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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외전 3화 (118/120)

네 짝사랑의 실패를 위하여

외전 3화

루시가 가리킨 목걸이를 본 필릭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음, 이걸 찾던 게 아닌데.”

“아니라고?”

필릭스의 대답에 루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준 별자리 목걸이, 줄이 많이 녹슬었잖아.”

9년 전 그녀가 필릭스에게 생일 선물로 주었던 그 목걸이는 이제 부식되고 녹이 슬어 금방이라도 줄이 끊어질 것 같았다. 그래서 루시는 그가 새 목걸이를 갖고 싶어 하는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루시가 필릭스의 목을 더듬었다.

“어? 이젠 안 걸고 다니네? 벌써 줄이 끊어졌어?”

“끊어진 지 오래야, 바보.”

“그럼 버렸어?”

“그걸 왜 버려.”

필릭스는 황당한 말을 들었다는 표정으로 재킷의 안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곧 작은 주머니를 꺼낸 그가 그것을 손바닥 위에서 뒤집자 작은 크리스털이 툭 떨어졌다.

목걸이는 줄도 없이 크리스털 장식만 덜렁 남은 채였다.

“줄도 없는데 왜 가지고 다녀? 이제 버려, 내가 새 걸로 사 줄게.”

루시가 가판대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필릭스가 지갑을 꺼내려는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니까 이걸 왜 버려? 난 가지고 있을 거야. 새 목걸이는 필요 없어.”

“참나.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닌데 뭐 하러 가지고 다니는 거야?”

“왜냐면 이건 나한테 늘 교훈을 주거든.”

필릭스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교훈?”

“어떤 상황에서든지 너와 대화할 것.”

* * *

루시와 손을 꼭 잡고 거리를 구경하고 있으니, 필릭스는 마치 학창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로부터 벌써 십 년 가까이나 지났지만, 자신의 아내는 아직도 순진한 표정으로 신기한 물건을 발견할 때마다 감탄을 쏟아 냈다.

한참을 돌아다니며 길거리 음식을 이것저것 사 먹은 탓에 둘은 식당에 가기도 전에 벌써 배가 불렀다. 루시는 배를 통통 두드리며 더 이상은 못 먹을 것 같다며 울상을 지었다.

필릭스가 루시를 어느 벤치로 데려가 앉혔다.

“그러니까, 아까부터 대체 뭘 찾고 있는 거야?”

벤치에 앉아 오랫동안 걷느라 퉁퉁 부은 발목을 주무르며 루시가 물었다.

거리를 걸으면서 필릭스가 줄곧 무언가를 찾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는 것을 루시는 눈치챈 듯했다.

필릭스는 주변의 꽃 파는 상인에게서 눈을 떼고 루시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말대로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가 찾는 것은 다름 아닌 꽃이었다. 그것도 이름조차 모르는.

“꽃을 찾고 있는데…….”

“꽃?”

“그런데 생김새만 알고 이름은 몰라.”

“어떻게 생겼는데?”

그의 아내는 꽃과 나무에 관해서라면 뭐든지 알고 있었다. 루시가 당장이라도 그 꽃의 이름을 알아내 주겠다는 듯 눈을 빛내며 나섰다.

“음, 우선 화려하진 않아. 이 정도 길이의 줄기에 새끼손톱만 한 파란색 꽃이 피는 꽃이야. 어릴 적엔 들판 여기저기서 봤었던 것 같은데.”

필릭스는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꽃의 생김새를 설명했다.

“꽃집에도 가 봤는데 그런 꽃은 없더라. 죄다 화려한 꽃들뿐이고.”

“아…… 나 그 꽃 뭔지 알 것 같아.”

루시는 무언가 떠오른 듯 벤치에서 당장 일어났다.

“내가 어딨는지 알아, 그 꽃!”

* * *

저택으로 돌아가는 길.

루시는 갑자기 마차를 세워 달라 마부에게 요청했다.

필릭스는 의아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공작가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참 더 가야 했고, 이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다.

“여긴 왜?”

필릭스가 질문을 던졌지만, 루시는 이미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뒤였다.

얼떨결에 필릭스도 그녀를 따라 내렸다.

해가 살짝 기운 데다가 어디선가 몰려온 구름이 해를 가린 덕분에 시원한 바람이 그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여러 차례 지나다닌 길이었지만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들판 위로도 바람은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필릭스, 이쪽이야.”

너른 들판을 멍하니 바라보고 선 필릭스를 루시가 불렀다. 그녀는 거침없이 길게 자란 풀숲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

“그 꽃을 찾고 싶다고 했잖아. 왠지 이 부근에 있을 것 같아.”

얼마나 걸었을까. 루시가 드디어 걸음을 멈추고 필릭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앞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당신이 말한 꽃, 이거 맞지?”

루시의 말에 필릭스는 그녀가 가리키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정말로 파란색의 자그마한 꽃을 가진 식물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좀 더 자세히 꽃을 들여다보았다.

“맞아, 이 꽃인 것 같아.”

“당연히 이건 꽃집에서는 못 찾았을 거야, 필릭스. 그냥 잡초에 가까운 식물이거든. 물론 꽃은 앙증맞고 귀엽지만.”

필릭스는 그 앞에 앉아 꽃을 꺾었다. 그리고 작은 꽃다발을 만들기 시작했다. 루시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자신도 도와 꽃을 꺾었다.

잠시 후, 필릭스의 커다란 손에 꽉 차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귀여운 들꽃 다발이 만들어졌다.

“이렇게 보니 꽤 예쁜데?”

루시가 그 꽃다발을 바라보며 말했다.

다시 마차가 있는 곳으로 나온 루시가 필릭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줘.”

“뭘?”

“그 꽃다발. 나한테 주려고 만든 거 아니야?”

루시는 어서 달라는 듯 내민 손을 까딱거리기까지 했다. 그 불량한 몸짓에 필릭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꽃을 그렇게 받고도 아직도 부족해?”

며칠 전, 필릭스는 결혼기념일을 맞아 루시에게 새 유리온실을 만들어 선물했다. 그녀가 종종 에버른가의 정원 온실에서 보았던 온갖 희귀한 꽃에 관해 이야기하며 부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새롭게 지어진 온실 안에는 에버른가의 정원뿐만 아니라 식물원 부럽지 않은 온갖 희귀 꽃들로 훌륭하게 꾸며졌다.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루시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필릭스의 턱 아래까지 내밀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하마터면 정말로 꽃을 건네 줄 뻔한 필릭스는 겨우 정신을 차리며 꽃을 뒤로 숨겼다.

“미안하지만, 이건 네 거 아냐.”

“나 말고 꽃을 줄 여자가 어디 있다고.”

“내가 언제 여자한테 준댔어?”

“흥, 녹스랑 에스턴이 받아 봤자 퍽이나 좋아하겠다.”

‘그러니까 받아 준단 사람 있을 때 빨리 줘’ 하며 루시가 장난스럽게 손을 재차 흔들었다. 하지만 필릭스는 씩 웃으며 그 손을 잡고는 마차로 걸어갔다.

“꽃 대신 다른 거 줄게.”

루시가 마차에 오르도록 에스코트하며 필릭스가 말했다.

“다른 거 뭐?”

그녀의 뒤를 따라 마차에 오른 필릭스는 대답 없이 문을 닫아 걸었다. 그리고 곧장 루시의 입술을 자신의 얼굴 앞으로 끌어당겼다.

* * *

마차가 저택 앞에 멈추어 섰다.

루시는 내리자마자 쌍둥이가 기다리고 있을 저택 안으로 한달음에 들어갔다.

그녀를 뒤따라 홀 안으로 들어선 필릭스는 잠시 제자리에 서서 머뭇거렸다. 그의 손에는 그새 볼품없이 축 늘어진 들꽃 다발이 여전히 들려 있었다.

이내 결심한 듯 발걸음을 뗀 그가 복도를 지나 어느 방 앞에 섰다.

방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슬그머니 문을 열고 들어간 필릭스가 방 안을 살폈다.

조용한 방 안, 그의 어머니가 소파에 기댄 채 피곤한 얼굴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어머니가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다가가 테이블 위에 가만히 꽃을 올려놓았다.

어머니는 그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듯했다. 그런 어머니의 얼굴을 필릭스는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어떤 흐릿한 기억 속에서 어머니는 훨씬 더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정원의 어느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녀는 유년의 필릭스가 다가가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움직임이 없는 그녀의 얼굴은 인형처럼 무표정했으며, 눈은 텅 빈 것처럼 공허했다.

아들을 보고도 전혀 반가워하지 않는 어머니.

어머니는 정말로 나에게 관심이 없는 걸까.

어린 그는 어머니의 등 뒤를 서성거리다가 마침내 결심한 듯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런 뒤 들고 있던 것을 테이블 위에 가만히 올려놓았다.

그러자 처음으로 어머니의 시선이 움직였다.

가느다란 줄기 끝에 간신히 붙어 있는 파란 꽃을 발견한 어머니는 한동안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필릭스는 심장이 뛰었다.

과연 엄마가 좋아해 줄까?

필릭스는 기다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새삼스럽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어머니를 두고 필릭스는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기 전, 그는 분명히 보았다.

어머니가 천천히 꽃을 집어 코 가까이에 가져다 대는 것을.

그 볼품 없는 꽃에서 아무런 향기가 날 리 없을 텐데도.

그 기억이, 오늘 필릭스의 머릿속에 문득 떠올랐다.

그의 아버지가 3년 전 세상을 떠난 후, 어머니 역시 건강이 쇠약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아드리안마저 공작저를 나간 후부터는 어머니가 방 밖으로 나오는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어머니는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이 꽃을 가져다주면, 어쩌면, 어머니에게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물론 어머니를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었다. 아직도 문득문득 아린 기억들이 떠올라 마음이 아플 때도 있었다.

굳이 그랬어야 했냐고, 따져 묻고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필릭스는 계속 같은 자리에 머물고 싶지만도 않았다. 상대방이 받아들이든, 받아들이지 않든 적어도 노력은 해 보고 싶단 마음이 생겨났다.

그런 마음이 처음 들었던 건, 녹스와 에스턴이 생겼을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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