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어설프게 남의 흉내를 내는 거엔 한계가 있는 법이지.”

엘레노어는 담담한 투로 말했다.

그녀가 성공하고 나자 비슷한 활동을 시작한 아류들이 많이 생겼다.

개중에는 제법 이름을 알리는 때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오래가지 못했다.

좁은 사교계에서 활동하다 보면 ‘진짜’를 만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더 자라게 놔둘 순 없어. 이쪽은 생계가 달렸으니까.”

두 사람은 후작가의 우아한 계단을 지나 2층의 방으로 돌아왔다.

열렬한 후원자인 후작 부인이 마련해 준 방답게 무척이나 호화로웠다.

“난 좀 쉴 테니 우편물을 좀 확인해 줘.”

“네, 부인.”

엘레노어가 땋은 머리카락을 풀고 코르셋을 벗어 베드벤치에 두었을 때였다.

“꺅! 남작 부인!”

그레이엄 양이 거의 경련을 일으키며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

“왜 그래?”

그녀는 제대로 말도 못 하고 손에 든 편지를 내밀었다.

편지에는 제국에서 가장 유명한 가문의 문장이 찍혀 있었다.

“칼라브리아 공작가?”

무심하던 엘레노어의 푸른 눈에 빛이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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