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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외전 4화 (119/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외전 4화

쌍둥이는 그토록 원했던 루시와의 첫 아이였다.

처음 임신 소식을 알게 되었을 때, 둘은 매일 밤 어떤 아이가 태어날까 설레는 마음을 나누며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 꿈같은 날들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배가 점점 불러 오며 루시가 점점 힘겨워하는 시간이 늘어났던 것이다.

루시는 음식을 잘 먹지도 못하고 게워 내거나, 온몸이 짓눌리는 느낌에 누워 있지도, 앉아 있지도 못했다.

두통을 호소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 자다가도 끙끙 앓는 밤이 많아졌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는 필릭스도 마음이 여간 좋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루시의 몸이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커다란 배를 보고 있노라면 ‘잘못되면 어쩌지’ 하는 두려운 마음마저 밀려들곤 했다.

아이가 온다는 건 축복이 아니었나.

그러나 아이가 그들 곁으로 오기까지의 과정에 대해선 루시도, 필릭스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에 아이를 기다리는 시간은 힘들기만 했다.

그 와중에 오직 그의 어머니만이 묵묵하고 차분한 태도로 루시를 돌보고 지켜봐 주었다. 네 고통을 이해한단다,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필릭스는 알 수 있었다.

루시를 보며 그녀가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배 속에 있을 때, 어머니 또한 이처럼 고통스러워했을까.

처음으로 그는 어머니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필릭스는 의자에 삐뚤게 앉아 잠들어 있는 어머니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발걸음을 돌렸다. 아무래도 어머니는 깊이 잠이 든 것 같았다.

방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필릭스.”

어머니가 그를 불렀다.

그가 돌아보자 잠에서 깬 어머니가 손에 꽃다발을 들고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일 녹스와 에스턴을 내 방으로 보내 주렴. 오랜만에 얼굴을 보고 싶구나.”

어머니가 평상시와 다름없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윽고 필릭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어머니는 또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하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다. 대신 들고 있던 꽃을 코끝으로 가져가 향기를 맡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필릭스는 어머니를 방에 남겨 두고서 밖으로 나왔다.

* * *

정적이 가득했던 어머니의 방과는 달리, 그의 침실에서는 꺄르르 웃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연이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니 침대에 누워 있는 루시와 아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쌍둥이들은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숨었다 하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녹스! 에스턴!”

“아빠아!”

돌아온 필릭스를 보자마자 아이들은 우당탕 침대에서 내려와 필릭스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엄마를 괴롭히고 있었던 건 아니지?”

“괴롭힌 거 아니야!”

“엄마랑 놀아 준 거란 말예요!”

녹스와 에스턴은 또래들보다 유별나게 발달이 빠르고 기운이 넘쳤다.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는 뜻이니 안심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벌써 험난하고 말썽 가득한 육아가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해 골치가 아프기도 했다.

나도 어릴 때 이랬던가.

생각해 보니 자신도 몇 번인가 어른들이 기겁할 만한 사고를 친 적이 있던 것도 같았다.

하지만 우린 적어도 한쪽은 얌전했단 말이지.

악동 같은 웃음을 짓고 있는 두 아들을 내려다보며 필릭스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어린 시절을 기억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데 에스턴이 필릭스의 바짓자락을 잡아당기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한 통의 편지였다.

어디서 온 편지인지 살펴보기도 전에, 루시가 먼저 알아보곤 말했다.

“에스턴! 그거 어디서 났어?”

에스턴은 순진한 표정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켰다.

필릭스가 에스턴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 들었다. 그건 아드리안에게서 온 것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루시가 다가와 도로 편지를 가져갔다.

“내가 못 살아. 안 그래도 어디로 사라졌나 했네!”

그녀의 말을 들어 보니 그 편지는 이미 며칠 전에 도착한 것인 듯했다. 아마 나중에 읽으려 테이블 위에 올려 둔 것을 아이들이 슬쩍 가져간 것 같았다.

“녹스, 에스턴. 남의 편지는 함부로 가져가는 게 아니야.”

필릭스가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아이들은 잠깐 움츠리나 싶더니 억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건 우리한테 온 편지일 수도 있잖아요!”

“맞아! 아드리안 삼촌이 꼭 편지 쓴다고 했단 말이야!”

“녹스, 에스턴.”

이번에는 루시가 낮은 목소리로 부르자 쌍둥이가 입을 다물며 엄마의 눈치를 보았다.

“그럼 바로 엄마한테 바로 물어봤어야지. 이렇게 아무 말 없이 가져가면 어떡해. 중요한 전보이면 어떡하려고 했어?”

“……가지고 있다가 엄마랑 같이 읽으려고 했어요…….”

아이들은 금세 풀이 죽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해, 엄마…….”

쌍둥이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하자, 루시는 마음이 약해졌는지 표정이 누그러졌다.

“앞으론 이러면 안 돼. 알겠지?”

“네에.”

“네에.”

루시는 아이들을 데리고 침대로 갔다.

“자, 엄마가 읽어 줄게.”

아이들은 언제 울상이었냐는 듯 루시의 양 옆자리를 꿰차고 누워 편지에 시선을 고정했다.

필릭스도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어 둔 후, 루시와 아이들 옆에 길게 누웠다. 모두 자리를 잡은 것을 확인한 후, 루시가 천천히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필릭스, 루시. 그리고 녹스와 에스턴에게.”

“봐! 우리한테 온 것도 맞잖아요!”

“쉿!”

루시는 녹스를 조용히 시킨 뒤 다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다들 잘 있지? 난 어젯밤 베르타의 수도에 도착했어.”

“베르타가 어디야, 엄마?”

“멀리 있는 섬나라야.”

“얼마나 멀리 있는데?”

“아주 멀리.”

“그럼 브롬이랑 둘 중에 어디가 더 멀어?”

루시는 좀처럼 편지를 시원하게 읽어 내려가지 못했다. 한 줄 한 줄 이어질 때마다, 아이들의 질문도 쉴 새 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필릭스와 루시는 그 질문에 모두 대답해 주느라 입에 침이 다 마를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아드리안의 편지는 두 장밖에 되지 않았지만 다 읽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편지를 요약하자면, 현재 그는 예술의 나라인 베르타 왕국에 머물고 있었고, 여행은 즐거우며 돈도 충분하고 아픈 곳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아드리안은 생각보다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필릭스는 안도하는 마음으로 숨을 내쉬었다.

처음 그가 대륙을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밝혔을 때, 필릭스는 불안한 마음부터 들었다.

이대로 그가 훌쩍 떠났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무심한 자신이 신경 쓰지 않은 동안 그에게 또 다른 문제가 생겼을까 봐, 그는 걱정하고 또 걱정했다.

하지만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아드리안이 먼저 깨닫고 이렇게 얘기해 주었다.

“걱정하지 마. 이제 난 내가 원하는 게 뭔지 그것에만 집중할 생각이야. 누구보다 이기적으로 살 거라고……. 내가 이런 말 하는 건 염치없지만, 나 대신 어머니를 잘 돌봐 줘.”

그리고 그는 정말로 떠났다.

대신 약속대로 아드리안은 달에도 몇 번씩 꼬박꼬박 소식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보내는 짧은 편지를 읽을 때마다 필릭스는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동생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있다는 것을.

“엄마, 우리도 베르타에 가요.”

“너희가 좀 더 자라면.”

“얼마나 자라야 하는데?”

“너희 머리 꼭대기가 아빠 허리까지 올 만큼.”

그 말에 쌍둥이는 동시에 울상이 되었다. 녹스는 즉각 필릭스 옆에 누워 키를 대 보기까지 했다.

아빠의 키는 아주 컸다. 그러니 엄마의 말인즉슨, 다 클 때까지 여행은 꿈도 꾸지 말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쌍둥이의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불만 가득한 아이들의 표정을 보며 루시는 문득 생각에 잠긴 것처럼 말이 없어졌다. 이윽고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루시가 쌍둥이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 주며 말을 바꾸었다.

“그럼 허리 말고 여기까지로 하자.”

그녀가 필릭스의 허벅지 중간쯤을 짚으며 말했다.

“여기까지 자라면 너희가 가고 싶은 곳에 함께 가 줄게.”

“정말?”

뾰로통해 있던 쌍둥이들의 표정이 금세 환해졌다.

몇 차례나 새끼손가락까지 걸며 엄마에게 약속을 받아 낸 후, 쌍둥이들은 졸린 듯 스르륵 잠이 들었다.

“갑자기 왜 마음을 바꾼 거야?”

잠든 아이들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려 주며 필릭스가 물었다.

“생각해 보니 어리다고 여행을 못 하게 하는 건 너무 불공평한 처사인 것 같아서.”

“너무 어려서 여행 보내기는 불안하다며.”

“그렇긴 하지만…….”

루시는 어떤 기억을 떠올리듯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도 고작 아홉 살 때 내 인생을 바꿔 준 여행을 했거든.”

필릭스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루시는 그저 미소만 지었다.

“우리 애들도 그런 여행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그 기회를 내가 빼앗을 순 없지. 그렇지, 녹스? 에스턴?”

루시가 아이들의 머리에 가만히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한 가족이 미래의 여행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창밖에는 조용히 밤이 내리고 있었다.

필릭스는 아이들처럼 까무룩 잠이 든 루시의 위로 이불을 덮어 준 뒤, 자신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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