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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외전 5화 (120/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외전 5화

올해도 잊지 않고 왔군.

필릭스는 간질간질한 코끝을 느끼며 서랍을 뒤적였다. 손끝에 동그란 약통이 잡혔다. 안에는 황금빛의 알약이 들어있었다.

하나를 꺼내 삼키자, 효과는 즉시 나타났다. 자꾸만 신경을 거스르던 가려움도, 재채기 증상도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루시가 만든 알레르기 약은 점점 발전해서, 이제 약을 먹기만 하면 증상이 조금도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가려움이 사라진 덕에 후련함을 느끼며 필릭스는 몸을 틀어 창밖 풍경을 바라보았다.

귀신같이 찾아온 알레르기 증상과 함께, 공작저의 풍경도 가을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날씨는 점점 시원해졌고, 나무들은 올해의 마지막 푸르름을 뽐내고 있었다.

집무실 안에서 창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니 텃밭 쪽에서 걸어오는 루시가 보였다. 옆구리에는 뭔지 모를 열매를 잔뜩 담은 바구니를 끼고 있었다.

맨날 텃밭에서 살다시피 하더니. 오늘은 웬일로 일찍 돌아오는군.

저택에 가까워지는 루시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다가 필릭스도 그만 보던 서류를 덮어 버렸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나왔다.

일 층 홀로 내려가니 공부방에서 나오는 쌍둥이가 보였다.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루시가 아이들을 안아 주는 모습도.

무슨 일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던 녹스가 어떤 종이 하나를 제 엄마의 눈앞에다 팔랑거렸다. 아마 시험지인 듯했다.

“엄마, 엄마! 이거 봐! 다 맞았어!”

그 말대로 녹스의 시험지는 온통 정답이라는 뜻의 동그라미로 채워져 있었다.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가정 교사가 한마디 보탰다.

“녹스는 줄곧 시험에서 만점을 받고 있어요.”

“와, 정말 대단한걸?”

루시의 칭찬에 녹스가 우쭐거리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조금 뒤편에는 에스턴이 서 있었다. 아이는 제 형이 하는 자랑을 들으며 자기 손톱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에스턴.”

그 모습을 발견한 루시가 아이를 불렀다. 에스턴이 시무룩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더니 루시가 시험에 관해서 묻지도 않았는데 먼저 말했다.

“난 만점 아니야. 몇 개 틀렸거든.”

“그랬어?”

루시는 아이가 들고 있던 시험지를 가져가 펼쳐 보았다. 몇 군데가 틀렸다는 표시로 X자가 그어져 있었다.

“괜찮아, 에스턴. 이것도 높은 점수야.”

위로에도 아이의 표정이 나아지지 않자, 루시가 장난스럽게 에스턴의 귀에다 대고 무어라 소곤소곤 속삭였다. 아이는 귀가 간지러운 듯 입가를 씰룩대더니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주눅 들어 있던 아이가 금세 기운을 되찾았다.

“에스턴. 녹스.”

필릭스가 다가가며 부르자 쌍둥이가 달려와 아빠의 품에 안겼다. 그가 아들들에게 은밀히 말했다.

“아빠 일하기 싫어서 나왔어.”

“사실 나도 공부하기 싫어.”

에스턴이 몰래 속삭였다.

“우리 나가서 놀면 안 돼?”

녹스도 옆에서 거들었다.

“그럴까?”

필릭스의 대답에 아이들은 금방 신이 났다. 그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루시에게로 갔다.

“우리 오늘은 넷이서 산책하러 갈까?”

필릭스가 물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쌍둥이가 초조한 표정으로 엄마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고민하던 루시가 이어 흔쾌히 대답했다.

“좋아. 사실 오늘은 일하기 싫었거든.”

그녀는 들고 있던 바구니를 대충 홀 바닥에다 내려놓은 뒤 아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하여 일하기 싫은 두 명의 어른과 공부하기 싫은 두 명의 아이는 서로 손을 맞잡은 채 저택을 나섰다.

* * *

“다행이야. 제일 중요한 건 당신을 닮아서.”

정원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며 필릭스가 말했다. 루시가 무슨 말이냐는 듯 올려다보자 그가 주머니에서 약병을 꺼내 흔들었다.

“알레르기 말이야. 날 닮았다면 가을마다 꽤 고생했을 텐데.”

모든 생김새와 성격마저도 필릭스를 닮은 듯한 쌍둥이는, 신기하게도 알레르기만은 물려받지 않았다.

그래서 아이들은 가을에도 마음껏 바깥을 뛰어다니며 놀 수 있었다. 필릭스는 언제나 그 점에 대해 감사해했다.

“제일 중요한 건 아이들의 건강이니까.”

“맞아.”

공교롭게도 그 대화가 끝나자마자 녹스가 기침을 했다.

“아까부터 계속 기침하네. 감기에 걸렸나?”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루시가 결국 녹스를 불렀다. 가까이서 본 녹스는 뺨도 불그스름했다. 그녀는 가만히 아이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미열이 있네?”

“나 안 아파요.”

혹여 그만 놀고 들어가라고 할까 봐 녹스가 얼른 말했다.

“열이 심해지면 어떡하지? 머리는 안 아프니?”

엄마의 물음에 아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루시는 걱정이 되었는지 재차 아이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정말로 안 아픈 것인지, 아니면 들어가기 싫어 안 아픈 척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럼 우리 온실에 가자.”

필릭스가 제안했다. 온실 안은 언제나 따뜻했다. 감기 기운이 있는 녹스도 그곳이라면 괜찮을 것이었다.

“거기서 함께 꽃을 구경하다가 들어가는 거야.”

“좋아요!”

루시도 아이들도 찬성했다.

그들이 정원 안쪽에 있는 온실을 향해 걸어가는 사이 우중충하던 하늘에선 기어코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루시가 얼른 겉옷을 벗어 감기 기운이 있는 녹스의 머리 위로 덮어 주었다.

네 명의 가족은 비를 피해 얼른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는지라 일정한 온도에 맞춰져 있는 온실 안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차를 끓여야겠다.”

필릭스가 난로에 주전자를 걸며 말했다.

잠시 후, 물이 뜨겁게 끓어오르자 루시는 따뜻하게 우려 낸 차를 제일 먼저 녹스에게 건네 주었다. 기침이 멎질 않는 아이가 계속 신경에 쓰이는 듯, 루시는 덮어 준 겉옷을 아이의 목까지 끌어 올리기까지 했다.

“모포가 있을 텐데.”

필릭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온실 한구석에 놓인 서랍장을 향해 걸어갔다. 서랍을 열어 모포와 이것저것 필요한 것을 찾는데 문득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니 에스턴이 서 있었다.

“왜? 뭐 필요한 거 있어?”

필릭스가 묻자 에스턴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는 필릭스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괜히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아빠.”

얼마 후, 서랍 빼고 닫기를 멈춘 아이가 조용히 그를 불렀다.

“엄마는 나보다 녹스가 더 좋은가 봐.”

필릭스는 찾아낸 모포를 잠시 내려놓고 에스턴을 옆에 앉혔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왜냐면 녹스는 시험에서 백 점을 맞았거든. 오늘도, 어제도, 지난주에도. 근데 난 아니야.”

마지막 말을 덧붙일 때 아이는 시무룩하다 못해 슬퍼 보였다.

“엄마도 학교에서 맨날 1등만 했잖아. 그러니까 나보다 녹스가 더 좋은 걸 거야.”

“그거 알아, 에스턴?”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지만 필릭스는 에스턴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아빠는 옛날에 모든 시험에서 빵점 맞은 적 있다?”

“정말?”

에스턴은 그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게다가 네 엄마한테 성적표까지 들켰었어.”

“그런데 어떻게 결혼을 했어?”

에스턴이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아이의 엉뚱한 질문에 필릭스는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엄마는 아빠가 좋았대.”

“와.”

“그리고 ‘할 수 있어!’라고 말해 줬어.”

필릭스가 에스턴의 어깨를 감싸 안고서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시험에서 아무리 많은 문제를 틀리더라도 엄마는 널 사랑해 줄 거야. 그리고 ‘할 수 있다’고 말해 줄 거고. 알겠지?”

“응.”

에스턴은 한결 나아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제 엄마한테 가자.”

필릭스가 손을 내밀어 아이의 작은 손을 맞잡았다.

“에스턴, 여기 앉아 봐.”

난롯가로 돌아가자 루시가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리며 에스턴을 불렀다. 에스턴이 다가가 앉자 루시가 그의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옮은 것 같은데…….”

루시가 이마 외에도 뺨과 목, 등 온도를 재 보며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미리 타 둔 차를 아이에게 내밀었다.

“자, 따뜻할 때 어서 마셔.”

차를 호로록 들이켜는 에스턴의 눈이 필릭스의 눈과 마주쳤다. 아이는 잔 너머에서 그를 향해 몰래 웃어 주었다.

“비 그쳤어요!”

천장을 보고 있던 녹스가 외쳤다. 어느샌가 후드득후드득 천장을 시끄럽게 하던 빗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온실 밖으로 튀어 나갔다.

“루시.”

둘만 남은 틈을 타 필릭스가 루시에게 언질을 주었다.

“에스턴이 시험 치는 게 싫은가 봐.”

“아, 그거?”

루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받았다.

“안 그래도 선생님께 말해 뒀어. 앞으로 시험은 치지 말라고.”

둘은 나란히 아이들이 뛰어노는 온실 밖으로 향했다.

“아직 어린데 시험은 필요 없잖아? 그치?”

필릭스는 대답 대신 루시의 손을 쥐었다. 둘은 손을 꼭 맞잡고 밖으로 나왔다. 촉촉하게 젖은 흙냄새가 기분 좋게 풍겨 왔다.

“역시 가을이 좋아!”

루시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아, 물론 당신한테는 영 괴로운 계절이겠지만.”

“아니, 나도 좋아해.”

필릭스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좋아하게 되었어.”

널 만난 후로, 나의 많은 게 바뀌었어.

네가 바꿔 준 거야. 괴로웠던 기억을 견딜 만한 기억으로, 잊고 싶었던 날들을 참을 만한 날들로.

그리고 앞으로도 넌 내게 행복한 날들을 선물해 주겠지. 결국에는 모든 아픔을 덮을 수 있도록.

필릭스는 자신도 루시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 주겠다 다짐하며, 손 안의 손을 꼭 쥐었다. 갑자기 전해져 오는 힘에 루시도 화답하듯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빠! 엄마!”

앞에선 녹스와 에스턴이 어서 오라 손짓하고 있었다.

둘은 행복이 있는 가을 속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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